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감독 홍상수
우연히 책을 읽다가 언캐니(uncanny)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흔히 미학이란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기쁨과 감동을 일으키는 인간의 예술을 추구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그 반대의 측면 즉 괴기함, 공포,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대상 역시 미학의 범주로 연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아름다움과 두려움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예술은 어느 순간 익숙한 듯 아름다움을 빚어내지만(canny), 또 어느 순간에 마주하면 기이함과 공포가 목까지 차오르기도 한다. 다시 말해 프로이트의 언캐니(uncanny)는 내가 그리워하는 아름다운 대상이 상대적으로 다른 이에겐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말하는 개념이다.
이는 픽사의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 마치 유아용 교재처럼 잘 정리되어 있다. 인간의 다섯 가지 주요 감정이 주도권을 놓고 타협하며 한 인간의 의사를 결정한다. 유년의 종말과 성년의 시작은 이 감정들의 타협에서 결정이 된다. 기쁨과 슬픔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할 때 우린 성장을 논한다. 유년시절엔 그저 앞을 향해 오로지 기쁨의 환희로 돌진하지만, 점차 기억의 영역에서 회한과 후회, 정념을 끌어올리는 것이 그 과정이다. 슬픔을 봉인에서 풀어주고 나서야 비로서 유년의 종말을 보는 것이다. 익숙한 것들을 떠올리며 성장하는 인간에게 첫경험은 늘 공포와 두려움을 준다.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 순간 제 모양을 달리하며 예술적 감화로 자리한다.
예술의 독창적인 면모는 그저 천재적인 한 인간의 객기에서 나오는 우연이 아니다. 모든 예술은 옛 것을 새롭게 읽어내어 다시 새롭게 맞이하는 작업이다. 예술의 매혹은 그래서 친근함 속에서 낯선 것을 찾아내는 작업처럼 보인다. 프로이트는 아마 이러한 미학의 양면성을 익숙함과 기이한 느낌으로 힘주어 표현한 것은 아닐까. 홍상수의 14번째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보고 난 후 프로이트가 느꼈던 미학의 양면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홍상수의 영화는 그의 짧고, 경제적인 연출법과는 반대로 복잡한 담론 속에 둘러싸여 있다. 말이 적은 청년의 과묵함에 반해 그 주변 사람들이 그의 대해 추측하고 떠벌이는 것처럼 홍상수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그를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사력을 다하는 꼴이다. 영화를 보는 그 순간에는 흠뻑 취해 있다가, 관람 후 내가 느낀 감정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해 허둥대는 꼴이라니. 난 매번 그의 영화를 분석하는 평론가들의 글을 모조리 읽고 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명백하게 홍상수의 영화를 텍스트로 명징하게 분석해낸 글을 읽을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이 영화를 글로 쓰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홍상수가 내게 준 그 아름다운 예술적 영감이 내게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설명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의 중심에는 프로이트가 말한 이 양면성이 대체적으로 적합하다고 판단한다.
영화 속 해원은 사흘의 일기장 안에서 등장한다. 해원이는 캐나다로 떠나는 엄마를 만나고, 유부남 남자 친구와 데이트하기도 하며, 남한산성에 올라가 쓰린 이별을 맛보기도 한다. 꿈속에서 만난 외국 교수와 결혼을 꿈꾸고, 우주대스타 제인 버킨과 만나 수다를 떤다. 난데없이 제인의 딸 샬롯 갱스부르처럼 살 수 있다면 영혼까지 팔겠다며 요란을 떠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이 일관적이지 못한 에피소드의 나열들은 도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내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내게 어떤 것이 홍상수를 몽상하게 하고, 지속적으로 극장을 찾게 하는 것일까. 왜 그를 쓰고 있을까. 영화 속 꿈과 현실이라는 범주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꿈이 현실의 무엇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가 되지 않자, 영화는 해원이가 살아내는 일상을 걸어간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그녀에 대해 누군가 묻는다면 쉽게 입을 뗄 수 없다. 제목인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 가진 느낌은 자신의 정체가 본인 스스로가 아닌 타인에 의해 정의되고 마는 그녀의 미약한 자의식을 뜻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수상하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의 대사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 군인가"라는 항변처럼 가련한다.
남자 친구인 성준은 홍상수 영화에 자주 등장했던 속물적 지식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어딘가 뻔뻔하고 오바하는 남자. 어딘지 모르게 귀여운 이 캐릭터는 해원이를 설명하는 가장 큰 단서로 제공된다. 김의성이 연기한 정체 모를 외국 교수 역시 홍상수의 다른 작품 <북촌방향>에 등장했던 베트남에서 사업에 실패한 교수를 떠오르게 한다. 그는 쉽게 혜원이를 감동시킬 만큼의 정의를 눈 앞에 제시하고, 자의식이 약한 그녀의 치부를 공략한다. 또 다른 홍 감독의 전작 <하하하>에 나오기도 했던 선배 불륜커플은 어딘지 모르게 해원이의 미래를 보는 듯 불편하다. 관계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엄마라는 존재 역시 출처가 불분명한 그녀를 보여주고 있다.(고 김자옥 님이 연기한 그녀는 스러져가는 해원이를 구조하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고 이뻐해 준다.) 그녀는 누군가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소문처럼 쟤가 그런 애였데...라는 말에 가장 잘 설명되고,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의지와 강인함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혼혈일지도 모른다는 소문과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 하는 배우라는 직업 그리고 언제나 사랑 앞에서 조연이 되어야 하는 유부남과의 서투른 연예 역시 주변 인물을 통해 각주로 처리되는 그녀를 보여준다.
나는 이 불분명한 해원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어딘지 알 수 없는 쓸쓸함과 공포스러움을 느꼈다. 삶을 살아낼수록 스러져가는 이 미약한 청춘의 존재감이 무척 슬프게 느껴졌다. 키득키득 재밌게도 보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처연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명백한 당혹감과 패배감이다. 나를 찾는 인생이 아닌 타인의 평가를 통해 자신을 정의하는 인간. 시간이 흘러 나를 설명할 때 누군가의 입을 통하지 않고서는 고개를 들 수 없는 미약한 청춘.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을 배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을 말할 때는 아무런 용기조차 내지 못한다. 현재 한국에서 불어오는 지친 이들을 위한 각종 자기개발서와 젊음을 등쳐먹는 멘토들의 등장은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을 통해 정의하려는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해원은 어쩌면 홍상수가 정의한 이 시대의 아류다.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은 이 책에서 한국의 성과주의 시스템을 비판한다. 수치화와 통계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자신을 찾지 못한 피로한 인간들을 마주한다. 고도화된 사회 시스템과 압축성장의 흔적이 역력한 한국사회에서 뒤처진 인간들은 여전히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달려야 한다. 수치와 성과로 규정된 자신의 정체성은 결국엔 다른 이와 별다른 구분점이 없다. <피로사회>는 청춘의 피로감을 곧 대량생산 공정의 조악한 생산품으로 설명한다. 홍상수의 영화 인생에서 유일하게 주체적 여성이었던 해원은 스스로 내레이션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말하고, 자신이 원하는 인생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정작 꿈에서 깨어나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그건 아마도 과거나 현재나 그리고 꿈에서나 누군가를 통해 구원받으려고 하는 종속적인 모습에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도서관에서 지쳐 졸다 깬 아름다운 정은채는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그림자조차 찾아내기 힘든 입체적인 인물로 기이함을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