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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un 10. 2017

우리의 잠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잠의 사생활, 데이비드 랜들 저

난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된 지금도 밤에 잠을 잘 자지 않는 편이다. 아침에 그렇게 일어나기 힘들어 고생하면서도 꼭 새벽까지 쓰잘머리 없는 짓을 하다가 눈꺼풀이 무거울 즈음 잠이 든다. 한 친구는 아침에 잠이 부족하면 죽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며 이런 날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만, 죽을 것 같은 기분은 나도 마찬가지다. 그보다 더 힘든 건 잠이 오지 않는데 침대에 누워야 하는 마음이다. 너무 할 게 많은 내 일상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확보하길 원한다. 억지로라도 잠을 자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다음날 힘들지 않기 위해서 하루의 소중한 시간을 잠으로 빼앗기는 게 못마땅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잠을 줄이려고 4시간 수면법, 분산 수면법 등을 익혔다. 인공조명을 발명한 에디슨도 4시간만 자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잠이 부족한 상태에서 책을 읽으면 집중이 잘 안되고, 졸린 상태로 출근하면 일은 더 늦게 끝나기 마련이다.


 <잠의 사생활>을 집필한 저자 데이비드 랜들은 로이터 수석기자에, 뉴욕대학의 교수이며 타임스, 포브스, AP에 글을 기고한 저명한 기자다. 하지만 그에게도 문제가 있으니 바로 그건 몽유병이었다. 자신의 냉철한 이성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발생한 몽유병 증세가 자신을 덮친 것이다. 거실 맨바닥에서 팬티 차림으로 잠에서 깬 데이비드 랜들은 잠을 알아야만 했다. 기자답게 발 빠른 취재력으로 잠에 관한 문화사를 취재하고 저명한 학자들의 의견을 구했다. 그리고 잠에 관한 각종 사례를 챕터별로 분류하여 기억하지 못하는 잠을 한층 더 우리의 일상 안으로 끌어들였다. <잠은 사생활>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잠을 자기에 생각하지 않았던 인생의 3할을 찾아주는 책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는다고 불면증이 해결되거나, 더 잠이 잘 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잠에 관해서 생각해보며 잠은 잠을 향한 집착에서 벗어날 때야 찾아오는 선물이라는 걸 깨닫게 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인류가 인공조명이 나타나기 전까진 잠을 두 번 나눠 잤다는 서술이다. 어두워진 초저녁 한 번 자고, 새벽 3시쯤 깨서 두세 시간쯤 딴짓하다가 다시 잠을 청하는 걸 떠올려볼 수 있었다. 옛날 사람들은 그 컴컴한 와중에 깨서 즐거운 섹스로 만족을 얻었다고 한다. 잠이 막 깬 이후의 섹스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과거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종일 일하고 들어와서 피곤한 상태로 하는 섹스가 푹 자고 나서 하는 섹스보다 질이 좋을 리 없다. 섹스 이후에 같이 잠들 수 있다는 장점 역시 두 번의 잠이 주는 혜택이다. 두 번의 잠은 망할 에디슨의 발명 때문에 사라졌다. 지금도 인공조명 없이 삶을 살 수 있다면 어둠 속에서 초를 들고 상대의 얼굴을 비춰가며 사랑을 나누고 있지 않았을까. 그로 말미암아 노동 시간도 확 줄이고, 칼퇴근도 늘어갈 것이며 한국의 OECD 성 만족도 순위도 꼴찌를 면하지 않겠나. 심지어 그 중간에 깨어 있는 시간에 성 기능이 더 활발해지고 집중력과 창작력도 더 좋아진다고 하니 어쩌면 현대인이 놓친 가능성의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름다운 메커니즘은 언제 왜 무너졌을까.


 에디슨이 인공조명을 세상에 내놓자 노동자들은 밤낮없이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잠을 너무 많이 자면 게으른 사람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럽게 생겨났고, 사람들은 낮과 밤을 인식하는 메커니즘 자체를 잃어버리면서 수면 문제로 번져갔다. 인공조명이 사무실을 환히 비춘 상태에서 의식은 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긴장 상태를 지속하고, 어느 순간부터 벌게진 눈으로 아이폰을 보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드는 패턴이 굳어진 것이다. 어릴 땐 좀 어두워지면 집에 들어갔고, 완전히 컴컴해지면 잠자리에 들었다. 어머니의 호통도 무서웠지만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요즘 나의 밤은 너무 재밌는 것투성이라 문제다. 핸드폰을 켜면 재밌는 영상이 쏟아지고, 책도 이북으로 바뀌면서 조명은 꺼질 줄을 모른다. 종이책이 사라지면 안 되는 이유다.


 잠으로 고생하던 나도 요즘 들어서는 자정 넘어서 꼭 잔다. 억지로라도 눈을 감고 딴생각하다가 스르륵 렘수면을 향해 길을 나선다. 책 속 내용과 다르게 난 애인과 잠을 잘 때 가장 꿀 같은 잠을 잔다. 부드러운 살결에 몸을 기대면 유아기적 수면 모드에 돌입한다. 침을 흘리고 꿈도 막 꾸고 살결의 온기에 몸이 느슨해진다. 내일의 환희와 어제의 걱정을 모두 잊어버리고 잠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 저자 데이비드 랜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한 침대를 쓰는 것은 섹스에는 좋지만, 그 밖의 점에서는 좋지 않다는 연구 결과를 중요하게 인용하는데 그건 사실 옆자리의 그 사람이 누구인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동성 말고 이성, 가족 말고 애인이 더 좋다. 당연한 거 아닌가. 가령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낯선 타인은 KTX에서 다리를 부딪쳐야 하는 남자다. 하지만 가장 좋은 건 같은 상황에서 다리를 맞댈 수밖에 없는 미녀다. 부부는 트윈베드를 써야 하는지 따져볼 게 아니라, 부부가 금술을 잘 유지할 수 있는가가 본질이다.


 애인과 함께 잠들다 혼자 잘 때는 힘들다. 운동을 죽어라 해도 눈이 말똥말똥하다. (책에서는 운동을 해봤자 잠의 질과는 무관하다고 하더라) 그래서 늘 누군가의 자장가를 기다리듯 말소리를 듣는다. 팟캐스트에서 김영하나 이동진 작가의 졸린 목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고, 마치 대화하듯 꿈자리까지 좋은 생각들로 장식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그러고 보면 잠과 외로움은 연관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늘 잠이 부족하다 보니 점심 먹고 자는 낮잠이 하루를 위한 최고의 선물이다. 밥과 낮잠의 조합은 밥과 커피보다 더 나은 선택이다. 점심을 먹고 짧은 단편소설(줌파 라히리 소설 같은) 하나를 재빨리 읽은 후에 눈을 붙인다. 짧게 20분 자고 나면 오후의 활력소로 돌아온다. 나름 정열의 상징인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등 지중해 연안 국가들의 낮잠 문화(시에스타)를 차용한다며 떠벌인다. 스페인의 최근 경제위기와 기업의 붕괴가 낮잠 제도 때문이라는 터무니없는 보도 내용은 무시한다. 책 내용에 따르면 부족한 수면은 오히려 판단력, 인지능력, 수행 능력, 주의력을 저하하니 스페인의 경제위기를 시에스타 때문이라고, 그것이 마치 게으른 문화라고 치부하는 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말이다. 이라크 전쟁 당시 많은 미군이 아군의 오인 사격으로 죽었는데 그 원인이 바로 부족한 수면이라는 건 잘 알려진 연구 결과 아닌가.


 내가 퇴근 후 늦게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운동하고 나서 몸이 노곤해지기 때문이다. 들어가면 초저녁부터 잠이 들어  새벽에 게임을 하게 된다. 밖에서 산책하다가 카페에서 책을 읽고 들어가면 그나마 잠이 잘 온다. 칼퇴근하더라도 걷고 읽고 보고 대화하다가 들어가는 것을 선호한다. 특히 나같이 혼자 사는 남자는 집에서 밥 챙겨줄 사람도 없으니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내가 집에 늦게 들어가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소설책을 읽기 위해서다. 개인적으로 꿈꾸는 기분을 삶의 가장 흥미로운 순간으로 여긴다. 심지어 잠들기 전에 이런 꿈을 꾸면 좋겠다고 생각도 한다. 이상하게 소설책을 심취해 읽은 밤이면 꿈에 그대로 소설 속 상황이 나를 중심으로 재구성되어 꿈에 나타나기도 한다. 내 경우를 생각해보면 프로이트가 말했던 꿈이 욕망의 리비도로 자리한다는 주장은 거짓부렁으로 보인다. 데이비드 랜들 역시 한 챕터를 할애해서 꿈이란 건 내적으로 결핍된 무언가를 해결하는 영역이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단잠을 자고 난 이후 영감이 떠올라 '예스터데이'를 작곡한 폴 매카트니나, 한 소녀와 아름다운 뱀파이어가 이야기를 나누는 꿈을 꾼 뒤 세계적 베스트셀러 '트와일라잇'을 집필한 스테파니 마이어는 꿈을 통해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삶을 추구했다. 예술과 꿈은 그런 의미에서 밀접한 영향을 가진 소통의 창구인 셈이다. 좋은 책 읽고, 좋은 영화를 보면 더 독창적인 꿈도 가능하지 않겠나 싶다.


청소년기에 가장 궁핍했던 건 성적인 자극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꿈들이 가장 즐거웠던 것 같다. 특히 몽정기의 꿈들은 깨고 나면 오히려 피곤할 정도로 화끈한 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당시엔 성에 대해서 여자에 대해서 잘 모르던 때였는데도 꿈은 가장 자극적인 야동을 만들어내 나를 끌어냈다. 레퍼런스가 부족하니 더 왜곡된 나체의 여인들이 날 유혹했다. 세상에 지금도 그 당시 아침에 일어나 팬티를 보고 당황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가장 몸이 뜨거울 때 난 그 몸을 식히기 위해 꿈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꿈은 참 고마운 존재다. 지금도 직장 상사에 스트레스받을 때는 그의 목을 조르고 헤드록을 거는 장면을 꿈이라는 커트에 넣어 해소한다. 요즘은 주로 누군가와 대화하는 꿈을 꾼다. 갈등과 불안을 야기하는 대화에 질려 퍼뜩 깨는 식이다. 난 무엇이 두려운 걸까. 뭘 원하는 걸까. 생전 생각도 하지 않았던 이는 왜 내 앞에 앉아있을까. 몇 년 전에 우연히 스친 그 사람은 왜 꿈에서 날 찾아왔을까.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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