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아고타 크리스토프 저
10대 중반부터 대학에 갈 때까지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을 꼭 감는다. 감상에 빠진 하루키 소설 속 남자들처럼 어느 한 가지 상처가 날 괴롭히는 건 아니다. 그저 갖가지 문제점들에 둘러 쌓여 힘들어했던 내가 기억난다. 갑자기 기운 가세, 낯선 동네로 이사, 환경의 변화, 말이 없어진 성격이 연쇄적으로 말썽을 부렸다. 그 시절 나는 많은 시간 집 안에 혼자 틀어박혀 지냈다. 지금에 와서는 소중하다고 애써 위로하는 그런 시간들이지만, 떠올리기 싫은 어둠이 끝날 것 같지 않은 오후의 적막처럼 지속됐다. 일 나간 부모님과 밖으로 도는 형은 늘 집을 비웠고, 난 남아있는 공기를 마시며 혼자서 시간을 때워야 했다. 그때 읽었던 책이 하루키의 소설들이었다. 하루키를 통해 개츠비도 알았고, 디킨스의 흙냄새 나는 세상도 알았다. 혼자 식탁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다음 읽을 소설을 떠올렸고, 읽다 잠들지라도 다시 깨어나면 누군가 있을 거란 생각에 열심히 읽어냈다. 소설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다는 점은 그 시절이 내게 준 유일한 선물이다. 이제 자투리 시간만 생기면 소설책을 뒤적인다. 늘 근사한 문장과 대가들의 리듬을 갈구하고, 한정된 인생이라는 시간에 이야기는 마치 나무가 가지를 치듯 시공간을 확장하는 기쁨으로 다가왔다.
쥐구멍에 볕이 들 듯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 귀여운 여자애랑 사귀었다. 크게 좋아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냥 만나면 즐거웠다. 중 3 때 처음 사귄 친구는 몇 달 만나다가 난데없이 대전으로 이사를 가버려 날 슬프게 했지만, 이 친구와는 1년 가까이 꾸준하게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종국엔 내 이별통보로 끝이 났다. 시간 좀 내달라고 하는 이 친구의 말을 듣고 있지 않다가 바쁜 척 외면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막 들어간 대학생활에 취해 마지막 점을 찍지 않고 끝내버렸다. 내 마음을 표현하고 솔직한 이별을 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도 든다. 매일 아침마다 문자를 보내고 하루의 마침표를 같이 찍었던 친구와 그런 이별은 아쉬운 선택이었다. 그래도 꼴에 문학청년이라고 이 친구에게 선물했던 책이 은희경의 ‘새의 선물’과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였다. 이제 막 책에 재미를 붙이려는 이 친구에게 재밌는 한국소설을 선물로 주고 싶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직접 읽어보고, 포장까지 해서 선물했던 기억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갑자기 머리에 피가 흥건하던 시절의 일들을 떠올린 이유는 헝가리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준 감명 때문이다. 사실 소설의 내용보다 그녀의 기구한 인생에 눈이 들어오면서 집필한 작품까지 손을 대게 되었다. 작가 이름부터 지루하지 않나 ‘아고타 크리스토프’라니. 저자의 이력을 읽던 중 처참한 인생의 곡절이 눈에 띈다. 2차 세계대전과 조국의 분열, 내전 그리고 가족과의 생이별이 그렇다. 행방을 알 수 없는 아버지와 모성을 느껴보지 못한 어머니. 그리고 무엇보다 애틋했던 오빠와의 추억이 그렇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된 195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는 탱크와 남루한 군복을 입은 인간들이 광장을 점거하고 세상이 전과 다름없음을 과시하고 있었다. 전날 학생과 노동자, 평범한 시민들이 반 정부 집회를 열자 군부가 나선 것이다.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당은 소비에트 연방의 주도 아래 철저하게 시민사회를 틀어쥐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를 내던 시민들의 봉기로 세상이 바뀔 거라는 기대를 품게 했지만, 탱크와 총질 앞에 쉽게 진압되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이야기들이 한 사람의 분열, 형제가 다시 조우했을 때 느껴지는 거리감 등이 마치 자아와 당신의 배합을 지속적으로 떠오르게 하는 데에는 당시의 시대 이념에 대한 제유諸有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 10대 초반의 청소년들이 부모가 없는 상황에서 못된 할망구만 사는 어느 시골 마을에서 무슨 짓을 하고 사는지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헝가리 작가에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니 지루하리라 예상한다. 하지만 의외로 소설은 쉽게 읽힌다. 쌍둥이 소년들은 버려진 자신들의 인생을 버텨내기 위해 가학적인 훈련들을 감행한다. 자신들을 괴롭히는 세상의 비난들에 익숙해지기 위해 서로를 향해 욕을 하고, 난데없이 매질을 해서 고통을 감내하는 법을 취득한다. 익숙해져 무뎌지면 그 이상 나을 게 없겠다고 정해두고는 고통과 욕망과 분노마저 스스로 삼킨다. 책과 영화도 없고 그렇다고 맛있는 음식도 없는 그들의 10대는 그렇게 무언가를 준비하고, 깨닫고 다시 훈련하는 그런 생활의 연속이다. 어머니는 폭격에 동생과 같이 죽어버리고, 난데없이 나타난 아버지는 소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건조한 문체와 감정 없이 메마른 말들만 해대는 소설 속 인물들을 보면서 이야기가 배제된 도시를 떠올렸다. 회색 물감을 칠한 듯 입 꼬리 하나 올릴 줄 모르는 경직된 무표정의 도시에서 살아갈 여력을 찾기 쉽지 않다. 신도림을 역을 향해 걸어가는 군중들처럼 표정엔 무채색의 결여가 있다. 1940년대의 헝가리든 국경을 넘어 폴란드와 체코의 봄바람도 최루탄 연기처럼 시큼하다. 소년들의 순간순간에 난 문학이 없는 세상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들에게 이야기가 있었다면,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는 구실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난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가정을 허용할 수 없는 시대를 지옥과 같이 그렸다고 확신한다. 그녀는 쌍둥이의 삶을 통해 그리고 두 사람의 이별을 위해 이야기라는 구실을 완전히 제거했다. 심지어 종교마저 허락지 않는 그런 세상을 잔인하게 새겨 넣었다. 전쟁과 이념이라는 겉 가지를 제하고 나면 혼자서 스스로를 분열하는 소년의 이야기만 남을 뿐이다.
쌍둥이 소년들의 서투른 살인과 기행이 첫 번째 소설 ‘비밀노트’의 주된 볼거리고, 도무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부모와 엮인 가혹한 운명도 흥미롭다. 그렇지만 2편과 3편에 해당하는 '타인의 증거'와 '50년간의 고독'은 무미건조한 소설로 느껴졌다. 그건 아마도 1부가 세상에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소설이었던 반면에, 2부와 3부는 다소 부가적인 설명처럼 보였기 때문이리라. 우리가 아는 익숙한 소설 방식에 의지한 2부와 3부는 1부의 비극을 위로하기 위해 애써 짓는 미소와 같다. 두 형제의 조우, 죽음이 닿아서야 무언가를 알아버린 고갯짓들이 있다. 결국 아고타는 평생 한 권의 소설만을 써온 셈이다. 그녀의 모든 작품들을 읽어봤지만, 1편 비밀노트에서 느꼈던 혼자된 자의 고독을 느끼진 못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후유증의 소설이기도 하다. 전쟁의 가혹한 운명 앞에 목이 날아간 부모의 얼굴이 뒤숭숭하게 꿈자리에 남아 날 괴롭혔다. 때론 호러 소설처럼 낙후된 인간들의 이미지와 땀 냄새가 진동하는 진절머리 나는 더위까지 숨죽이는 마음으로 견뎌냈다. 이는 한국의 문단이 한국전쟁과 분단, 민주화 투쟁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필연적인 상처다. 왜 이 작품을 위대하다며 많은 이들이 언급하는지 이해는 간다. 차가움을 넘어선 고역의 문장부터 묘사와 과장을 극도로 꺼리는 덤덤한 진술 역시 쉽지 않은 여정의 고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다 읽어냈던 건 상상과 현실이 뒤섞인 이 혼돈의 마지막 이미지를 얻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내가 짐작지도 못한 곳에서 태어난 이야기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표지사진 : 영화 박쥐, Thirst, 2009, 이 작품이 가진 기괴함과 슬픔이 공존하는 느낌이 닮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