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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17. 2018

아날로그를 의식하는 시간

프랑스 여자는 늙지 않는다, 미레유 길리아노 저

난 깨어있는 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두드리며 세상과 터치한다. 와이파이 신호가 잡히는 곳을 찾아 둥지를 틀고 네트워크를 벗 삼아 침잠한다. 카톡 메시지 수신 소리에 아침잠에서 깨고, 멜론이 만들어내는 음악으로 하루의 기분을 결정한다. 잠이 들기 전에 응시하는 환한 스마트폰 화면이 꿈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이런 상태를 원하지 않았는데 결국엔 이런 상태로 살고 있다. 이제는 희미해진 그녀가 그리울 때도 회상보다는, 아이 클라우드에 새겨진 흔적을 찾아본다. 나는 인터넷과 멀어지는 특정 순간으로 진입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샤워를 하러 옷을 벗고 들어가는 순간 난 인식한다. 쏟아지는 물줄기가 내 몸에 덕지덕지 붙은 연계성을 끊어내겠구나.     

내 몰스킨 노트, 낡고 바랬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난 귀에 이어폰을 꼽고 시리가 선곡해주는 음악을 듣고 있다.  내 취향에 맞춰 음악을 선곡해주는 시리라는 녀석을 난 신뢰 한다. 기특하게도 내 취향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후 그와 비슷한 곡들을 지속적으로 제시한다. 내가 싫다고 하면 또 그새 알아차리곤 그와 비슷한 음악은 제외한다. 누군가는 이것을 빅 데이터라고 말할 테지만, 나는 시리의 사려 깊음이라고 생각한다. 외로운 날 위로해주는 목소리가 좋은 그녀.      

지금 이 세상은 터치를 위한 터치의 접점인 것 같은 느낌이다. 한 번의 터치에 반응하는 스마트폰 화면을 보게 되고, 미처 그 의미를 모두 파악하기 전에 가능한 터치의 영역들이 화면에 제시된다. 그럼 본능적으로 다음 터치를 향해 간다. 그 터치와 반응의 연쇄작용에서 건져 올린 게 뭔지는 잘 모른다. 이 속도전에서 잠시 멈춰 설 여유란 없는 걸까. 아니 그럴 필요도 못 느끼는 걸까. 난 아이폰을 문지르다 문득 잠시 멈추고 싶어 졌다.     


몰스킨과 페이퍼백


최근 많은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아날로그를 삶 안에 틈입시키고 있다. 몰스킨 노트를 사서 모나미 펜으로 뭔가를 끄적거린다. 통 안 가던 서점에 가서 페이퍼백 책을 사고, 근처 카페에 앉아서 창 밖에 본다. 책의 표지를 만져보고 감격한 적 있는가. 뽀드득한 소리와 책장을 손으로 쓸어 넘기는 감촉이 너무 오랜만이라 애틋해진 적이 있을까. 작은 페이퍼백을 들고 동네를 산책하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디지털에 비해 아날로그는 투자해야 하는 시간과 비용, 노력이 훨씬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체 자체가 존재의 이유다. 발에 닿는 노면의 거친 숨결을 느낄 때는 완전한 기분을 만끽한다. 얼마 전 근처 마트에 들어가서 자동 사진 인화기로 내가 아끼는 사진을 인쇄했다. 액자를 하나 사서 식탁 앞에 놓았다. 몇 번의 터치면 아이폰에서 웃고 있을 그 사진을 볼 수 있음에도 액자는 특별하다. 사진 속 웃고 있는 그가 아침잠을 설치고 일어나는 나를 반긴다.

늘 뭔가를 읽고 적는 그들. 장소는 les gourmands saint sernin

아날로그는 경험의 확장에 기여한다. 무언가를 만지고 내 몸과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 가지는 실체성이랄까. 아날로그는 시간이 축척한 흔적, 누군가의 손 때가 묻은 역사를 떠올릴 필요가 없다. 오로지 남들과 차별성을 두고 싶어 불편함을 택하는 것이 아니다. 난 디지털로 과정을 축약하는 걸 늘 우월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 단축으로 사라진 내 먼지 묻은 즐거움을 털어내는 걸 잊은 지 오래다. 아날로그는 과정의 경험을 즐기는 문화다. 효율이라는 허울 뒤 장막 속에서 펜을 들고 무언가를 그리는 친구다.

얼마 전 수업을 듣는 데 같은 반 친구가 ‘프랑스 여자는 왜 살이 잘 찌지 않는가’에 관한 기사를 보여줬다. 그 친구가 프랑스 남자였기 때문에 내가 되물어 보니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프랑스는 통계적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섹스를 하는 나라다. 섹스가 비만을 막는 게 아닐까라는 다소 장난스러운 대답을 했다. 역시 남자 놈들이란 하는 생각들이 다 비슷하다.


프랑스적 삶


한국에 이런 프랑스 여성들에 관한 <프랑스 여자는 늙지 않는다>라는 책이 출간된 적이 있다. 검색해보니 이 제목은 개정판이고, 원 제목은 <프랑스 여자는 살찌지 않는다>이다. 이 책은 실제 다이어트 실용서에 가깝고, 무수한 이들이 프랑스 여인들이 아름다운가(특히 유독 살이 찐 사람이 없을까)에 대해 궁금해한다는 사실을 저자는 잘 알고 있다.

살이 찐다는 것과 ‘늙음’은 차이가 있다. 살은 오로지 육체적 비대함을 뜻하지만, 늙는다는 것은 정신적인 것을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원제가 French Women Don't Get Facelifts이다. 그들은 노화에 대응하기 위한 시술을 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늙는 것을 더 선호한다. 실제 프랑스에서 8달 정도 살아보면서 수많은 프랑스(에 사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식사할 때 케이크를 비롯한 디저트를 빼놓지 않고 먹고, 아침이면 크로와상 냄새를 풍기며 나타난다. 그런 모습들을 보다 보면 식습관에서 뭔가 놀라울 건 없었다. 그들이 왜 아름다울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지방량으로 논하는 건 무리가 있다.

책을 들고 걸어가는 여성, 영화 다가오는 것들의 이자벨 위페르

내가 주목한 지점은 그들이 덜 물질적(정신적)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여성들은 대부분 큼지막한 백팩과 손가방을 들고 다닌다. 괴나리봇짐을 맨 것처럼 간편한 짐과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닌다. 가방 안에는 페이퍼백 책이 있다. 그들은 틈만 나면 책을 펴서 읽는다. 어디서든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펼 수 있도록 최적화된 옷차림새다. 그 수많은 카페들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한 마디 보탤 수 있다. 프랑스 에스프레소 값은 한국보다 훨씬 싸면서도 카페 크기는 비좁기 그지없다. 하지만 날씨가 조금이라도 좋으면 카페 앞의 수많은 야외석을 펼친다. 수많은 이들이 햇빛을 앞에 두고 걸터앉아 에스프레소 한잔을 시키고 독서를 한다. 난 늘 카페에 앉아 그들의 평온함을 목격한다.

프랑스인들은 승용차와 대중교통보다, 걷고 자전거를 선호한다. 프랑스 여자들에게 걷기는 삶의 일부분이다. 정말 어디든 걸어 다닌다. 충분히 걷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계단을 걸어 오르내리기를 해서라도 어떻게든 더 걸으려고 한다. 일부러 하이킹을 떠나거나 러닝머신 위에서 죽어라 달리지 않아도 된다. 일상생활에 녹아든 것만큼 좋은 운동은 없다. 유럽의 도시들은 한국과 다르게 작다. 걷다 좀 쉬다 또 걸으면 두 시간에 안에 다 밟히는 규모다. 도시 곳곳에 공원과 대성당이 있고, 늘 어디서든 앉을 수 있도록 카페와 벤치가 늘어져 있다. 산책과 걷는 행위를 소중히 하는 그들을 느낄 수 있다. 옷이 구겨지거나 땀에 젖는 것도 상관없이 걷다가 더우면 가방에 옷들을 쑤셔 넣거나 허리에 묶고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화창한 날은 마치 산책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개와 쫄쫄이 팬츠는 그들의 친구다. 실제 파리에 가보면 수많은 명품 브랜드샵의 구매자들은 거의 다 외국인들이고, 동네를 거니는 프랑스인들의 옷차림은 허름하고 수수하다.

프랑스 칸느를 배경으로 한 홍상수 감독의 <클레어의 카메라>

프랑스 여인들의 화장은 연하고, 운동화는 낡고 더럽다. 근데 그것이 안 좋게 보이기는커녕 그들의 활동성과 수수한 차림에 호감을 품게 한다. 작은 페이퍼백을 옆구리에 끼고 들어와서는 쉼 없이 대화를 한다. 그들은 와인을 즐기는데 유리잔 외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맥주를 많이 마셔도 맥주에 달려 나오는 심심풀이 땅콩이 없다. 우리에겐 치맥과 소주 삼겹살이 마치 세트처럼 구성되지만, 이들은 술 자체만 즐긴다. 오히려 술은 상대와 대화를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와인 한 잔 따라놓고 대화를 지속한다. 내게 프랑스적 삶은 아날로그가 뭍은 크림빵이다. 그들에게 스마트 폰은 중요하지만, 정보의 검색 용도로 유용할 뿐이다. 킨들 이북을 읽지만, 가방 안에 책을 꼭 가지고 다닌다. 노트북으로 보고서를 써도 몰스킨 노트가 옆에 놓여있다. 큰 백팩은 비어있지만, 저녁이면 근사한 식사를 위해 과일과 와인을 채우고 집으로 간다. 꾸민 듯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 속에 있는 프랑스인들을 지켜보는 건 큰 즐거움이다.


쯤에서 난 홍상수의 영화를 왜 프랑스인들이 좋아하는지 혹은 기시감을 가지고 보는지 이해한다. 책을 읽고 술을 많이 마시고 늘 걸어 다니며 자기 동네에서 벗어나지 않는 허름한 홍상수식 남자들은 프랑스에서 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프랑스의 어느 카페를 가도 홍상수의 영화에서 봄직한 그들을 목격할 수 있다. 홍상수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한 적도 있고, 요즘에도 자주 등장하는 이자벨 위페르의 영화 중 <다가오는 날들>이라는 영화가 있다. 내가 유독 좋아하는 장면은 그녀가 책 한 권을 들고 넓은 들판을 홀로 걸어가는 장면이다. 그녀는 사회와 가족, 아끼던 제자와도 멀어졌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다가오는 것들보다 멀어지는 것들이 더 많아진다. 그것이 이 영화의 원 제목이기도 한 '미래'(L’avenir)가 가진 숙명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책과 발바닥을 믿고 걸어간다. 흐릿한 햇살이 삶의 충만함을 결코 속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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