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투스카니의 태양>, Under The Tuscan Sun 2003
지난여름 이태리 유레일을 타고 열흘간 온 도시를 돌아다녔다. 잊을 수 없는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어려서부터 늘 이런 시간을 꿈꿔왔었다. 철없는 생각이지만 세상사 그저 떨쳐버리고 혼자 빈둥대고 싶었다. 그런 내게 이태리는 가장 적확하게 나의 이상을 자극하는 판타지였다. 여행을 다녀와서는 한동안 혼자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건 뭔가 이루고 섭취했다는 포만감을 되새기고 싶어서였다. 느낄 만큼 느꼈고, 볼만큼 봤다고나 할까. 기차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도 많이 하고, 여러모로 이태리 여행은 날 온전하게 해주었다. 바로 여행에 대한 후기를 남기고 싶었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정리가 안됐다. ‘역시 실시간 메모를 했어야 했어. 이건 뭐 호스텔에 들어가면 잠부터 처 잤으니.’ 그러던 중 아름다운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났고, 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이 풍덩 빠져버렸다. 그렇게 이태리 여행은 내게서 잊힌 곳이 되었다.
그러던 중 이태리를 향한 그리움이 다시 피어오른 건 영화 <투스카니의 태양>을 보면서다. 이 영화는 이태리를 향한 노골적인 동경이 영화에 진득하게 배어있는 작품이다. 맹목적 이상향을 숨기지 않다 보니 때론 ‘어 저건 너무 미화하는 거 아냐’ 싶은데, 그게 또 매력이기도 하다. 마치 이태리 관광청이 돈 주고 제작한 홍보 비디오처럼 보인달까. 이혼하고 집까지 빼앗긴 여인 프랜시스가 남은 돈을 탈탈 털어 이태리 투스카니에서 충동적으로 집을 산다. 기대와 달리 어려워만 보이던 그녀의 이태리 라이프는 마을 사람들과 공동체를 형성하며 술술 풀려나가기 시작한다. 이후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며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 영화의 스토리에 특별함은 없다. 그저 아름다운 투스카니 지역의 풍광과 유쾌한 이태리 사람들의 기질을 한껏 즐기기에 적합한 작품이다.
토스카나는 피렌체와 가까운 작은 마을이다. 내가 들렀던 피렌체는 두오모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공간이었다. 만약 거기서 투스카니를 찾았다면 이색적인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가죽 시장에서 장갑을 사려고 들락거리는 시간에 버스를 타고 영화 속 전원주택 ‘브라마솔레’를 찾았다면 어땠을까. 뭐 여행이 그런 아쉬움 하나 없을 수 있나. 아쉽지만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피렌체 여행은 날씨 때문에 꽤 고생을 했다. 두오모의 붉은 돔을 배경으로 내리는 추적추적한 비는 내심 근사했지만, 그래도 이태리는 햇볕 쨍한 맛이 아닌가. 남편과 이혼을 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던 프랜시스가 처음 여행차 찾은 곳도 피렌체 두오모였다. 이 장소는 <냉정과 열정사이>를 통해 아시아인들에게 유독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한국인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여기가 마친 천안문 광장이라도 되는 듯 압도적인 중국인의 숫자는 말할 것도 없다. 옆에서는 여자 친구의 인생 샷을 남겨주려고 바닥을 기며 몸을 웅크리고 사진을 찍는 백인 커플도 보였다. 그래 다 용서한다. 또 우산을 파는 아랍계 남성은 손끝에 우산을 올려놓고 세상을 놓아버린 표정으로 구매를 촉구했다. 영화의 프랜시스 역시 양산을 펴고 피렌체의 비를 피한다. 어쩌면 여행이라는 건 대상을 향한 환상을 철저하게 파괴하며 만들어지는 실감일지도 모르겠다. 이태리를 향한 내 기대는 추적거리는 비와 함께 급히 들이마신 공기로 전환되어 다시금 새로운 형태를 갖추었다.
베키오 다리에서 사진도 좀 찍고, 우피치 미술관을 둘러보았다. 10월이지만 너무도 많은 관광객이 있어 끝내 미술관에 들어가진 못했다. 혼자 찍는 셀카는 늘 어색하다. 셀카봉을 들고 포즈를 취하다가 어느새 쑥스러워 그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좀 더 걷다가 시뇨리아 광장을 찾았다. 반갑게도 어느새 돌아온 햇볕이 날 마주했다. 햇살을 즐기는 무수한 사람들 틈에서 나 역시 이태리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고, 내가 그들의 틈에서 같이 웃을 수 있다는 것이 벅찼다. 날씨가 사람의 기분에 미치는 영향이 바로 이런 거겠지. 날씨가 우중충하면 잘 만나던 연인과 헤어질 맘이 들고, 늘 믿어오던 가치에 균열이 보이기도 한다. 하물며 여행자의 기분은 어떨까. 바로 몇 분 전까지 고독과 외로움에 떨던 나는 이 태양이 날 위로하고 있음에 살짝 찡해졌다. 프랜시스 당신도 이런 기분을 느꼈겠지? 수십 년을 함께한 배우자에게 헤어짐을 통보받고, 도망치듯 미국을 떠나온 당신의 마음은 어땠을까. 주제넘게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볼 땐 몰랐는데, 지금은 처절하게 동감한다며 말을 건다. 아마도 지금 비 와서 그런가 봐. 훌쩍.
영화의 투스카니는 프랜시스가 바라보는 창밖 풍경으로 처음 드러난다. 비바람이 몰아쳐 그녀를 당혹게 한 첫날밤이 지나가면 투스카니는 프랜시스에게 아름다운 붉은 지붕의 풍경을 선사한다. 근처의 다채로운 꽃들과 굳이 마셔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맑은 공기의 감흥이 영화를 색칠한다. 프랜시스의 충동적 집 구매는 비현실적인 선택으로 보였지만, 막상 영화속에서 풍광과 마주하자 이해가 되는건 왜일까. 나라도 투스카니에 간다면 기꺼이 지갑을 탈탈 털리오.(그 정도 돈은 있겠지?) 어쩌면 이 영화가 수많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건 완성도와는 별반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프랜시스라는 사람이 궁금하거나, 인생의 역경과 같은 서사적 설정은 사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이태리의 투스카니가 주는 풍경, 그 자체가 모든 것을 압도했던 것이다. 내가 카프리와 포지타노를 찾았을 때 느꼈던 벅찬 감흥을 우리 프랜시스도 느낀 것이다.
그녀는 투스카니에 정착하기로 한 이후 우선 집부터 수리한다. 지극히 이태리스러운 몇몇 젊은이와 작업인부들을 모아 집을 살만한 곳으로 바꾼다. 사실 난 이 지점부터 이 영화가 지극히 판타지로 보였다. 한국의 서울에 거주하는 나는 기껏 살아봤자 아파트인데, 이런 전원주택이란 도시생활에 익숙한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먼 곳이다. 나는 오늘도 대형마트와 고급스러운 커피숍, 대중교통의 속도감을 가지고 사는데. 이런 저택을 가지려면 직장을 은퇴해야 가능하다. 내게 이태리는 그저 일 년에 몇 번 주어지는 휴가기간, 여행사의 팸플릿에서나 나와 마주할 것이다.
투스카니 주민이 된 프랜시스는 이 시점부터 그저 부러운 당신으로만 보였다.(몰입도 훅) 영화 속 프랜시스는 가끔 세상 가장 불쌍한 처지처럼 보이지만, 알고보면 그녀는 내가 어려서부터 원했던 작가라는 꿈을 이룬 사람이다. 게다가 그녀는 이태리에 큰 저택을 산 후 집필에 전념할 여유도 있다. 이태리 남자와 불꽃같은 사랑도 하고, 이웃과 근사한 식사를 즐긴다. 낯선 이웃들과 친해지고, 오래된 친구의 방문에 환히 웃기도 한다. 영화는 영화일까. 부러우면 지는건데.
그렇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저 낙담하기엔 이르다. 이건 뻔히 하는 말이 아니다. 이 비루한 내게도 선물 같은 순간들이 찾아왔으니까. 낯선 프랑스 땅에서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맛있는 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국적의 친구들과 포커를 치고, 부모님께 평생 못했던 유럽여행을 시켜드릴 수 있었으니까.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내가 예측하지 못한 미래였다. 프랜시스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것이 영원하지 않더라도, 평생 추억으로 그릴 수 있는 순간이 온 것이다.
내 최고의 여행지는 이태리 남부였다. 소렌토에서 이어지는 해안 절벽길은 그야말로 평생 잊지 못할 절경이었다. 특히 아말피와 포지타노 주변은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 운전하는 사람에겐 그저 고역이지만, 옆에 타고 가는 사람에겐 꿈결 같은 황홀한 순간들이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길과 대비되는 절벽 위의 아기자기한 집들, 레몬색 모래사장과 담백한 바람이 날 사로잡았다.
프랜시스는 이곳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이름마저 이태리스러운 마르첼로와 낭만적인 결혼을 꿈꾼다. 누구라도 이곳에서 이성을 만난다면 1.5배쯤 이뻐 보이니까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군. 최악의 상황에서 중년의 여인에게 기적이 일어나는가 싶지만, 다행히 영화는 뻔한 지름길로 빠지지 않았다. 유부남 이태리 놈은 그녀에게 결혼 사실을 들켜버리고, 뒤늦게 자신의 판단 착오를 깨달은 그녀는 가차 없이 다시 혼자의 삶으로 돌아온다. 그녀의 곁에는 한 마리의 개와 오래된 친구가 고개를 끄덕여준다. 그러고 보니 산드라 오는 위로하는 친구 역할에 참 잘 어울려.
영화에서는 리몬첼로가 마르첼로의 작업 주로 쓰인다.(이름이 비슷한 게 뭔가 통하나 보다.) 나 역시 이 설탕 덩어리 음료수에 흠뻑 취했다. 첫맛은 달콤한데, 끝이 씁쓸하다. 그래서 더 중독성이 있다. 술을 잘 못하는 내게도 처음의 달콤함은 계속 술잔을 들게 하고, 뒷맛의 강렬함은 약간의 후회를 동반한다. 사는 게 잘못된 선택과 후회의 연속인 걸 생각해보면, 끝의 비극을 알면서도 한잔 더를 외치는 내 어리석음과 잘 어울리는 술이라고 자평해본다.
내 기대대로 프랜시스는 모든 역경을 이겨낸다. 거듭 사랑을 빼앗겼지만 끝내 떨쳐낸다. 이국의 한 마을에서 새 인생을 찾아낸다. 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와 같이 영화를 본 사랑하는 여인의 눈을 살폈다. 하트 뿅뿅. 그녀는 이 영화에 흠뻑 빠져있었다. 뻔히 예상되는 시나리오는 게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상적 삶을 향한 그리움이 영화를 보는 이유가 되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난 저런 삶을 선물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깨달음이다. 모험과 낭만을 원하는 사람에게 난 턱없이 못 미치는 사람이다. 난 안정감과 반복되는 일상을 옹호하는 사람이니까. 난 그런 내 모습을 사랑하지만, 누군가에겐 하품을 자아내는 지루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유레일 기차 안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태리 사람들의 표정이다. 그들은 옆자리에 안건, 저 앞에 안건 미소와 농담으로 주변 분위기를 아늑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조용하고 개인적 울타리가 분명한 프랑스 인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서서 마시는 에스프레소와 파스타, 와인이 그리워지는 밤이다. 언젠가 꼭 다시 찾을 것이다. 투스카니의 태양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