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봄날은 간다>, One Fine Spring Day, 2001
허진호의 영화를 떠올릴 때면 큰 빌딩 안에 들어선 기분이 든다. 어느 방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 들뜬 기분과, 어디부터 건드려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이 공존한다. 마치 가스등을 들고 모비딕에서 허우적거리는 캡틴 에이허브가 된 기분이다. 허진호의 여자와 남자는 오로지 서로가 서로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때에만 행복할 수 있다. 우리 자신만의 삶, 우리 자신에게 속한 삶, 다른 이들과 상관없는 삶을 살 수 있을 때, 비로써 자유라는 착각을 손에 쥘 때 행복을 말한다. 남자와 여자가 처음 만날 때는 사랑이라는 관념에 빠져서 서로가 희미해진다. 사랑하는 내 모습에 취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한다. 하지만 조금만 거리를 두면, 둘 중 하나라도 서로에게 냉정해지면 그 착각을 되돌려야 하는 시점이 온다. 그 때 현실과 믿음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별 앞에서 거치적거린다. 그러면 이제 희미한 희망과의 투쟁이 시작된다. 사랑을 구걸하는 자에게 자비는 무가치의 언어 남용이다.
음향 녹음 엔지니어로 일하는 상우(유지태)는 강릉으로 작업을 나갔다가 은수(이영애)를 만난다. 은수는 지방 방송국 아나운서로 무기력한 얼굴로 상우를 맞는다.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두 사람은 대밭을 휘감는 바람 소리와 절간의 풍경을 녹음하며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같이 만나 자고, 먹고, 사랑하며 짧은 시절을 보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별이 그들에게 다가온다. 이혼녀인 은수는 자신에게 구애하는 남자를 잔인하게 끊어낸다. 서울에서 바다가 보이는 강릉의 아파트를 거의 매일 찾던 상우는 무덤하게 이별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두 사람은 별 다른 계기 없이 사랑에 빠졌고, 싱겁게 분리됐다. 빠른 사랑과 코 앞에 닥친 권태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귀결된다. 상우는 사랑을 착각했고, 사랑에 닳을 대로 닳은 은수는 사랑의 소멸을 촉구했다.
<봄날은 간다>의 어린 남자는 여자 친구가 자신을 사랑하길 멈추고 떠났다는 자명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니 받아들이지 못해서 영화는 특별해졌다. 영화가 말미에 은수는 상우를 찾아온다. 잔혹하리만치 상우를 밀어냈던 그녀가 다시 상우 앞에 선다. 이건 남자 감독이 가진 판타지일까? 헤어진 연인이 다시 자신을 찾는다는 게 가당키나 할까. 화사한 벚꽃을 배경으로 이 영화는 마침표 찍을 준비를 한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상우는 은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은수가 '우리 같이 있을까?' 묻지만, 상우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작게 웃어 보일 뿐이다. 그저 고개만 끄덕이면 다시 예전처럼 사랑할 텐데, 상우는 그간의 마음고생에서 얻은 귀결을 받아들인다. 영화는 맥없이 은수를 보내는 상우의 손짓을 비추고, 보리밭 한가운데 서있는 상우에게 화면을 옮긴다. 무표정으로 서서 소리를 따는 상우의 얼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암시한 체 영화는 끝이 난다.
난 최근 이 영화를 십 년 만에 다시 본 후, 며칠간 그들의 좋았던 시절에 관해 생각했다. 낯선 역에서의 첫 만남부터, 처음 그녀의 집을 찾았을 때의 긴장감, 그녀의 귀가를 기다리느라 지칠 대로 지친 얼굴, 같이 먹었던 라면, 포개어 잤던 낮잠, 첫 여행의 달뜬 감정 같은 것들. 내가 스무살 초입에 보았던 느낌과는 많이 달랐다. 내 생각은 상우에게 ‘왜 결합하지 않았냐’는 원망 섞인 질문을 던졌다. “상우야 왜 그냥 보낸 거야.” 상우는 은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그런 생각을 하는 청년이라면 그녀를 잡았어야 이야기의 핍진성에 걸맞은 게 아닐까.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지나니 이런 장면들이 떠오르더라. 그들이 이별하기 전, 남자는 여자가 너무 사랑스럽다. 한없이 좋아져 가족에게 소개하고 싶다. 무엇보다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 지인에게 그녀를 말하고 싶다. 그때부터 여자는 주춤거린다. 전과 다르게 남자를 대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를 멀리한다. 고민이 있다며 오늘은 오지 말라고 종용한다. 남자는 여자가 너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 일방적인 거리 두기에 화도 난다. 그는 무리를 해가며 여자의 집 앞에 덜컥 찾아간다. 여자는 화를 내며 그를 집에 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여자는 '헤어지자'라고 말한다. 남자는 아무런 준비가 안 됐는데, 그녀는 그를 끊어낸다. 남자의 일상은 무너지고, 시간이 스스로를 좀 먹는 순간들을 견딘다. 여자는 다른 남자에게 눈을 돌린다. 남자는 그걸 알게된다. 머리보다는 몸과 마음이 여자를 부른다. 객기를 부리고 마음대로 연락을 한다. 혼자서 감상에 빠져 오열하고, 봄날이 가는 것도 모르고 헤맨다. 너무나 구태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수많은 멜로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수많은 역경과 장애물을 넘어서 사랑을 쟁취한다. <봄날은 간다>의 상우와 은수에겐 어떤 장애물이 있었을까. 나이 차? 성향의 차이, 경제적 문제, 은수의 과거? 생활패턴이 다르고, 직업적으로 지향하는 목표가 다르다? 결혼관, 자녀관, 습관. 꼽아보자면 수없이 많은 걸림돌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저 척하니 봐도 두 사람은 무척 다른 사람처럼 보이니까. 그렇지만 그건 통속적인 것들 아닌가. 세속적 가치에 짓눌린 제멋대로의 판단 아닌가. 두 사람에게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장애물이라는 게 내겐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지나고 무언가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이유뿐이다, 그저 이별이 다가왔고, 더 사랑하는 쪽은 더 고통받는 것이다. 그래서 가슴이 무척 아팠고, 다시는 이 영화를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는 사랑 이후의 삶을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상우는 사랑 그 후의 고통을 삭히는 사람이지 표출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에겐 이별 이후의 삶이 그대로 남겨져있다. 매일 하던 일을 하고, 가족과 밥을 먹는다. 좀 더 굳은 표정과 억지 미소로 시간을 견딘다. 아마도 그래서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연인들은 사랑의 생애주기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도 그 종결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삶 속에서 그런 이별 따위야 기억으로 남겨두고 다시 오늘 할 일을 챙기는 것. <봄날은 간다>는 누구나 겪어봤을 통속극이지만, 어느 누구도 가보지 못했던 성숙한 시선을 가진다.
요즘엔 은수는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본다. 내가 상우에게 치우친 생각만 한 것을 깨닫는다. 장편 소설을 조금씩 써보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은수에 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누굴 좋아할 때 느껴지는 불안과 거리감. 지금 분명 내 침대에서 곤히 잠든 그녀를 보면서도 조바심 나는 감정. 솔직하겠다며 상처를 주는 실언. 은수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다. 현실과 괴리된 사랑타령을 그녀는 거부했다. 그녀는 아마도 상우보다 더 많은 상처와 그 후의 고달픔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사랑의 생리를 꿰둟고 있으며, 더 이상 복잡한 현실의 벽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더 이상 실패하고 싶지 않고, 안정되길 바란다. 그녀가 스스로의 소망대로 삶을 얻어갈 수 있길 기도한다.
상우는 어떨까. 그는 아마도 이제 다른 사람일 것이다. 이별 후의 그는 전과는 다른 체취(體臭)를 가진 사람일 것이다. 여전히 보리밭에 서서 소리를 채취(採取)하고 있지만, 그의 속마음에 든 것들은 다른 색을 띠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난 이 영화를 소년의 성장기라 칭한다. 이 영화의 잔혹한 귀결에 마음을 못 주고, 끝내 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난 다시 보았고, 사무치는 위안을 얻었다. 그건 소년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었고, 은수 역시 그의 기억 속에서 미소를 짓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