영화 아무르, 감독 미하엘 하네케
두 사람이 극장에서 연주를 보고 있다. 피아노 선율이 공연장에 미세한 울림이 되어 객석에 앉은 노부부의 마음 안으로 파고든다. 공연히 끝난 후 두 사람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연주자를 치하한다. 아마도 그들의 제자였으리라. 할머니는 제자의 등을 어루만지며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독려한다. 이제 집으로 갈 시간이다. 노부부는 버스의 한 자리 앉아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들에겐 아늑하고 뿌듯한 하루였을까. 내내 머릿속을 점유했던 연주회에 대한 간단한 감상을 말하는 것일까. 영화는 아무런 음성도 없이 그들의 하루를 목도한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하루가 무사히 흘러갔다.
부부가 귀가한 집이 화면에 비춰진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근사한 집이다. 조용하고 정돈된 집에서 두 사람은 수십 년의 시간을 공유했을 것이다. 큰 창 앞에 덩그러니 놓인 낡은 탁자기 눈에 띈다. 서로를 바라보며 식사할 수 있도록 벽에 붙여진 탁자는 그들의 역사를 고스란히 증언한다. 소박한 아침 식사와 뜻밖의 일에 고개를 떨군 순간들이 연상된다. 화장실에 걸린 낡은 가운과 준엄한 피아노는 어떤가. 두 사람의 인생이 집안 곳곳에 전시되어 있다. 부부가 죽어 이 집에 다른 이가 살게 되더라도 그들이 남긴 시간의 더께는 쉽게 떨궈지지 않으리라.
영화 <아무르>는 아마도 내가 본 가장 인상적인 집에 관한 영화일 것이다. 노부부 이외의 모든 사람이 손님이자 침입자가 되고 마는 다분히 사적인 공간이다. 영화는 영화 내내 두 사람이 집 안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 지켜볼 뿐이다. 식사를 하고, 책을 읽으며 음악을 듣는 다분히 일상적인 장면들을 지켜본다. 나이를 먹으면 행동반경이 좁아진다. 차를 운전하는 것도 피곤하고, 영화관도 발에 밟히는 근저의 영화관을 찾는다. 집에서 해먹는 밥이 속에 편하고, 낡은 페이버북을 멀찍이 들고 읽는다. 그래서인지 집을 향한 애착은 나이를 먹을수록 커진다. 늘 옮겨다니던 작은 원룸을 벗어나 아늑한 집을 가지고 싶어진다. 그래서인지 노부부가 만드는 노년의 삶이라는 것이 하나하나 내 눈을 사로잡는다. 그들과 함께 병들어 가는 저 낡은 집의 공기라도 마셔볼라친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부부는 집에서 죽음을 맞는다. 남편은 병들어가는 아내를 지켜보며 괴로워한다. 개개인이 존엄을 지키며 죽을 수 있다는 건 신의 축복이다. 나는 평소에도 죽음의 방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노부부의 거실의 책장에는 유수의 작가들이 쓴 인생에 대한 책들이 가득 꽂혀있다. 두 사람은 그 책들을 읽으며 자신들의 죽음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 한 인간이 지닌 지적 체계는 죽음이라는 화두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 보일까.
남편은 아내를 죽인다. 이불로 얼굴을 덮고 숨을 멈추게 한다. 9시 뉴스에서라면 노인 부부의 갈등에 의한 우발적인 범행으로 그려졌을 사건이다. 독특한 점은 남편이 두 사람의 생로병사에 다른 이의 간섭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이 살인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침범을 막는 죽음을 원한 것이다. 늙은 남자는 딸마저도 삶의 끝에서 밀어낸다. 노부부가 오랜 시간을 통해 내린 결론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서진 자물쇠와 침범당한 집의 이미지는 영화에서 중요한 이미지다. 창을 열고 들어온 불청객 비둘기는 어떠한가. 공간의 침범은 이 영화가 말하는 죽음이라는 불청객을 노골적으로 은유한다. 불시에 나타나서 내 목덜미를 잡고, 일상을 위협하는 죽음이라는 이미지. 집이라는 공간이 침범당하면 그 불안감이 내 목덜미를 죄어온다. 영화에서 집은 곧 삶의 토대이고, 집에 대한 외부인의 침범은 죽었을 때야 가능한 일이다.
동물원 옆에 있는 서울 현대미술관(과천)에서 열린 고 정기용 건축가의 아카이브를 관람한 적이 있다. 그가 죽고 나서 처음으로 열리는 전시회였다. 정기용은 평생 집을 만들어 온 사람이다. 무수한 작업물이 전시회의 진열장에 놓여있다. 정기용이 만들어온 건축물은 그의 인생을 증명한다. 정기용의 건축은 용도와 형태, 규모가 천차만별이다. 가장 눈길을 끄는 점은 그가 남긴 집이라는 공간에 담긴 철학이다. 정기용은 모든 건축물에 자신이 생각하는 스토리텔링을 적어 넣는다. 이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콘셉트를 잡고, 인간의 내밀한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건축을 설계한다. 정기용에게 집은 인간 그 자체를 의미하는 드라마다. 그래서 그의 건축 전시는 마치 한 사람의 집에 들어와 흔적들을 통해 인생을 복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른 이의 삶을 상상하고, 그들이 뉘일 공간을 떠올리는 것. 건축이 어느 이에게 예술의 한 분야로서 자리한다면, 그 이유는 바로 이 문헌적 상상력에 있을 것이다.
최근 젊은이들에게 집은 마치 몸을 뉘어 잠만 청하는 곳처럼 보인다. 자기만의 방을 갖는다는 것이 사치가 된 세상에서 집은 곧 빚이다. 집값이 폭등하여 내 몸 뉘일 곳을 찾기 어려워지자 두 평 남짓한 원룸 방에서 잠만 자고 외출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집을 이 자본주의 시대의 권력으로 여긴다. 강남의 수십억 아파트는 자신의 계급을 드러내는 천박함이다. 최순실 국정농단의 모든 일들이 강남 3구에서 이루어 진 것을 떠올려보라. 최근의 주택대란은 집에 대한 천박한 인식을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음습한 지점이다. 정기용의 아카이브와 영화 <아무르>의 거대한 대저택은 집이라는 본인의 안식처를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우리는 내가 원하지 않는 공간에서 영문도 모른 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몸 뉘일 집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의 인생을 엿볼 수 있는 영화가 있다. <말하는 건축가>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건축가와 그의 철학에 관한 영화다. 정기용은 말한다. "건축가는 집을 짓는 사람이 아니라 문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건축가를 개발업자의 하수인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제대로 된 집에서 살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