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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16. 2018

혼자서 영화관을 찾은 당신에게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Leaving Las Vegas, 1995

첫사랑의 기억은 누구에게나 선명하다. 난 아직도 그 여름날의 아득함을 기억한다. 아버지는 말하셨다. “이건 보면 안 된다.” 동네 산책을 나가시며 내게 주의를 주셨다. “뭔데 보지 말라는 거야?” 우유를 한 컵 따라 마시고 컵을 휘 휑궈 개수대에 놓고는 얼른 소파에 앉아 테이프를 재생했다. 비디오 라벨에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라고 적혀 있었다. 단골 비디오 가게에서 빌린 영화였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난 아버지와 무수한 영화들을 섭렵했지만, 빨간색 영화는 처음이었다. 침을 꼴딱 넘어가고, 몸은 어쩐지 떨렸다. 창밖을 보니 밖에선 해가 지고 있었다. 놀이터의 아이들이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고집스레 놀이에 집중하던 아이들은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호통을 치는 어머니의 기에 눌려 고개를 푹 숙이고 급히 집으로 향한다.

니콜라스 케이지는 늘 일정 수준 이상의 연기를 하는 배우다. 그가 낮게 평가받는 건 아마도 수준 낮은 블록버스터를 연이어 출연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디오는 도대체 무슨 예고편이 그리도 많은지 빨리 감기를 눌러도 한참에야 본편에 접어들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검은색 자막들이 하나 둘 점멸한다. 이것마저도 시간이 안 가는 느낌이다. 이어 한결같이 느끼한 얼굴을 한 니콜라스 케이지가 술을 진탕 먹은 모습으로 운전을 한다. 그는 라스베가스의 거리에서 한 여자와 마주친다. “한잔할래요?” “음주운전은 불법 아닌가요?” “재미있네. 난 벤이에요.” “난 세라예요. S-E-R-A 세라” 세라는 그를 유심히 지켜본다. 잠시간 대화를 나누다, 나쁜 놈 같진 않아 보였는지 차에 오른다.


사실 난 이 영화의 첫 장면을 보는 순간 영화와 사랑에 빠졌다. 그런 것 같다. 그전까지는 단순한 놀이에 불과했던 주말의 명화가 이제는 사적인 영역으로 진입한 것이다. 이건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복잡한 사랑이다. ‘마이크 피기스’ 감독의 유일한 히트작인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는 '청불'이라는 딱지 이상으로 야하고 잔인한 영화다. 무엇보다 소재가 알코올 중독남과 매춘부의 사랑이었으니, 당시 내가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후 난 이 영화를 다시 볼 때까지 영화의 스토리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그들의 사랑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는 거, 몰입을 너무 심하게 해서 아버지가 들어오셔서 내 목덜미를 잡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기억이 있다.

첫 등장부터 섹시했던 세라의 등장, 배우 이름은 엘리자베스 슈

이후 비디오로 보던 영화는 컴퓨터 랜선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즈음 MP3의 보급과 함께 영화 역시 패킷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바다에 떠다니는 영화들을 P2P로 낚아서 보는 게 내 어린 시절 가장 큰 취미였다. 밤새도록 켜놓은 컴퓨터로 세계의 영화들을 다운로드한 후, 방과 후에 라면을 먹으며 보았다. 맞벌이하는 부모님과 밖으로 도는 형은 내 외로움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기운 가세, 느닷없는 이사로 얼마 없던 친구들도 멀어져 갔다. 내향적인 성격을 가진 나는 영화를 벗 삼아 사춘기를 버텼다고 생각한다. 중 2병이 중이염보다 무서운 건 치료제가 없다는 건데, 난 큰 방황 없이 영화에게 속풀이를 한 셈이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

이쯤에 책과도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한 곳이 학교 도서실이었으니까. 방과 후에 갈 곳이 없을 때 가장 들르기 좋은 곳이 학교 도서실이었다. 당시 사서 선생님은 늘 20대 아가씨였고, 난 부끄러워 말도 잘 못 걸면서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세계문학전집에서 두꺼운 책을 척하니 빼곤 했다. 그때 사귄 친구들이 '홀든 콜필드', '그뤠잇 개츠비', '안나 카레니나'(첫 챕터만 읽어서 안면만 익혔다.), '허클베리 핀',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 같은 녀석들이었다. 결국 외로움과 혼자라는 느낌은 내게 인생에 있어 없어선 안될 동반자를 선물해준 셈이다. 내게 고독과 정적은 편안한 쉼터다. 가끔 아름다운 그녀와의 이별로 낭떠러지에 몰려 박애주의자가 되기도 하지만, 거의 모든 생에의 내 삶의 조건은 고요함이었다. 그걸 인정하는 게 힘든 때도 있었지만, 이제 서른이 넘은 난 나 자신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콰이어트, 수전 케인 저


수전 케인이라는 사람을 아는가? 모르시면 유튜브에서 TED 강연을 검색해보면 잘 알 수 있다. 난 그녀를 책으로 먼저 알았다. '김영하' 작가의 추천 도서 리스트에서 발견한 수전 케인의 <콰이어트>(원제 : Quiet : the power of introverts in a world that can't stop talking)의 표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 이 책은 늘 조용했던 내향적인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좀 낼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책이다. 세상은 늘 시끄럽고 이 곳에서 늘 주도권을 가져가는 건 외향적 인간들이다. 세상엔 외향적, 내향적 사람들이 섞여 사는데 내향적 사람들의 입장에 대해 설명한 책이 없었다는 게 수전 케인의 의견이다. 그녀가 말하는 내향적 인간의 입장, 장점, 삶의 계획들은 내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수전 케인의 콰이어트

조용한 사람들은 조직에서 살아남기 쉽지 않다. 이 책을 읽어보면 비단 그건 한국에서 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오늘 저녁 회식이라고 하면 한숨부터 쉬고, 우선 표정이 일그러진다. 세상은 처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사람이 본능적으로 무언가 싫으면 우선 표정관리가 안된다. 술자리 내내 혼자서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있었는데, 막상 집에 오면 감정 소모로 인한 피로가 배가 된다. 이건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교육 자체가 목소리 크고, 활달한 친구들에게 전인이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교육 자체의 방향이 리더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많던 대통령 지망생들은 다 어디 간 거냐?) 구석에 앉아서 조용히 다른 이들을 관조하는 친구들은 눈을 조용히 책장으로 돌린다. 왜냐하면 그들이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따라가면 그만인 삶에 익숙해진다.


저자 수전 케인도 그런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에도 다 소리 지르며 분위기를 낼 때, 구석에서 책을 펴 드는 그런 애였다. 옆에서 누가 왜 분위기를 깨냐고 힐난하듯 물으면, 그제야 책을 가방에 넣는 소녀였다. 그녀가 학위를 마치고 변호사가 된 이후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늘 고객과 상대하고, 상대측 변호인과 다툼을 벌이는 게 연속인 변호사는 수전과 맞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퇴근 후의 책 한 권과 편안한 소파였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중 연설가 중 하나가 ‘대일 카네기’다. 그는 사회관계 및 말하기를 집중적으로 강조한다. 핵심은 자신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인 것이다. 그는 노골적으로 인격이 아닌 보이는 것에 포커스를 둔 연설가였다. 이 물질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남이 나를 판단하는 것이 모든 가치판단의 우위에 있다 보니, 더 많이 나서는 쪽이 많은 이득을 가져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수전 케인은 이런 외향적 인간을 위한 사회에 제동을 건다. 외향성이라는 허울이 사회적으로 높게 평가받는 건 다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는 사례를 수치적 논증으로 분석하여 내향적 인간들의 장점에 대해 말한다. 이건 덮어놓고 내향적인 게 최고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향성과 내향성이 공존하는 삶에 대한 가이드다.


난 이 책을 읽으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왜냐하면 처음 조직생활을 하며 느낀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그녀에게 적용되어 감정이입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난 10년의 조직생활을 특유의 인내심으로 잘 적응한 편이다. 하지만 사회는 여전히 내향적 인간에겐 혹독하다. 내향성 인간은 사회, 타인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난초처럼 민감한 촉매를 가진 사람이다. 이는 연애와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내향적 남자와 외향적 여자가 만나면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 여자는 휴일만 오면 밖에서 친구들과 만나서 왁자지껄 떠들고 싶어 한다. 술도 한 잔 하고, 남들과 춤도 추며 스트레스를 풀고 싶다. 그녀는 그와의 사랑을 타인들 속에서 인정받길 원한다. 하지만 주 내내 타인들과 섞여 살았던 내향적 남자는 모처럼 휴일에 여자와 단 둘이 오붓한 시간을 갖고 싶다. 그렇다면 쉽게 파열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 자주 벌어지는 이유는 남녀가 실제 자기에게 없는 것에 끌리기 때문이다. 나에게 없는 내향적 성향의 취미나 행동을 보고 반했는데, 막상 사귀고 보면 내 맘 같지 않은 모습에 지루함을 느낀다. 남자는 그녀의 밝고 활달한 모습에 반했는데, 막상 실제 사귀고 보면 둘이 있는 상황을 지겨워하는 그녀를 보고 당황하게 된다.

테드 강연 당시의 수전 케인의 모습. 실제보니 말도 잘하고 게다가 미인이다.

이는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사랑이라는 게 절충점을 찾는 것일 테니까. 누군가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홍상수의 지리멸렬한 세상을 동경한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니 세상은 즐겁고 신기한 것이다. 이쯤에서 다시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 영화에서 벤은 내향적 인간의 전형이다. 그는 알코올 중독과 이혼과 같은 중대한 문제를 겪었지만, 끝내 그걸 밖으로 내뱉지 않는 사람이다. 이건 그가 알코올 중독이 된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삶이 그를 속였고 그는 끝내 무너지는걸 두려워 않는다.(난 그를 보며 작가 레이먼드 카버를 떠올렸다.) 이때 그의 앞에 나타난 세라는 외향적 인간에 가깝다. 당당하고 자존심이 강하며, 자신이 확신을 가지면 일단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다. 세라는 벤을 이해할 수 없다. 사실 그녀는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이 무엇 때문인지 알지 못한다. 감독도 모르는 것 같고, 시나리오도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서로가 다른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우선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저런 인간도 있네. 나랑 완전히 다르고, 이해할 수 없음에도 그냥 곁에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다름을 계속해서 듣는다. 벤은 그녀에게 그냥 떠나지만 말라고 부탁한다. 세라는 그의 곁에 서서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준다. 난 잘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이 영화를 보며 왜 영화라는 매체와 사랑에 빠졌는지 추측할 수 있다. 그건 그 지켜봄의 자세가 내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맞지 않고 지루하더라도 지켜보며 인정해 버리는 것. 믿기지 않더라도 조금 시간을 가지고 두고 보는 자세. 그것이 <라스베가스를 떠나며>가 전혀 의도하지 않게 나를 사로잡은 이유다.

수중 음주신과 키스신을 동시에 연출하는 마이크 피기스!

두 달 정도 사귄 여자 친구와 헤어졌을 때를 기억한다. 혼자서 확 달아올랐다가 난데없는 이별 통보에 맘고생을 심하게 했다. 난 내 내향적 성격이 이때서야 힘을 발휘하겠구나 했다. "책과 영화로 이 모든 아픔을 치유할 거야!" 하지만 상황은 악화일로로 흘러갔다.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 하던 운동을 할 기력을 잃어버렸다. 난데없는 우울과 맘고생이 살을 쪽 빠지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내향적인 척하는 외향적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 글 쓰는 모습을 사랑해주는 사람이었다. 늘 밝고 당당하며 사람과의 만남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이런 그녀가 조용하고 정적인 나와 만났으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루하고 답답했을 것이다. 난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도 즐거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건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가한 폭력이었다. 그녀를 더 잘 관찰하지 못했고, 그녀에게 맞는 연애를 선물하지 못했다. 그저 사랑한다는 말만 되풀이했을 뿐, 내 몸짓은 노력 없이 수그러졌다. 어쩌면 내 사랑은 글을 쓰는 내 내향적 성향이 발화점이었지만, 결국 그 성향이 이별의 진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수전 케인이 정의한 내향적 인간이라는 테두리는 굳이 의식할 것 없는 하나의 개념에 불과하다. 내가 이 책에서 건져 올린 그녀의 메시지는 조금 다르다. 스스로 내향적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변화는 요원하다는 것. 자신의 성향을 스스로 사랑하되,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렇게 되면 외향적 인간들이 만든 사회가 우리에게 가하는 폭력을 되풀이하는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 조용한 밤 책을 읽으며 잠이 들고 싶다.


내가 유독 이 영화의 OST를 좋아한다. 아마도 스팅 형님의 목소리 덕분이겠지.


<My one and only Love> -  Sting

https://youtu.be/GmFNhefC7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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