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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Feb 23. 2018

이것은 걷기 예찬

영화 와일드 Wild, 2014

서울 시내에서는 거의 운전하지 않는다. 비좁은 골목길에 주차하는 게 늘 번거롭고, 지긋지긋하게 막히는 시내 차로엔 구원의 손길이 없다. 꽉 막힌 도로보다 더 고역인 것이 만원 버스다. 출퇴근의 피로감을 그대로 싣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버스의 굉음은 도시의 혐오라 불러도 무방하다. 그래서 서울은 역설적이게도 걷는 행위를 고귀하게 만들어주는 도시다. 꽉 막힌 여의대방로에서 전전긍긍하는 차량을 옆에 두고 유유히 걷는 발걸음은 가볍다. 마치 혼자 전용 도로라도 걷는 듯 특권의식을 느낀다.

걷기에도 준비가 필요하다. 우선 잘 걷기 위해서는 가방에 무엇을 '넣을지' 그리고 무엇을 '듣는지’가 중요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느 동네'로 가야 좋을지, '어떤 카페'에서 '어떤 커피'를 마실지까지. 저녁에는 '어떤 샌드위치'를 먹을지, '책은 무엇'을 골라야 할지 생각이 많아진다. 외출이라는 건 늘 의외성을 동반하는 여정이고, 계획은 틀어지게 마련이다. 수많은 경우들을 상상하며 백팩 안에 여러 가지 물건들을 챙긴다.

난 한 낮의 서울 지하철은 좋아한다. 촘촘한 거미줄에 매달려 가는 기분이다.

먼저 오늘 귀에 꽂을 음반을 정한다. 팟캐스트도 좋다. 두 번째로 소설책과 비소설 한 권씩 넣는다. 마지막으로 노트와 연필, 당 부족을 위한 초콜릿과 물티슈를 챙긴다. 그렇게 모든 짐을 싸고 집을 나서려다 보면 어깨에 통증이 느껴진다. 고작 몇 시간의 외출에 이런 가방을 메고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길 희망하는 나는 결국 어떤 물건도 빼지 못한다. 내가 늘 큰 백팩을 구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파트 문을 나서 걷기 시작한다. 이제 무언가를 듣고 싶어 진다. 걷기 행위의 질을 좌우하는 선택이 음악의 선택이다. 멜론 월정액을 걸어놓고 무한 스트리밍을 통해 음악을 섭취한다. 과거 CD를 몇 장씩 가방에 넣고 다니던 시절을 생각하면 이게 무슨 호사인가 싶다. 손바닥보다 작은 기계에 세상의 모든 음악이 들어있다는 생각을 하면 부자가 된 기분이다.

쳇 베이커 평전, 제임스 개빈 저

최근 쳇 베이커의 전기(Deep in a dream : the long night of Chet Baker, 제임스 개빈 저)를 읽고 있다. 그의 인생을 짚어가면서 그가 연주한 음악을 하나씩 검색하며 듣고 있다. 한 사람의 인생과 그가 남긴 음악을 비교하며 듣는 재미를 느낀다. 마치 1950년대 뉴욕 낡은 술집 안 쳇 베이커의 연주를 직관하는 기분을 느끼는 동시에, 무대 뒤편 그가 남긴 동료들과의 갈등을 모두 훑어보는 재미랄까. 쳇 베이커를 통해 당시 재즈 신의 분위기를 익히고, 찰리 버드, 제리 멀리건, 존 콜트레인, 빌 에반스 같은 명 뮤지션들의 음악 세계에도 기웃거리고 있다. 쳇 베이커가 남긴 인생의 추악한 면모엔 위대한 예술가라면 어김없이 가지고 있는 운명적인 그림자가 있다. 수많은 여성들에 대한 악행과 범죄 그리고 약물에 대한 집착들이 책 속에 가감 없이 펼쳐진다. 막상 그가 남긴 명곡들을 듣다 보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어둠이 가득하다. 마치 그것이 예술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듯 표지 속의 쳇 베이커는 웃음이 없다.


30분 넘게 걷다 보니 이제 슬슬 음악이 지겹다. 최근에는 음악을 듣다가 이야기가 그리우면 팟캐스트를 찾는다. 출퇴근길은 물론 자기 전에도, 헬스장에서도, 빨래를 할 때도 팟캐스트는 늘 내 곁에 있다. 라디오와는 다르게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내용과 시간에 제약이 없이 들을 수 있다는 게 맘에 든다. 팟캐스트 초보로서 내가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분야는 대부분 도서 관련 프로그램이다. 가장 자주 듣는 건 <이동진과 김중혁의 빨간 책방>이다. 그리고 자기 전에는 주로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을 듣는다. 어쩌다 보니 딱 두 개만 듣는다. 처음엔 책과 관련해 수많은 담론을 쏟아내는 수다형 팟캐스트가 좋았다. 하지만 최근엔 점점 그냥 책을 읽어주는 낭독에 흥미를 느낀다. 이야기 그 자체가 하나의 완전체인데, 그에 덧붙이는 담론에 점점 무용한 기분이 든다. 특히 '레이먼드 카버'나 '체호프'의 짤막한 단편을 다 듣고 나면 마치 다른 도시에서 숨겨둔 애인이라도 만나고 온 듯 혼자 행복한 기분에 젖는다. 문학이라는 영역에는 옆 사람의 스쳐 지나가는 걸음걸이에서도 복잡한 인생의 심연을 상상하게 하는 입체성을 내포한다. 걷는다는 운동과 이야기가 포개어지면 마치 누군가의 이야기가 내 몸으로 잠시 영접했다가 떠나가는 기분이 든다. 그것이 문학의 원 체험이 아닐까.

영화 와일드 Wild, 2014

어제 본 영화 제목은 <와일드>다. 주연인 '리즈 위더스푼'에 대한 호감이 없다. 그녀가 나온 영화 중에 기억나는 작품이라곤 데뷔작인 <금발이 너무해>밖에 없다. 이 영화는 리즈 위더스푼을 처음으로 주의 깊게 본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영화는 셰릴이라는 여성이 4천 km가 넘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 이하 ‘PCT’)을 완주하는 과정을 그린다. 26살밖에 되지 않은 '셰릴'은 어머니를 잃고 방탕한 삶을 살았다. 그로 말미암아 자신을 아끼는 가족과 친구, 사회적 지위를 모두 박탈당했다. 인생의 모든 것을 잃고 끝없이 걷기로 마음먹은 셰릴은 내 배낭보다 몇 배는 무거운 배낭과 끝없는 길을 걷고 또 걷는다. 아 돌아가야 하는 건가? 스스로 되묻지만 이내 걷기로 한다. 그녀는 지금 돌아갈 곳이 없다.

셰릴 역시 쳇 베이커처럼 약물에 의존하는 삶을 살았다. 쳇 베이커가 무대에서의 부담감을 핑계로 마약을 곁에 두었다면,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 그리고 허탈감을 이유로 마약을 했다. 큰 주사기를 통해 발목에서부터 헤로인을 주입되는 장면은 마치 지옥으로 향하는 통로처럼 보인다. 내가 쳇 베이커의 이야기를 읽으며 상상했던 그 장면들이(쳇 베이커는 자신의 연인들에게 마약을 주입하며 타락의 길로 이끌었다.) 엉뚱하게도 2014년의 영화 <와일드>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영화 와일드 Wild, 2014

셰릴은 인생의 재출발이 걷는 행위를 통해 가능하다고 믿는다. 내 생각에 그리 큰 효과는 없다고 생각되었지만, 그녀는 이 걷는 과정을 통해 혼자 생각할 시간을 마련하고 싶었으리라. 그녀는 음악도 없이 오로지 과거 회상에 의존하며 여행의 지루함을 달랜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동력 삼아, 과거의 악행에 대한 후회를 추동삼아 자신을 달랜다. 그녀는 여행길의 구간마다 시대의 대문호들이 남긴 글귀들을 적어놓곤 하는데, 매일 밤 꺼내 읽는 문학을 통해 작은 도움을 받고 있는 게 느껴져서 반가웠다. 음악을 들을 수 없으니 아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불이 없으니 손전등에 의지해 문장을 집어먹는다. 그것은 무척 맛있는 만찬으로 보였다. 문학과 음악을 향한 애틋함이 화면 가득 번졌다.

구간마다 낯선 마을에 들려 샌드위치와 음료를 마시고, 따듯한 동네 거리를 걸어 다니며 여유를 즐기는 모습에서 걷는 행위가 줄 수 있는 즐거움에 대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걷고 또 걸어서 결국 그 어느 지점에 도착하겠지만, 정작 그녀가 다시 힘을 내는 지점은 여행을 떠나기 전 가방을 꾸리던 그 순간이 아닐까. 또 다른 걷기를 준비하며 평온한 오후에 한 발 힘을 내는 그 지점이 이 영화와 내가 공유한 유사 행복의 고지라고 생각했다. 아 오늘도 이 도시의 숲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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