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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un 10. 2017

다이라 아즈코의 멋진 하루

소설집 멋진 하루, 다이라 아즈코 저

영화 <멋진 하루>를 연출한 이윤기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다가 인상적인 구절이 있어 적어본다.

 “소설 <멋진 하루>(표제작)은 내가 즐겁게 봤기 때문에 그 즐거운 마음을 담는다고 생각했다. 이 원작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그날 오후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잠시 착각하게 만들더라. 세상은 되게 재미있는 곳이고 나에게도 이런 일이 있을 것 같고, 혹은 내가 남에게 이런 일을 해줄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런 즐거운 상상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수많은 감정과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멋진 하루My Dear Enemy, 2008

어쩌면 내가 영화 <멋진 하루>를 보고 나서 품은 애틋한 감상이 그대로 소설에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렇다면 꼭 읽어보고 싶었다. 나도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하루가 그리웠으니까. 추가로 알게 된 사실은 다이라 아즈코의 소설집 <멋진 하루>의 표제작 ‘멋진 하루’ 외에도 ‘애드리브 나이트’가 이윤기 감독의 의해 <아주 특별한 손님>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연출되었다는 점이다. 감독 이윤기가 이 소설집을 읽고 느낀 ‘기분 좋은 착각’이 최근 그가 연출하는 작품들이 가진 영화적 밑그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멋진 하루> 속 또 다른 단편인 ‘맛있는 물이 숨겨진 곳’까지 영화화할 계획이 있다는 걸 들어보니 책을 안 살 수 없다.

다이라 아즈코 소설집 멋진 하루

소설이 영화 <멋진 하루>만큼 좋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멋진 하루는 요즘도 생각나면 찾아서 틀어놓고 잠드는 그런 영화다. 말로 하긴 쑥스러우리만큼 애정을 주는 영화다. 우연히 촬영지인 용산 주변에서 일하고 있고, 문득 퇴근하고 희수와 병운이 걷던 골목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도 한다. 원작이 단편소설이어서 영화 이상의 서브텍스트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지만, 멋진 하루의 흔적이 있는 소설이라면 꼭 읽어야 마땅했다. 상이한 점을 떠올려보면 캐릭터의 해석 정도인데, 영화의 병운은 소설의 채무자 도모로 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다. 어떻게 생각하면 현실성이 떨어지는 감독의 말 그대로 요정 같은 사람이다. 곁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게끔 하정우의 넉살이 잘 발동했다. 소설의 도모로는 병운 보다 더 실패했고, 더 생각이 많아 가끔 유키에(영화에서는 희수)를 당혹게 한다. 병운이 희수와 동행하면서도 자신이 온몸으로 상황을 부드럽게 하려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라면, 도모로는 때로는 비즈니스 차원에서 유키에의 동정을 자아내 위기를 모면하는 약삭빠름을 보인다. 그런 차이가 현실감의 차원을 좌우하는 키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좀 더 판타지에 가까운 영화 멋진 하루의 꿈같은 시간들이 날 좀 더 공중에 붕 뜨게 했음에 포근한 말들을 주억거린다.

멋진 하루My Dear Enemy, 2008

개인적으로 곤란한 상황과 풀어가는 유머가 읽는 재미를 배가시키는 그녀의 소설 중 멋진 하루가 단연 좋다. 다음으로는 회사 일도 실수하고 좋아하던 여자에게는 차이고 힘이 되어주는 사람은 배신하고 마는 ‘온리 유’의 나카하라가 기억에 남는다. 그는 처치곤란의 스토커 같은 여자 때문에 직장생활, 상사와의 관계 심지어 결혼까지 망친다. 하지만 결국엔 돌아보니 스토커가 나를 위한 온리 원이라는 식의 엉뚱한 결말을 본다. 또 자신과 불륜을 저질렀던 여직원이 아끼는 후배의 아내가 되려 할 때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의 도모아키는 얄미운 남자다. 중년의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몸을 품은 여자를 향한 미안함과 그녀를 차지한 남자를 향한 질투심 같은 것들이 귀엽게 표현되어 웃음 짓게 한다. 미운 짓을 반복하는 캐릭터들이 종국엔 그래도 걔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며 조곤거리는 말투로 어깨를 툭 치고 들어온다. 아마도 다이라 아즈코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일 것이다. 말을 잘하지는 못하지만, 잘 듣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반응하는 여자일 것이다. 그런 상상을 했다. 보통 사람들이 들려주는 보통 이야기를 이렇게 흥미롭게 풀기 위해서는 애교 있는 눈짓으로 끈덕지게 고개를 끄덕거려야 할 것이다. 그녀가 만들어낸 사람들은 그런 끄덕임이 만들어낸 온기를 가지고 있다.

멋진 하루My Dear Enemy, 2008

오늘 카페에 앉아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대화하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자연스럽게 눈이 돌아가고, 힐끗 돌아보며 생각한다. 여기 있는 이 사람들 모두가 각자 심오한 인생을 사는구나. 어떤 의미에서는 고독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고독할 수 없다. 소설의 힘이라는 게 별거 있나. 돈벌이도 안 되고, 그저 읽고 나면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도 만에 하나 소설이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추천한다면 이런 말 정도는 할 수 있다. 비효율적인 혼돈으로 점철된 이 사회에서 기호화된 언어로 소통하는 게 겨우 주고받는 말의 전부다. 그런 내게 내러티브는 중요하다. 우리가 안고 있는 개인적인 내러티브를 궁금해하고 끊임없이 물어보는 것. 그들 각자의 세상을 구축하고 비단 더딜지라도 탄탄한 서사를 구축하고 있음에 감동할 수 있다. 마음이 푸근해지는 하루다.

"지금까지 마신 물 중에서 가장 맛있었던 물이 뭔지 아니?" "지금 살고 있는 숲의 물?" 루이는 맞혔을 거라 생각했지만 무로타는 고개를 저었다. "학교 수돗물. 여름에 체육시간이나 클럽 활동 끝나고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마시던 물." 땀으로 젖은 운동모자를 벗어던지고 좔좔 흐르는 물 밑에 얼굴을 옆으로 비틀어 넣을 때 감은 눈 위로 쏟아지던 하얀빛. 차례를 기다리지 못하고 온몸으로 밀고 들어오는 친구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운동장의 흙냄새.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루이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 물이 맛있다고 느낄 일은 이제 없을 거야. 후지산 복류수니 빙하의 빙하수니, 효능을 써놓은 설명서를 읽고 맛있다고 느끼는 건 머리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지, 몸이 느끼는 반응은 아냐. 학교 수돗물은 녹이나 석회 맛이 났었잖아. 그래도 맛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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