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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23. 2018

복수의 생사고락 生死苦樂

박찬욱의 <복수 3부작>, 폴 버호벤의 <로보캅>

박찬욱 복수 3부작


난 아직도 <올드보이>를 보러 갔던 범계역의 작은 극장을 잊지 못한다. 박찬욱의 복수 3부작(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은 한국 영화의 부흥기라 불리는 이천 년대 초반에 등장한 시리즈다. 당시엔 이 시리즈의 첫 작품인 <복수는 나의 것>(별로 재미가 없다는 소문이 돌았다.)은 보지 못한 상태였다. <올드보이>의 칸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수상으로 뽕에 살짝 취해서 극장을 찾았더랬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작품이었지만 그 당시는 매표소 누나에게 눈웃음 한 번 치면 표를 내주었다. 시네마 키드의 설움을 이해하는 그 관대함이란.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혹은 해외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영화 <올드보이>

일요일 오후 극장은 한산했고, 커피를 하나 들고 영화를 보기 시작한 나는 어느새 자리를 고쳐 잡고 집중하고 있었다. 이병우 음악감독의 서정적이면서도 그로테스크한 오리지널 스코어가 극장을 울린다. 이어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데 난 미동조차 하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 혼자가 돼서야 두리번거리다가 날 멀찍이 쳐다보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 뭔가 대단한 걸 본거 같은데, 뭔지 잘 모르겠네.” 아마도 그건 파토스(Pathos), 한국말로 정념? 그렇다 난 어떤 정념을 스크린에서 목격했던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의 주인공 동진은 자신의 딸을 유괴해 죽인 범인을 철저한 고문 끝에 죽여버린다. 이 영화는 치외법권 하에서 냉혈한 냄새를 풍기며 하드고어 한 살육 장면을 연출한다. 적의 아킬레스건을 칼로 도려내는 장면이 며칠간 내 뇌리를 떠다녔다. <올드보이>는 누군가에게 15년 동안 감금당했다가 풀려난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적을 찾아내어 죽이려고 하지만, 막상 자신을 왜 풀어줬을까를 생각하지 못해서 스스로 구원에 실패한 사람이다. 복수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친절한 금자씨>는 더 오묘하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에 속아 오랜 형기를 살게 된다. 그녀는 수감 기간 동안 철저한 복수극을 준비하고, 출소 후 헤어졌던 딸과 재회한다. 그녀는 복수 후의 허망함, 어머니로서의 윤리, 그럼에도 결코 멈출 수 없는 복수를 주저한다. 그건 복수의 피로감,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강렬한 암시를 내포한다. 난 마찬가지로 이 지점에서 정념을 목격했다.

하드고어 스릴러 <복수는 나의 것>


데카르트 정념론(情念論, Les passions de l'âme, 1649)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이란 정신과 신체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엄격하게 분리하는 이원론을 통해 데카르트는 신체를 원인으로 하여 정신 속에 야기되는 수동(passion)의 고찰로 향하게 했다. 그는 인간의 기본적 정념으로서 경이, 애정, 증오, 욕망, 비애의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고 정리했다. 이러한 정념은 모두 남에 의해 움직여지면서 그것을 모르고 스스로 움직인다고 믿고 내부에서 우발적으로 격발 한다. 따라서 여기에 대처하기 위해선 그 구조를 객관적이며 기계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원인을 인식하고 그것에 의해 정념을 주체로 하는 일, 즉 수동성을 능동성으로 변화시켜서 자유의지에 합치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여기서 이성(logos)적 의지에 의해 정념을 철저하게 지배하는 고매한 마음이 데카르트 정념론의 도덕이다.
사실 말이 쉽지, 한 인간이 자신의 정념을 이성적 판단으로 다스린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수도승도 아니고서 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정념은 곧 분노를 다루는 영화들이 스크린에 수놓는 감정의 도가니다.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은 정념의 생애를 다룬 작품이다. 감정이 솟아 올라 한 인간을 잘라내고, 결국 그 정념을 다스리지 못한 죄로 스스로 단죄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의 동진은 처절한 복수에 성공했지만 알 수 없는 무정부 세력에 의해 가슴을 관통당하고, <올드보이>의 대수는 딸과 근친상간을 맺는다. 금자씨는 앞서 말한 대로 복수의 허망함에서 엄습하는 피로를 실감한다.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히어로물 <로보캅>


영화 로보캅 RoboCop, 1987, 폴 버호벤 감독


내 영화 인생의 첫 복수극은 아마도 <로보캅>이다. 인간 '머피'는 사실상 죽었지만, 기계 로봇으로 부활한다. 그의 머리는 분명히 마이크로 프로세서로 만들어져 있다. 컴퓨터 언어로 그의 뇌를 조직하고, 디지털 신호는 그의 장철 몸을 움직인다. 왜 굳이 인간의 뇌와 육체의 일부 빚을 져야 하는지 감독은 대답하지 않는다. 인간의 뇌와 일부 육체가 로봇에 내재됨으로 해서 펼쳐지는 드라마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적으로 예수의 고난과 부활에 모티브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처절한 복수뿐이다. 여기에 공익에 기여해야 하는 경찰로서의 임무가 주어지면 로보캅은 도덕 윤리의 시험대상으로서 완벽한 조건을 가진다.

모두의 예상대로 로보캅의 인간 뇌는 완전히 컴퓨터에 의해 통제되지 못한다. 뇌 속에 남아있는 잔여물 중 가족에 대한 사랑, 자신을 파멸시킨 적을 향한 분노, 다시 인생을 찾고 싶다는 회한이 남아있는 것이다. 영화는 자신이 살던 집을 찾아간 로보캅(머피)이 아내와 재회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그는 기억 속에 단편적으로 새겨진 추억을 되살려내고, 아내와 나눈 진한 키스를 그린다. 이 장면의 훌륭함은 내 기억 속에 로보캅이라는 영화를 가족영화로 남아있게 했다. 난 훗날 다시 이 장면을 보았을 땐 복수의 연료로서 기억하게 됐다. 영화는 자신을 통제하려는 정부와 개인적인 원한 사이에서 갈등한다.

머피는 부활하여 로봇의 몸으로 영생을 누릴 수 있었지만(로보캅이 인간이 맞는가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결코 정념 앞에 순응하지 못한다. 내가 잃어버린 과거, 가족, 사랑, 장소에 대한 회한은 곧 분노로 표출되고, 그 원인이 되는 자는 그 이상의 고통으로 죽어줘야 마땅한 것이다. 사이그보 안의 복수는 로봇 문명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과 맞물려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박찬욱의 복수 3부작에서 복수를 추동하는 원동력이 모두 가족이었던 것과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가족과 분노, 그리고 정념의 발산과 소멸, 그 생애주기는 영화적으로 강한 카타르시스를 유발한다.

인간의 뇌를 되살려서 그걸 국가의 통제하에 재활용한다는 아이디어는 지극히 영화적이다. 인간과 사이보그를 어떠한 기준으로 나눠야 할지 활발한 논의가 되기 전에 이 영화는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 문득 난 폴 버호벤이 알파고와 대국을 하는 이세돌 9단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더 브레인, 데이비드 이글먼 저

더 브레인, 데이비드 이글먼 저

사실 로보캅과 관련된 아이디어는 실제 현실에서도 구현되고 있다. 최근에 읽은 ‘데이비드 이글먼’의 뇌과학 저서 <더 브레인>에 따르면, 인간의 뇌를 냉동시켜 주는 서비스가 최근 시행되고 있다고 전한다. 시간이 지나서 기술적으로 영생이 가능한 미래에 냉동 뇌를 다시 되살려 주는 사업이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이 사업에 실제 돈을 투자하여 자신이 로보캅이라도 되길 꿈꾸는 걸까. 재밌는 점은 신체 전체를 모두 냉동 가능하지만, 가장 인기가 있는 서비스는 오로지 뇌만 보존하는 저렴한 메뉴다. 실제 회사의 광고 문구를 보면 생명보험에 쏟을 돈으로 이 서비스를 이용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홍보한다. 흥미로운 점은 인간들이 자신의 ‘뇌’를 인간됨의 요건으로 염두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보통 내 심장, 내 마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내 흉부(심장)를 손으로 만지면서 대화한다. 하지만 실제 자신의 뇌를 자아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장을 대신하여 기계식 혈액 적출기를 이식하는 지금 이 시대에 심장으로는 나의 인간됨을 증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하트 표시는 뇌 모양의 이모티콘으로 바꿔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직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한 성취, 아직 누려보지 못한 행복, 평생 월급쟁이로 살아온 것에 대한 보상심리 등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미래의 삶을 욕망한다. 냉동 뇌 기술이 상용화되면 종교는 폐기될 것이다. 천국과 지옥을 통한 장사치도 모두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무릎 꿇을 것이다. 우선 죽음을 다룬 서사가 사라질 것이며, 인류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죽음이라는 두려움이 곧 성능 저하에 따른 연산 작용 착오로 전환될 것이다. 각고의 노력으로 완성한 성경책 역시 그 뻘쭘함에 세계 1위의 베스트셀러 지위를 <스스로 하는 뇌 관리법>에 내어줄 테지. 오로지 신의 구원은 테크놀로지에 있을 터이니.


사실 테크놀로지를 향한 숭배, 혹은 그 두려움은 세기말에도 있었다. Y2K를 기억하는가. 여기서 Y는 Year(년)를, K(엄밀하게는 소문자 k)는 1000을 나타내는 접두어인 kilo(킬로)이다. 밀레니엄 버그(millennium bug)라고도 불린다. 90년대 초반생만 해도 기억하지 못하는 세기말의 분위기는 아주 흥미로운 것이다. 숫자 하나 바뀐다고 온 세상이 멸망한다고 겁을 주는 미디어와 종교를 보았는가. 노스트라다무스도 틀리고, 셰익스피어도 예측하지 못한 현대화의 신화는 기술의 발전 앞에 무력했다. 고작 숫자 단위 하나 변한다고 종말을 찬양하는 이 사람들은 뭘까. 난 세기의 마지막 날 서울 아트시네마에 있었다. 낙원상가 2층에서 외로운 하루를 소비했다. 새천년 대한민국을 맞이했는데, 그 당시 본 영화가 <유령과 뮤어 부인>이라는 영화였다. 이 클리셰 덩어리의 고전 영화에는 삶에 대한 희망이 가득하다. 고작 집에 나타나는 유령 하나에 어찌나 화들짝 놀라던지. 난 팔짱을 끼며 예년 같지 않은 일 년을 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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