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 Ida 2013
여럿을 적 어머니의 두부 심부름은 내게 즐거운 것이었다. 슈퍼마켓을 들렀다 문방구 앞 오락기로 백 원짜리 게임을 하곤 했다. 한 시간은 넉넉히 개길 수 있는 게임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에서도 ‘1945’라는 슈팅게임은 단연 내 주종목이었다. 이 게임의 목표는 생존이다. 전투기 조종사를 주인공으로 하여 적에 수많은 폭탄을 투하한다. 난이도가 어려워지면, 극한의 상황에서 전투기 한대로 버텨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유독 잘했던 캐릭터는 금발의 여성 캐릭터였다. 날렵한 기체처럼 늘씬한 몸매의 그녀는 영웅이 되어 적진을 휘저었다. 근데 왜 게임 이름이 1945지? 늘 궁금했던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고등학교 때 역사수업을 통해 1945년이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내가 기를 쓰고 조종한 전투기들이 전쟁에 참가한 국가들의 것이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연합군인지, 나치스인지 어느 쪽이었을까. 생존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이런 기억도 있다. 독일 축구의 대표적인 스트라이커 '루카스 포돌스키'가 폴란드와의 유로 챔피언쉽에서 두 골을 넣고도 고개를 푹 숙이던 모습. 폴란드 태생의 이 청년은 실제 폴란드 국적을 가지고 있고, 고향의 친척도 모두 폴란드인이다. 하지만 그는 성공을 위해 독일 국적을 택했다. 그가 프로 축구 선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명목에 맞지 않는 골을 넣었을 때 결코 하늘을 보지 못한다. 반독 감정에 휩싸여 있는 폴란드 국민들의 망연자실한 표정 앞에서 어두운 낯빛을 숨길뿐이다.
이 두 가지 기억이 연결되는 고리는 물론 전쟁과 오락이다. 전쟁의 스펙터클은 예술이 공유하는 오락의 산물이고, 전쟁 이후의 삶은 모두 아시다시피 문학과 영화가 천착하는 대지다. 한국 문학과 영화의 주 소재가 6.25,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동네 앞 오락기에도, 즐겨 보는 유럽 축구 선수들의 과거에도 아픔의 드라마는 지속적으로 생산된다. 그리고 난 오늘 본 내 생의 첫 폴란드 영화 <이다>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한다.
폴란드의 아픈 역사는 2차 세계대전을 떠올리지 않고는 설명이 어렵다. 1939년 독일의 히틀러가 영토 확장을 목표로 폴란드를 점령한 이래 수많은 유대인들은 무던히 죽어나갔다. 아우슈비츠의 아픔이 가시기도 전 발발한 2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더 이상 신을 찾을 수 없는 순간까지 다다른 곳이 폴란드라는 지옥이다. 전쟁 이후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고국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폴란드는 새로운 공산당이 집권하여 냉랭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역사가 남긴 의구심에 폴란드인들은 정치적으로 갈피를 못 잡았다. 그리고 어김없이 시작된 피의 숙청, 죄의식 복구를 위해 투입된 공권력이 등장한다. 공산당은 자국의 안정을 위해 전쟁의 연루자들을 잡아들인다. 스탈린의 죽음과 소련의 해체 등 폴란드는 외부세계의 변화에 호응하며 빠른 속도로 안정이라는 지상 과제를 향해 나아간다.
전쟁을 통해 태어난 이민자들의 나라답게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피 냄새가 가실 줄 모른다. 국민들은 봉기와 궐기의 연속으로 공산당의 몰락을 주장한다. 정부에 대한 반감이 끝까지 차오르자, 폴란드 정부는 마침내 반유대 정책을 통해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려 시도하기 시작한다. 유대인과 게르만인의 어색한 동거가 이어지던 중, 전후 세대의 기득권 확보에 위기를 느끼던 폴란드인들은 다시 유대인 학살에 참여한다. 더러운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유대인들은 그들이 품을 수 있는 안정된 과제가 아니었을까. 독일이 저지른 실수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이 역사의 수레바퀴에 2000년의 한 축구 선수도,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던 나도 같이 굴러가고 있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영원회귀의 순간이 아닌가.
폴란드 영화 <이다>는 1962년 폴란드의 한 유대인 소녀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되짚으려 한다. 비극이 오기 전 냉랭한 공기의 폴란드를 느껴볼 수 있는 작품이다. 1962년 폴란드는 서구 문화의 유입으로 강요된 활기를 만들어낸다. 시대의 공기를 덮기 쉬운 가장 큰 도구는 향락이다. 뒤돌아보면 눈에 선한 시체들을 잊고, 도시의 중산층은 사치와 향락의 영역에서 비극은 지나갔다며 콧노래를 부른다. 그 이면 폴란드의 작은 마을엔 아직 전쟁의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목가적인 풍경 안에서 수녀복을 입고 열심히 가톨릭 성전을 읽는 안나가 보인다. 서원식을 앞둔 18살 소녀 안나는 선임 수녀로부터 유일한 핏줄인 이모 완다를 만나고 오라는 제안을 받는다.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수락한 안나는 이모 완다를 만나기 위해 도시로 떠난다.
안나는 이모 완다를 만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된다. 자신이 '이다'라는 이름의 유대인이라는 것, 부모가 전쟁 중 동족인 폴란드인에게 살해 당해 시신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 부모의 시신을 찾아 떠나려는 이다에게 완다는 묻는다. '내가 누군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니?' '그러다 신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하지?' 이 두 가지 물음은 영화가 지향하는 바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이 참혹한 역사를 모두 알고도 신 타령이나 하며 살 수 있겠냐는 물음이 첫 번째이고, 결국 자신을 알지 못하고서 삶에 구원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마지막이다.
완다가 이다에게 되물었 듯, 그녀는 알고 나면 꽤 소름 끼치는 여자다. 음주운전을 하고도 면책특권을 들이대는 공산당의 영웅이며, 전쟁 직후 공산당의 관련자 숙청이 있던 시절에 활동했던 검사 출신의 엘리트이다. 또한 아들을 두고 전쟁에 참여할 정도로 극성의 민족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여장부다. 그녀를 완력으로 위협하려는 남자들 앞에서 술로 기세를 꺾고, 섹시한 웃음으로 응수하는 장면들이 묘한 쾌감을 안겨준다. 그녀가 이렇게 극성적인 민족주의자가 된 것은 아들이 전쟁 중에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무지한 군중에 의해, 전쟁의 여파가 남긴 흔적에 의해. 그녀는 이제 꺾일 대로 꺾인 지나간 세대의 유산이 되었다. 염세적인 표정의 완다는 담배를 꼬나물고, 빨간 드레스를 펄럭이며 이다를 바라본다. 그리고 묻는다. 이 세상은 성역 건너편에 또 다른 세계가 창궐하고 있어.
팝과 재즈가 수녀복을 입은 이다 앞에서 울려 퍼진다. 쳇 베이커를 떠올리게 하는 색소폰을 부는 잘생긴 청년과 1960년대 재즈의 상징 존 콜트레인의 연주곡도 들린다. 존 콜트레인은 59년 Giant Steps 앨범으로 속도감 있는 연주가 이다의 무표정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1962년 영화의 배경이 된 이 시간의 음악은 전후 세대의 상처를 치유하는 중요한 기능을 했다. 정적인 폴란드에 울려 퍼지는 재즈의 선율은 이다가 맞닿드린 낯선 세상이고, 완다가 쌓아 올린 폴란드의 현재다. 마치 원색의 포장지처럼 모든 것이 풍요로운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 존 콜트레인의 음악은 썩 잘 어울린다. 속 썩은 악취를 잊으려는 듯 머리를 흔들고 다리를 떤다.
새로운 세상을 접하는 시간도 잠시, 이다는 결국 부모의 유골과 마주하게 된다.이다의 부모와 완다의 어린 아들을 살해했던 피의자는 이제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이다. 범인의 아들은 자기가 팠던 땅을 다시 파내곤 주저앉고 만다. 무덤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살인을 고백하는 폴란드인과 그런 그를 바라보며 부모의 뼈를 추스르는 유대인 수녀 '이다'가 상징처럼 배치된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뒷모습만 남기고 사라진다. 땅 속의 남자는 고개를 들 줄 모른다. 죄의식과 참회가 이리도 가볍게 느껴질 수 있는가.
영화 <이다>는 처음부터 폴란드의 회복을 말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아무도 없는 길을 걸어가는 이다의 얼굴을 비추는 영화다. 지나간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겠다며 설치지 않는다. 공산당의 칼을 자행했던 완다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완다의 손에 묻은 피는 과연 폴란드인 가진 죄의식과 먼 것일까. 속세의 살을 만져본 이다는 다시 수녀로서의 삶에 만족할까. 땅을 파내 과거를 지우려 했던 폴란드인은 이 땅에서 잘 살 수 있을까. 영화는 질문만 가득한 시험지를 던지고는 툭하고 끝이 난다.
흑백과 1.33:1의 프레임은 확실한 형식적 의도를 보인다. 좌우의 정보를 차단하고 상단을 비움으로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입을 다문 이다의 무표정을 강조한다. 마치 외양간 창문의 색유리처럼 이질적이고 낯선 형식이지만, 거리낌 없이 시야의 단방향을 향해 나아간다.이다가 보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녀의 시선만 따라가면 그만이다. 무지의 인간은 좌우를 살필 여력이 없다. 영화의 마지막은 기이하다. 자세히 말할 순 없다. 이모의 드레스, 술과 담배, 잘생긴 청년, 재즈와 섹스라는 속된 세상과 다시 수녀복의 입고 기도문을 외우는 18살 소녀가 대위되는 모습을 기억한다.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걸어가는 소녀의 표정 만으로는 어떤 것도 추측할 수 없다. 그저 개인적인 바람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