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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22. 2018

이십억 광년의 고독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마루야마 겐지 저

'마루야마 겐지'가 스스로 고립되는 이유


내가 사는 아파트 옆 동에 ‘마루야마 겐지'(마형이라고 해두자)라는 형이 살고 있다. 그렇다 물론 이건 턱도 없는 가정이다. 우리 마형은 산속에서 혼자 산다. 뭐 그렇다고 치자는 거다. 그는 무수한 걸작 소설을 집필했고, 난 그의 수필들을 모조리 읽었다. <소설가의 각오>는 늘 좋은 산문집을 떠올릴 때 꼽아 드는 책이다. 하지만 그가 정종 한 병을 들고 나를 초대한다고 해도 나는 거절할 것이다. 냉장고에서 평소 마시던 보르도 와인을 들고 그의 집 앞까지 갈 순 있겠지만, 난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의 소설을 읽는 것과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엄연히 다른 일이다. 그가 종로의 한 서점에서 북콘서트를 한다면 돈 주고 가서 볼 용의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양한다. 마형은 글을 잘 쓰지만, 좋은 대화 상대는 아니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마루야마 겐지 저

그의 소설은 철학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과 등진 소로의 '월든'처럼 초월적인 얘기는 아니다. 지극히 현실적이라 정신이 확 든다. 마형은 늘 단정적으로 세상을 논하지만, 모르는 건 말하지 않는다. 세상을 향한 일갈과 강력한 통찰은 묽은 일상에 삼투압을 만들어낸다. 그는 나를 향해 호통칠 것이다. 인생은 제멋대로 살아 마땅한 것이다! 물론 그의 호통이 두려워 그를 피하는 건 아니다.(아닐까.) 난 단독자의 삶을 존중한다. 그는 스스로 고립되길 자처하고, 그가 만든 정적의 오후를 침범하고 싶지 않다.

하루키, 미시마 유키오,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일본 전통 사소설의 전통을 가진 작가들과는 다른 류의 고독이다. 그들은 고독을 자양분 멜랑콜리한 기분에 사로잡힌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면, 마루야마 겐지는 데카당스를 꿈꾸는 과격분자의 고민이다. 마형은 하루키의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평범에 미달하는 남자가 미녀에게 둘러싸여 늘 사랑을 받더군.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꿈이다. 작가의 콤플렉스지. 읽는 독자도 마찬가지고.”
“무릇 소설가란 이름의 인종은, 학교 선생이나 중처럼 끊임없이 인간과 사회를 테마로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에만 온 신경을 집중시킬 수 있는 홀가분함 덕분에, 즉 무절제한 사고에 브레이크를 걸 실질적인 체험이 뒷받침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중요한 테마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나머지 전혀 실태를 모르는 구석이 있다. 특히 오랜 세월 작가 생활을 하거나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예술가라고 믿는 자들 중에 많은 것 같다.”

마루야마 겐지는 예술보다 노동의 가치를 더 우선시한다. 국가와 가정, 사랑 따위들은 모두 넘어서야 하는 적이다. 오히려 고독과 고통, 광기와 반항처럼 인간의 음습한 구석에 일견 더 많은 가치를 둔다. 홀로 고민하지 않은 자에게 인생의 유의미한 대답이 보일 리 없다면서 산 구석에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하며 사는 게 '마루야마 겐지'의 스타일이다.

작가 마루야마 겐지

마형 역시 청춘들에게 잔소리하는 책 한 권을 출판한 적이 있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이게 책 제목이다. 이 무자비한 책에서 단독자 '마루야마 겐지'가 강조하는 첫 번째는 우선 집을 나가라는 것이다. 부모라는 작자들은 무시하고 우선 나가서 돈을 벌어 자립해야 한다고 한다. 부모에게 피 빨려 사는 인생이란 어차피 뻔한 인생이라나. 최대한 빨리 혼자 살라고 한다. 뭐 그게 어디 쉽나? 요즘 집 값이 얼만데, 아르바이트하다가 월세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는데. 그가 말하는 단독자의 삶은 정신적인 독립에 앞서 물리적으로 온전한 혼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 마형은 애써 고행을 택하라는 조언이다. 힘든 거 다 아는데 우선 나가서 고생을 좀 해봐야 어른이 된다는 꼰대 소리다. 이쯤에서 책을 덮을까도 했지만 날씨가 좋으니 좀 더 읽어보자.


영원회귀의 니체


마루야마 겐지는 평소 니체를 존경한다고 했다. 스스로 폭탄이라 불리길 자처했던 철학자 니체는 마루야마 겐지를 이해하는 한 가지 연결고리로서 읽어볼 수 있다. 니체는 목사 집안에서 자랐지만 불운한 가정환경과 종교를 향한

좋은 유럽인 니체, 데이비드 크렐 및 도널드 베이츠 공저

회의에 호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예수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고, 아버지가 없는 가정은 늘 짐처럼 그를 옥죄었다. 예술적으로 큰 재능을 보였던 니체는 24살에 바젤 대학교에 교수로 취임하면서 독립할 수 있었다.(역시 공부를 잘하고 봐야 해)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계승하며 철학가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 니체의 자신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염세주의가 긍정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한다.


영원회귀(永遠回歸) 혹은 영겁회귀(永劫回歸, Ewige Wiederkunft)라도 부르는 이 이론은 니체를 말할 때면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개념이다. 시간은 끝이 없는데 지구라는 땅덩이에 있는 부스러기들은 한정되어 있다. 우리들이 매일 먹고 마시고 밟으며 그 부스러기와 마주하고 산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사실 우리가 멍청해서 그렇지 같은 패턴을 늘 반복하며 사는 게 지리멸렬한 인생 아닌가. 시간이라는 무한의 좌표평면에서 무의미의 공기 속을 유영하는 것이 인간이라 이거다. 듣다 보면 무지하게 힘 빠지는 소리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늘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는 인간들은 지속되는 삶의 회귀를 추적하고 회안을 품고 산다. 그건 스스로 얽매이며 또 다른 창작물을 세상에 내놓는다. 난 그것을 예술이라고 말하고 싶다.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에 다다를 수 있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삶에 대한 긍정이다.(쇼펜하우어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다.) 반복되고 무의미에 치우치더라도 부대끼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 회귀는 삶을 소홀히 하지 않는 자유의 경지이다. 밀란 쿤데라는 이 주제를 인생 전체에 걸쳐 소설로 풀어놓은 바 있다. 삶은 늘 생방송을 하는 부덕한 것이고, 우리는 늘 절절매며 산다. 이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생을 상대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담을 던지는 것이다. 그것이 밀란 쿤데라 식 영원회귀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가 스스로 기른 어둠에 먹혀 죽는 환영을 보면서 무(아무것도 없음, 제자리)를 말한다.


고독력을 강조했던 쇼펜하우어의 영향은 니체가 전 유럽 대륙을 옮겨 다니며 살았던 것과 관련이 있다. 그는 집필을 위해서 늘 거처를 옮겼다. 늘 단출하고 구색이 없는 삶이었다. 안착이라는 것을 가장 겁냈으며, 독일의 악행을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그는 유럽인으로 불리길 좋아했다. 좋은 유럽인이 되길 원했으며, 평생 독일을 비판하는 말을 남겼다. 또한 니체는 평생 기독교를 부정했다. 단순히 생각해봐도 그가 가진 영원회귀의 사고 안에서 기독교의 영원불멸이 자리 잡을 공간은 없어 보인다.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and Isolde), 에드먼드 레이튼(Edmund Blair Leighton) 1902년 작

니체는 평생 독신이었다. 단독자의 삶을 실천하기 위해 무언가에 집착하는 것을 늘 경계했다. 욕망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그의 자세는 니힐리즘과 영원회귀를 강조하는 여려 권의 저서로 설명된다. 그러고 보면 마루야마 겐지가 니체를 좋아하는 건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니체는 ‘'마루야마 겐지'’식의 제멋대로 사는 인생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우리가 ‘인맥 쌓기’라고 말하는 관계에 대해서도 시니컬하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지만, 내 생각과 맞지 않으면 교류하지 않는다. 문학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와 다르다. (생략) 문학은 영화처럼 모두 함께 보는 장르가 아니다. 책을 어깨동무하고 함께 읽을 수 있나. 혼자 읽고, 혼자 쓰는 거다.”


한국에는 멘토니 인문학이니 하며 듣기 좋은 소리와, 어려운 용어를 남발하는 쓰레기 책들이 서점 가득 쌓여있다. 그 속에 '마루야마 겐지'의 책도 섞여있다. 그 자기 개발서와 난잡한 산문 속에서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라는 제목을 달고 고결하게 자리를 지킨다. 지식을 가장한 자기개발서들은 듣기 좋은 소리나 하며 세상을 단순하게 포장한다. '마루야마 겐지'는 다르다. 누군가에게 벌레처럼 기생하고 싶은 나약한 놈들을 혐오하며 니체의 정신을 계승한다.

누구나 단독자의 삶을 동경한다.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오늘 밤 내게 찾아올 고독을 모르지 않는다. 누군가가 그리워 몸이 달아올라도 점퍼를 입고 슬리퍼 차림으로 문을 나서면 명백한 검은 하늘이 날 기다린다. 단독자가 될 수 없어도 우리는 홀로 남겨질 날을 기다린다. 여기 그 누구보다 고독에 시달리다 시 한 편 남기고 증발한 남자가 있다. 이 시 한구에 단독자의 입김이 배어있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
            
                             다나카와 슌타로

인류는 작은 구[球] 위에서
자고 일어나고 그리고 일하며
때로는 화성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화성인은 작은 공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혹은 네리리 하고 키르르 하고 하라라 하고 있는지)
그러나 때때로 지구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것은 확실한 것이다

만유인력이란
서로를 끌어당기는 고독의 힘이다

우주는 일그러져 있다
따라서 모두는 서로를 원한다

우주는 점점 팽창해간다
따라서 모두는 불안하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에
나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 - 다니카와 슌타로


표지사진 : 영화 멜랑콜리아, Melancholia,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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