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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14. 2018

고통받는 동물이 웃음을 발명했다

기타노 다케시 <생각 노트>, 김기덕 <아리랑>

기타노 다케시의 얼굴


기타노 다케시의 미소를 아는가? 어찌 보면 약간 꼰대 같고, 약간은 우습게도 느껴지는 그의 얼굴을 좋아한다. 유머러스하면서도 흉포한 그의 영화들에서 난 비틀린 웃음을 짓는 그를 보며 짜릿함을 느낀다. 적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베 죽이면서도 정적 속에서 걸어가는 야쿠자의 뒷모습을 여러 번 돌려본 적도 있다. 난 그때마다 니체의 선언을 떠올린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는 동물이 웃음을 발명했다."

<생각노트>, 기타노 다케시 저

다케시의 시선은 총을 쏘는 자의 카타르시스를 벗어나, 그 총에 고꾸라진 인간의 뇌까린 얼굴에 드러난다. 패자와 루저들, 세상의 난잡함에 물들어 항변 한 번 못해보고 고꾸라진 시체들의 밤.

그보다 더 나를 사로잡는 건 다케시의 수필이다. 쉼 없이 독설을 늘어놓는 맹렬한 마루야마 겐지의 촌철살인도 좋지만,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기타노 다케시의 허술함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 빈틈없는 무표정이랄까. 공들여 쓴 흔적이 없는 문장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모든 글이 그러하듯이 한 사람의 수필에는 그 사람의 사상과 감성, 그 사람이 속한 문화를 여실히 드러낸다.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는 그를 들여다볼 수 있는 책상 위의 종이 쪼가리다. 이 책에 속한 소소한 단락을 읽다 보면 이런 문장을 하나 건져 올리게 된다. “가족이란 남들 안 볼 때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했다. 위악적인 농담 같지만, 진실에 가닿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의 거의 모든 갈등은 가족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하지 않나.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 대부분의 행복한 가정은 다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의 모습은 다 제각각이다.” 가족이 유발하는 수많은 갈등이 한 인간을 불행으로 몰아넣는다.


'발자크'와 '로맹 가리'의 어머니


프랑스의 대문호 발자크는 젊은 시절부터 문학으로 출세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 이유는 하루빨리 가족에게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16살 때부터 혼자서 글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조그만 경제적 여유를 얻기 위해 밖으로 돌았다. 무거운 빚은 진 상황에서도 그는 커피를 마냥 마시며 맹목적 집필을 반복했다. 매일 14시간의 자기 학대를 하면서도 결코 가족을 찾지 않았다. 그의 위대한 문학작품들은 거의 다 이 시기에 나왔다. 언젠가 윤여정 선생이 무르팍 도사에서 말한 것처럼, 경제적으로 궁핍할 때 예술가의 진가가 나오기도 한다.     

발자크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유년 시절의 기억에서 평생 자유롭지 못했다. 자기보다 서른두 살이나 많은 남자와 사랑 없는 결혼을 한 그의 어머니는 발자크가 태어나자마자 유모에게 맡기고 밖으로 돌았다. 겨우 여덟 살 때 기숙학교로 보내버리고, 그가 6년 만에 쇠약해진 심신으로 돌아올 때까지 찾지 않았다. 이러한 ‘불행한 기혼녀’와 그 여성이 지닌 냉정한 모성은 발자크 소설의 주요한 모티프가 된다.


비슷한 예로 로맹 가리(또 다른 이름 에밀 아자르)를 떠올릴 수 있다. 그의 자전적 소설 <새벽의 약속>엔 어머니에 대한 애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는 어머니의 수치를 모르는 천박함과 무례한 행동거지를 치욕으로 생각하며 살았지만, 그녀가 없었다면 자신이 작가가 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한 바 있다.

로맹 가리는 어머니의 기대대로 여러 직업을 가졌다. 전쟁 중에는 공군 조종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로맹 가리는 평소 어머니의 소원대로 세계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소설가가 되었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프랑스 외교관이 되었다. 심지어 생에 단 한 번만 수상이 가능한 공쿠르 상을 2회나(물론 한 번은 에밀 아자르라는 예명으로) 수상했다. 그는 저서를 통해 자신의 위대한 업적 뒤의 어둠을 말한다. 이 책의 제목 새벽의 약속은 어머니에 의해 일찌감치 자신의 운명이 정해진, 그녀에 의해 옭아매어진 자신의 삶을 의미한다. 평생 그녀의 기대대로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에 한 시름도 놓을 수 없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어머니는 고기 기름을 몰래 닦아 먹으면서도 아들의 점심식사에는 비프스테이크를 빠뜨리지 않을 정도로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어린 로맹 가리는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이혼한 상태에서 어렵게 살아온 어머니가 자신에게 거는 기대와 부담이 증폭되는 순간이다. 일종의 정언명령처럼 자신이 살아야 할 운명을 마주한 것이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아들에게 투사하며 생의 의미를 아들에게 내맡긴다. 그는 실패보다 실망한 어머니가 두려워 끊임없이 ‘그 다음’을 추구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레이먼드 카버'와 '피츠제럴드'의 연인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국 작가 ‘레이먼드 카버’는 이른 결혼으로 생애 내내 생활고에 시달렸다. 17살에 동네 처녀와 사랑에 빠졌고, 19살엔 벌써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그는 대부분의 작품을 단편으로 남겼는데, 그것이 빠르게 원고료를 받아내기 위해서였다고 생전에 밝힌 바 있다.(그의 두꺼운 평전을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인생의 곡절이 그의 소설보다 길고 가파르다.) 영미 문학계에서는 단편 문학이 장편보다 대우를 못 받는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른 결혼이 그의 작품 활동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물론 그가 단편소설에 매진하지 않았다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몇몇 단편들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대성당>,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 장편 소설로 쓰였다면 어땠을까.

카버는 어린 아내와 갓 태어난 자식들을 피해 자신의 늙은 포드 자동차에 앉아 글을 썼다. 그 큰 덩치를 차에 욱여넣고 곰처럼 웅크리고 차의 앞좌석에 앉아 문장을 토해내는 모습을 떠올려본다. 카버가 평생 술과 마약에 절어서 현실을 벗어나려고 노력했다는 걸 떠올려보면 더욱 애처롭다. 그는 결국 자식들을 외지로 떠나보내고, 아내와 이혼한 후에야 삶을 정상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좌측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의 젤다와 피츠제럴드, 우측은 실제 그들의 가족 사진

카버와 비슷한 사례로는 '스콧 피츠제럴드'를 떠올릴 수 있다. <위대한 개츠비>의 원 제목은 <웨스트 에그의 트리말키오다>다. 제목이 어렵다는 이유로 출판사에서 퇴짜를 놓아 제목이 바뀌었지만, 피츠제럴드는 이 제목을 끝까지 고집했었다. '웨스트 에그'는 개츠비가 거주하는 뉴욕의 외곽 지역이고 '트리말키오'는 로마시대 작가 페트로니우스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로 개츠비와 마찬가지로 벼락부자로 그려진다. 피츠제럴드는 책이 출간된 후에도 '웨스트 에그의 트리말키오'를 끝까지 고집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이 제목에는 개츠비의 문학적 야심이 곁들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지주 가문의 딸이자 매력적인 문학소녀였던 젤다를 사랑했지만, 평생 그녀와 처가에 인정을 받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부의 계급이 그를 짓눌렀다. 평생 글로 돈을 벌었지만, 단 한 번도 넉넉하지 못했던 개츠비는 늘 글에 쫓기는 신세였다. 지속적인 단편소설을 쓰고, 영화 각본과 희극에 까지 닥치는 대로 글을 썼다. 평생의 연인이었던 젤다의 사치와 허영심, 그녀 스스로의 열등감을 돈으로 만회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트리말키오라는 상징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투영했다. 무차별적인 돈을 향한 소유욕 속에서 '위대한' 빛줄기를 목격했다. 소설 속 개츠비가 데이지를 향한 맹목적 구애를 펼칠 때 난 잘 이해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멍청했지 위대한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츠비는 데이지가 자신이 어릴적 사랑한 순수한 결정체가 아님을 깨달은 이후에도 그녀를 포기하지 않는다. 멍청하고 속물이며 사치스러운데다 변덕스럽기까지한 인물이 데이지다. 그는 사랑을 지속하고 결국엔 진정한 연인을 품에 앉는 스스로를 사랑했다. 개츠비가 위대할 수 있었던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현실엔 사치와 향략 속의 연인 '젤다’가 있다. 난 피츠제럴드의 삶을 따라가면서 머리로 이해되지 못했던 개츠비의 사랑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의 서두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있다. “다시 젤다에게”


그리고 김기덕이 있다

김기덕 <아리랑>, 제64회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분 대상 수상작이다.

그는 한국 영화판에서 아웃사이더다. 정규 교육도 받은 적이 없고, 한국에서 제공하는 아카데미를 이수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맨 몸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렇게 그가 내놓은 데뷔작은 논쟁적인 작품 <악어>(1994)다. 국내에서 그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해외에서 김기덕의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어릴 적부터 가난에 찌든 생활을 했던 김기덕은 맨몸으로 떠난 유럽의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며 청년기를 보냈고, 한국에 와서는 고물상과 막일을 뛰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한국에서 화가로 성공하고 싶었지만, 학력도 없고 경력도 없는 그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 택한 직업이 카메라 한 대로 초저예산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어렵사리 모은 돈으로 단출한 스텝을 꾸리고 무명 배우들로 영화를 찍었다. 그리고 그는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시기와 맞물리며 한국의 대표적인 감독이 되었다. 비평적, 대중적 실패에도 특유의 다작 능력과 해외 수상의 노고를 인정받아 이뤄낸 결과였다.     

그 때문일까. 김기덕은 늘 울분과 불안, 열등감과 증오를 품고 산다. 제도권을 향해 늘 조소를 날리고, 가진 자에게 천박한 묘사를 서슴지 않는다. 한 때 김기덕은 후배 감독의 배신에 자신의 자의식을 과잉 투영한 <아리랑>을 만든 적이 있다. 후배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전적 영화를 찍었다. 카메라를 바라보며 울부짖는 1인 영화인 아리랑은 그의 실체를 목격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는 정제되지 않는 사람이다. 이성의 허술한 끈을 놓고, 야생에서 속죄양을 하는 신자처럼 보인다. 그 부족함, 밑바닥, 음습함은 예술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최근 그를 향한 성폭력 및 폭행에 증언들이 낯설지 않은 건, 그의 영화와 그 사적인 모습들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일그러진 여자를 향한 시선들, 남성을 오로지 욕망에 물든 강도처럼 묘사하는 폐쇄적 캐릭터. 그 모든 것이 부족한 그를 영화가 증언하고 있다. 지금 그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그가 연출한 영화의 부조리극과 같은 궤도 안에 있다.

   

예술가에게 비극은 문학적 동력이다. 거기에 반성적 성찰이라는 매개를 괄호 쳐 넣음으로써 소재를 더욱 풍성하게 덧칠한다. 현실의 성찰을 봉쇄되고 비극이 반복되면 예술은 찬사를 받는다. 수많은 작은 차이들이 개입해서 결국은 동일하거나 더 혹독한 예술작품들이 양산된다. 그 반복의 시도는 허무하지만, 그 고통의 신음 속에 그들의 삶의 조건들이 있다. 누군가에게 가족이란 태어나 보니 주어진 삶의 양태이기도 하고, 인생의 반려를 제 손으로 선택한 주체적 확립이기도 하다. 이성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 뭐가 뭔지 모르는 반이성적인 감정과 충돌하여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택한다. 마치 그 전에는 진정한 사랑이라는 건 없었다는 듯 평생의 짝을 마주하게 된다. 출산과 또 다른 가족의 구성, 그 과정에서 예술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걸작과 태작을 방만하게 오간다. 권태와 지옥도, 이 영겁회귀야 말로 예술가들이 천착하는 창작의 밑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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