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연애담>, Our Love Story, 2016
마음속에 애틋하게 간직한 영화가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는 걸 지켜보고 있다. 그것이 심지어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 할지라도 애석한 마음이 드는 걸 막을 순 없더라. <연애담>을 만든 이현주 감독이 은퇴했다. 한동안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그녀의 범행을 읽고 또 읽었다. 우연히 아침에 이 기사를 접했을 땐 단순한 해프닝처럼 느껴졌다. 다시 그녀의 범행에 대한 수사결과와 과거 인터뷰를 모두 읽어보았다. 그땐 그저 그녀가 언론에 의해 조리돌림 당하고, 결국 핀치에 몰려 은퇴를 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법적으로도, 창작자를 향한 윤리적 물음에도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훌륭한 감독을 잃었다는 안타까움과 내가 <연애담>을 보며 가졌던 벅찬 느낌이 배신감으로 점철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제 작년 개봉한 <연애담>은 독립영화에 동성애를 다룬 영화라는 일종의 핸디캡을 넘어서는 성공을 거뒀다. 특히 완성도 측면에서 매끈하고 흥미로워서 단 한 순도 지루함 없이 관람했다. 영화가 가진 일상성, 요원해 보였던 보편성이 끝내 맺어지는 걸 보고 벅찬 마음으로 극장을 나왔다. 그들은 나와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들어갔던 사람들을 감복시킬 만한 이야기였다. 기존 <꿈의 제인>, <아가씨>와 같은 진일보한 퀴어 영화와는 다른 것이었다.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해졌다는 말이 어울리는 영화가 <연애담>이 아닐까. 그런 미덕을 가진 영화를 자주 접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특히 성소수자들이 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에는 소중한 존재를 향하는 모든 태도가 함축되어 있었다. SNS와 댓글들에 그들이 남긴 이 영화의 후기에는 자신의 경험과 이 영화를 비교하는 사연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작년 여의도의 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나온 나 역시 이 영화에 관한 글을 수첩에 끄적거리곤 했다. 같이 본 친구와 이 영화에 관해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눴다. 우리 대화의 주제는 대체로 동성애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젠더의 윤리성 앞에서 이토록 성숙한 영화가 있었던가 하는 놀라움이었다. 젠더를 의식하지 않고 가슴 절절한 사랑이야기를 다룬 점에서는 <가장 따듯한 색 블루>가 떠오르기도 했다.
가령 이런 장면이 있다. 처음 썸만 타다가 처음으로 같이 침대에 든 지수와 윤주의 베드신이다. 적극적인 지수는 경험이 없는 윤주를 리드하려고 한다. 적극적으로 이제 막 키스를 하고 옷을 벗기려는 순간 윤주는 거부감을 표한다. 이어 지수는 바로 포기하고 이불을 곱게 덮어주고는 불을 끈다. 영화는 분위기만 잔뜩 잡아놓고는 일거에 베드신을 끝내버린다. 이불을 덮어주고 다소 허탈한 표정으로 옆자리에 누운 지수는 윤주를 슬쩍 보고는 슬며시 미소 짓는다. 이런 태도는 연애담이라는 영화를 신뢰할 수 있는 레즈비언 영화로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이성애가 가진 우스운 권력관계와 영화적 내러티브에 따른 폭력적 장면들이 거세된 아름다운 베드신으로 기억한다. 퀴어 영화들이 쉽게 빠지기 쉬운 자극적 성 표현의 수위를 잘 컨트롤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난 퀴어 영화라는 레테르를 가지고 그 소재에 함몰되어 무너지는 걸 여러 번 보아왔다. 특히 독립영화들은 더욱더 자극에 안달 난 청소년처럼 벙벙 뜨기 일수였다. 하지만 <연애담>은 차분하고 정적인 와중에도 연애가 가진 감정의 선에 집중하는 영화였다. 난 아직도 종종 몇몇 장면을 떠올리며 <연애담>이 어떤 방식으로 특별한 지위에 올랐는가 생각한다.
이 장면은 안타깝게도 이현주 감독의 범행을 처음 뉴스에서 봤을 때에도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성폭행이라는 죄명으로 본 그녀의 행위들은 영화와 아주 모순적이다. 아니 이런 장면을 연출한 사람이 현재에선? 흔히 말하는 인지부조화의 가장 적절한 예를 목격한 기분이다. 더 화가 나는 건, 성소수자를 다룬 퀴어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 더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괘씸함에 있다. <연애담>이 이룬 큰 성취만큼, 조롱당해야 할 다른 퀴어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 영화가 소중하기에 리뷰를 더 잘 쓰고 싶었다. 적어도 내게 익숙지 않은 형태의 감흥이었기에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상태에 이르러서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내 욕구에는 그저 이 영화가 시시한 동성애 연애가 아니라는 항변을 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또 하나는 감독의 범행에 <연애담>이라는 영화 자체가 부정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난 그녀의 법적 처벌과 비난의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사건의 개요와 피해자 인터뷰 내용, 그리고 SNS를 통한 이현주 감독의 변명까지 모두 읽고 나면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한다. 그 여파로 <연애담>의 DVD 출시는 취소되었다. <연애담>의 제작사가 감독 대신 관객들에게 사과를 한다. 그리고 재개봉 일정을 취소해버렸다. 감독은 기다렸다는 듯이 은퇴를 선언했다.
이현주 감독의 경력이 끊긴 것과 함께 <연애담>까지 시장에서 조롱당하고 있다. 댓글에서는 여자끼리 꼬시고 성관계하는 영화라고 이 영화를 보지도 않고 지껄이는 댓글들이 줄이어 달리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혐오감을 이 기회에 제대로 풀어보자는 갖가지 추악한 댓글들도 자주 보인다. 언론 역시 이현주 감독과 <연애담>을 세트로 엮어 비난하는 기사를 쏟아낸다. 난 이쯤에서 묻고 싶다. 왜 아직도 우리는 창작자의 개인사와 영화 자체를 구분하지 않는 것일까. 지금의 이 상황이 과연 온당한가 하는 물음은 왜 보이지 않을까. 어떤 영화를 볼 때 스스로의 가치관에 맞게 보게 된다. 자기가 가진 사고의 필터를 거쳐 영화가 흡수된다. 감독이 싫어 영화를 보기 싫은 사람이면 택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사랑했던 이들이 이 영화를 추가적으로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건 부당하다. 감독과 별개로 이 영화의 존재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까지 무시당하는 기분을 참기 어렵다.
이 문제는 홍상수 감독과 로만 폴란스키의 사례와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홍상수 감독은 죄가 없다. 그저 유부남이 바람을 펴서 젊은 여배우와 사귄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언론은 심판대에 오른 늙은 유부남을 몰아세웠다.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사 사생활이 까발려졌다. 하지만 그는 창작을 계속하고 있다. 더 왕성하며 더 견고하게. 해외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탔고,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건 법적이 문제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까. 홍상수가 싫은 사람들은 홍상수를 보지 않는다. 그건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론이 그를 심판하려고 해도 일정 부분 한계가 있다. 홍상수는 자신이 만드는 창작품과 자신을 구분하기 때문이다. 이는 대중들도 개인사와 영화를 구분하기 시작했다는 반증이다. 소란스럽지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상영이 취소된다든지, DVD가 취소되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는다. 홍상수는 한 유부남 감독과 사랑에 빠진 여배우의 이야기를 다룬 <밤의 해변에서 혼자>로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은 물론 국내의 수많은 영화제의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견이 없는 2017년 최고의 한국 영화였다.
로만 폴란스키는 아동 성범죄자다. 혐의 입증도 된 사람이다. 그는 미국에서 범행을 벌였지만, 오직 유럽에만 살면서 처벌을 회피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영화를 즐긴다. 그의 예술작품과 본인을 분리하기 때문이다. 로만 폴란스키는 명백한 범죄자지만 경력이 끊기지 않았다. 그는 위대한 영화감독으로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결국 75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아카데미는 자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최고의 감독이라는 영예를 내린 것이다. 그만큼 개인사와 작품 자체를 분리해내려는 것이 예술계 전반이 가진 태도다. 폴란스키는 올해 신작을 내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 누구도 그의 창작의 영역에 제동을 걸지 못한다.
그렇다. 이런 직접적 비교가 바보 같다고 느껴진다. 위 사례들과 이현주 감독의 경우가 같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경우와 입장이 일견 차이가 있다. 한 개인의 도덕적 추락을 예술이라는 미명 하에 수습하려는 건 비겁하다. 그렇지만 유독 성소수자이기 때문에 이현주 감독의 처지가 더 가혹하게 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드는 것이다. <연애담>이 동성애를 다룬 영화이기에 감독의 윤리가 작품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닌지 의심된다. 레즈비언이라는 젠더를 가지고 있어서 그녀에게 더 엄격한 윤리적 잣대가 제시된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그 어느 예술가에게는 관대한 개인사와 작품의 분리성이 왜 이현주 감독에게는 적용되지 않는지 답답한 마음뿐이다.
난 연애담의 작은 침대를 기억한다. 그들이 만난 홍대의 주점을 기억한다. 지수의 집에서 본 작은 프렌치 프레스를 기억한다. 그녀의 부스러기 같은 옷가지와 낡은 노트북을 기억한다. 처음 만나 걷던 골목길과 헤어지기 전 마주하던 몽롱한 불빛을 기억한다. 그 기억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어떤 소중한 영화가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