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침묵>, Heart Blackened, 2017
열여섯의 아침이었다. 방에서 나가려는데 햇빛이 너무 따가워 잠시간 현기증이 일었다. 잠시 창문을 열고 문 앞에 앉아있었다. 짐짓 정신을 차리고 다시 길을 나섰다. 그리고 5분이나 걸었을까. 두고 온 열쇠가 생각나서 급히 되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해서 평생 잊지 못할 그 일을 겪게 되었다.
당시 나는 일종의 걷기 놀이에 빠져 있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확인되면 걷는 내내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밤늦도록 걸었다. 그때만큼 집이 싫었던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내가 걷는 게 일상이 된 이유라면 바로 그 당시의 습관 때문일 것이다. 어느 동네에서든 귀에 이어폰을 꼽고 손을 점퍼에 푹 찔러 넣고 부지런히 걷는다. 요즘도 일을 하다가 문득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리면 어김없이 가벼운 발걸음을 떠올린다. 하던 일을 멈추고 맑은 햇살 아래서 태연자약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상상하는 손쉬운 행복의 테두리다. 적어도 잠시 동안은 이 도시가 나 혼자만의 영역이라고 안심한다. 엮이고 사로잡는 관계의 막을 떨쳐내고 평온한 내 공간을 확보하는 몸짓이다. 이건 말로 하면 우습지만 내가 안정감을 갖는 유일무이한 노하우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내 귀에는 언제나 이어폰이 꽂혀있다. 포도주의 코르크 마게처럼 세상의 굉음으로부터 나를 차단해준다. 백 퍼센트 캐시미어 스웨터보다 포근한 이 마게를 통해 나는 도피의 설렘을 느낀다. 일종의 백일몽의 상태를 맞이하듯 모든 의식을 죽인다.
라디오 헤드의 How to Disappear Completely를 자주 듣는다. 나는 가사는 잘 몰라도 제목이 무척 마음에 들어 계속 흥얼거리며 이 노래를 듣곤 한다. 늘 이 세계에서 완벽하게 사라지는 방법을 상상하곤 했다.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며 걸음을 재촉한다.
그날 열쇠를 가지고 다시 문밖을 나온 나는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난 그 녀석과 마주했다. 나는 누추한 슈퍼 옆 골목길 들어서서 한 모퉁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주위에 사람은 없었다. 그곳에는 고양이 한마디가 내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쥐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죽이려는 놈과 곧 죽임을 당할 녀석 사이의 입장 차가 명확하게 보였다. 고양이가 심취한 이 놀이는 마치 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 익숙한 길처럼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쥐는 일종의 체념 상태에 빠져서 고양이가 툭툭 건드려도 아무런 반응도 못했다. 극심한 피로감일까, 모든 걸 받아들인 숙응이려나. 고양이는 수십 번이나 쥐를 던졌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려 하자 이리저리 굴리며 다소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잠시간 뻔히 쳐다보았다. 마음속으로 그만했으면 됐잖아라고 생각할 때였다. 고양이는 쥐의 머리를 물어뜯었다. 쥐의 몸은 잠시간 뒤틀리며 움직였지만 소멸했다. 고양이는 쥐를 마저 다 먹지 않고 부르르 몸을 떨고는 입 주위의 피를 핥았다. 그리고는 온몸을 정성껏 손보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난 고양이를 향한 알 수 없는 혐오감과 함께 살기를 느꼈다. 커피잔의 얼룩처럼 인상만이 잔뜩 묻어있는 기억이다. 생의 숨겨진 음습함과 잔혹함을 미처 뒤늦게 목격한 기분이랄까.
난 누군가의 말을 쉽게 믿지 못한다. 나 스스로 조차 거짓말을 할 때가 많으니 남은 오죽하겠는가 싶어서이다. 한마디로 팩트 체크가 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쉽게 믿지 않는 것이다. 세상이 흉흉해서인지 그런 생각은 남들도 나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보이스피싱과 인척의 배신이 횡횡하는 뉴스를 보다 보니 더 그렇다. 권력자가 부패한 것이 매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심저어 뉴스에서는 팩트체크라는 코너까지 진행한다. 그 정도로 해주지 않으면 누군가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진술보다는 물증이 우선이다. 녹음과 영상, 사진에 대한 믿음은 굉장히 크다. 난 종종 이러한 사람들의 태도가 역설적이면서도 흥미롭게 느껴졌다. 여기 사진 있어 투척! 여기 카톡 캡처 있어 투척! 여기 녹취록 있어 투척! 여기 CCTV 있어 투척! 이 정도면 사람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말보다 앞선 이미지의 시대가 지금 바로 이 세상이다.
내가 고양이에 관한 기억은 실제한 것일까? 기억의 불완전성은 누군가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다. 그건 나 조차도 확신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물증이 없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들어 사진을 찍지 않았기 때문에 증빙할 방법이 없다.
영화 <침묵>을 보았다. 영화의 시작은 한 식사자리에서 딸과의 관계가 벌어질 대로 벌어진 남자와 딸, 그의 여자 친구가 함께하는 불편한 자리다. 두 사람의 관계에 소외감을 느낀 딸은 이 자리가 불편하다. 도무지 관계를 회복하기 힘들어 괴로워하던 남자는 짜증을 낸다. 이후 사건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술 취한 상태에서 아빠의 여자를 불러낸 딸은 이후 살인 용의자로 몰린다. 그 하룻밤에 무슨 일이 일었났는지 알 도리가 없다. 영화는 법정다툼으로 이어나가고, 권력자는 딸을 구재하기 위한 치열한 다툼을 펼친다.
이 사건의 결정적 반전은(스포일러 주의!) 사건을 자신의 의도대로 조작하는 남자의 태도다. 그는 권력가이자 아버지이며, 한 여자의 남자 친구이자 피의자의 입장에 서서 사건을 바라보는 화자다. 그는 자신이 죄를 뒤집어쓴다는 미명 하에 사건의 증거를 만들어낸다. 마치 부성의 상징처럼 감동적으로 연출되었지만, 결국 돈과 권력이 있으면 사건을 조작하는 건 쉽다는 결론이다. 시대의 범죄를 떠올리게 하는 권력가 임태산은 진술을 신용하지 않는 시대에 팩트마저 조작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권력자가 대중을 호도할 수 있는 건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연출이 생활화되고, 영화가 현실이 되는 이 세계의 법칙을 과연 누가 정한단 말인가. 이 영화의 임태산은 유독 말이 없다. 철저하게 증거를 조작하고, 진실을 뒤바꾸지만 결코 말은 삼간다.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 어차피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가 사건의 조작에서 이미지의 생산을 중요시하는 건 이런 대중의 맥락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경우로 우리는 이미지의 확고한 지위를 신용하다 보니 맥락을 무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저 이미지에 나타난 사실에 기반하여 모든 걸 추론하고, 그 전과 후의 모든 과정을 무시하는 처사다. 이는 인간이 한 가지 사실을 접할 때 되도록 단순하게 사실을 축약해서 받아들이려는 본능과도 관련이 있다. 평창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의 김보름 사건은 그 절대적인 사례다. 우리는 명확한 증거인 양 경기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그 어린 선수의 경기 후 인터뷰를 유심히 들었다. 자 이제 그녀의 인생을 재단할 시간이다. 통째로 털어서 전복시키려고 한다. 과연 우리는 그 장면들로 모든 걸 파악했고, 그녀를 처단할 수 있는 위치에 선 걸까. 익명성에 가려진 키보드들은 그녀를 끝장내라고 종용하고, 언론은 특집 코너까지 편성해서 과거의 행적들을 끄집어낸다. 정확하지 않은 근거로 추론한 드라마가 전파를 타고 흐른다.
인간은 큰 기울기를 좋아하는 동물이라고 한다. 신데렐라 스토리를 좋아하지만, 그보다 더 좋아하는 건 신데렐라가 다시 추락하는 낙차다. 철학자 칸트는 “맥락 없는 사실은 맹목적”이라고 했다. 그는 아마도 명확한 사실만큼 기만적이 것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리라. 과연 우리는 사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 사실의 근처에 간 적이라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