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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28. 2018

낯설고도 친근한 누군가

토니 에드만, Toni Erdmann, 2016

Greatest Love Of All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종종 듣는다. 워낙 히트곡이 많다 보니 뭘 들을지 한참을 스크롤을 내려야 한다. 최근 한 독일 영화에서 <Greatest Love Of All>을 부르는 장면이 보았다. 내가 아는 그 노래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르게 들렸다. 전혀 신경도 쓰고 있지 않던 가사까지 자막으로 보며 노래에 심취했다. 세기의 디바들이 속속 등장하던 80년대 중반에 출시된 휘트니 휴스턴 1집은 전 세계적인 메가 히트를 기록했다. 며칠 동안 머릿속을 떠다니는 이 노래를 코로 흥얼거리며 그녀에 관한 추억을 꼽씹었다.

휘트니 휴스턴은 90년대의 머라이어 케리, 셀린 디옹과 같은 대형 디바들의 등장과 맥을 이뤘다.

영화 <토니 에드만> 속 딸 이네스는 아버지의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자 '또 이 노래냐'는 표정이다. 고향에 있어야 할 아버지는 일언반구도 없이 이네스를 찾아왔다. 누구에게나 삶의 속살은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법이다. 이제는 같이 살지도 않고, 가끔 기념일에나 예의상 식사나 하는 아버지의 방문이 그녀에겐 불편하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Greatest Love Of All>을 부르는 딸의 모습이 좋았다. 그는 무작정 이네스를 보며 피아노 반주를 시작한다. 이네스는 주변 눈치를 살피다 억지로 노래를 시작한다.

I believe the children are our future. Teach them well and let them lead the way. Show them all the beauty they possess inside. Give them a sense of pride to make it easier.

이네스는 점점 곡에 빠져든다. 그녀를 주위의 낯선 사람들도,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약간은 감정에 북받쳐 가창을 마친 이네스는 이네 정신을 차리고는 급히 집을 빠져나간다. 주변 박수 소리와 다르게 그녀의 표정은 서글프다.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 첸 아버지는 딸의 얼굴을 쳐다본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난 어렸을 적부터 자주 <Greatest Love Of All>을 들었다. 라디오, TV 가리지 않고 이 곡은 배경음악으로 쓰였다. 근데 <토니 에드만> 속 한 장면을 통해 들어보니 노랫말이 이렇게 계몽적인 줄은 몰랐다. 그저 평범한 R&B 곡처럼 뻔한 사랑 노래인 줄 알았지. 68세대의 은퇴한 아버지와 고객 눈치나 보는 신자유주의라는 사파리 속 하이에나가 된 딸. 이 곡의 가사는 더 나은 세상을 바랐던 68세대의 바람처럼 청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은 유치하게도 들리고, 잊어버린 편지의 한 구절처럼 아련하기도 하다. 아버지는 어렸을 적 이네스와 이 곡을 자주 불렀다. 연주가 끝난 후 급히 자리를 피하는 이네스, 그 딸을 미처 붙잡지 못하는 아버지. 그들의 실패는 이처럼 명백하다. 벌어진 두 사람의 간극처럼 이 곡의 가사는 생뚱맞고 짐짓 슬프다.

다 큰 성인이 되어 부모를 바라보는 건 난감함의 연속이다. 그의 나이 먹음이, 나와 다름이, 그 초라함이 폐부를 찌른다.

<토니 에드만>은 부녀의 갈등을 통해 세대 간의 입장을 암시한다. 그들의 봉합은 요원하다. 극의 클라이맥스처럼 그저 포옹 한 번으로 화해할 순 없다. 괴상한 괴물 복장을 하고 ‘토니 에드만’이라는 가명으로 딸을 행복하게 해 주려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 진저리 치는 딸. 극 중 부녀가 유일하게 서로의 처지에 관해 생각하게 되는 장면이 <Greatest Love Of All>을 부르는 씬이다. 그렇다고 뭐 변한 것은 없지만 부딪치기만 했던 두 사람이 서로를 살펴보기 시작한다. 사람의 감정은 참 수수께끼 같아서 전혀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열리기도 한다.

 

감정을 드러내는 두려움 

      

점점 감정의 진폭이 줄어든다. 난 어릴 적부터 호들갑을 질색했다. 모든 걸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좋아했다. 매사에 덤덤한 게 어른스러운 거라고 믿었다. 같은 맥락으로 속상한 일을 누군가에게 터놓는 걸 잘 못한다. 얼굴엔 그늘이 지고, 말투에서 다 드러나는데 별거 아닌 것처럼 위악적인 말을 내뱉는다. 다 같이 모인 술자리에 괜히 껴서는 잘 놀다가도, 조금 취하면 괜스레 냉소 반 염세 반으로 일관한다. 나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친구들은 그런 모습들에 익숙한 듯 히죽거린다. 고마운 일이다.

최근에 속상한 일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지만, 그 당시만큼 고통스럽진 않다. 시간이 흐르니 아침 출근길에 콧노래도 나올 정도로 잊어버렸다. 지하철 플랫폼에서 발을 고르며 슬며시 웃을 정도로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다. 우스운 일이다. 당시엔 집에 혼자 있는 게 두려워서 온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귀가했다. 책을 읽으려고 해 봐도 단어 하나를 넘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지지리 궁상, 다 늙어서 이게 뭐하는 짓이냐. 일과를 촘촘히 짜서 간신히 시간을 흘려보냈다. 일 분 일 초가 쌓여 날 구해줬다.

신자유주의 세대의 냉혹한 현실을 대표하는 이네스는 늘 곤두서 있다. 한 걸음도 여유가 없다는 듯 날카롭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도 줄어든다. 오래된 친구도, 가족에게도 속내를 비치지 못한다. 언제나 알아서 잘하는 사람이고 싶고, 누구의 도움 없이 그럭저럭 잘해가고 싶어서이다. 강한 척 떨던 허세가 어느새 성격처럼 굳어졌다.

그 날 역시 혼자서 속을 끓이고 있었다. 식당 앞 의자에 앉아 잘 넘어가지 않는 햄버거를 씹으며 백색 소음으로 피신했다. 그 와중에도 ‘살이 좀 빠졌겠는 걸’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우스워 미친놈처럼 웃고 있는데 낯익은 녀석이 햄버거 봉투를 들고 옆에 앉았다. 이 거구의 친구는 그간 몇 번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 프랑스 친구였다. 잘 되지도 않는 영어를 하기엔 내 머리는 너무 복잡했다. 햄버거를 목구멍에 쑤셔 넣고 얼른 자리를 피해야지 싶었다.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물으며 잠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온갖 손짓을 하며 그간 못했던 얘기들을 하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영어를 그렇게 잘하는지 서른 넘어서 처음 알았다. 이 친구도 뭔가 심각한 걸 느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었다. 불과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지만 녀석의 햄버거는 차갑게 식어갔다. 딱 한 입 베어 먹고는 내 얘기를 열중해서 듣느라 햄버거를 외면한 것이다. 배고파서 치즈버거를 두 개나 사고, 먹음직스런 머핀까지 앞에 두고서도 만사 제쳐두고 내 얘기를 들어준 녀석이 고마웠다. 이후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 그때의 고마운 감정을 표현하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이 망할 놈의 영어는 왜 이렇게 안느냐.

한 번의 포옹으로 모든 것일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속으로 앓던 얘기들을 왜 잘 알지도 못하는 녀석에게 털어놨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민망하다. 보름가량의 시간 동안 삭히던 얘기들이 유치한 언어들로 표출됐다.(생각해보라 짧은 영어로 하는 투정들을) 녀석이 두드려주는 손짓에 의지해서 울컥했다.(이거는 못 참을 정도로 이불 킥 감이야) 잘 알지도 못하는 녀석에게 난 왜 그랬을까.

그 순간 서울 시내의 무수한 정신과들이 어떻게 존속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상처 받은 이들이 정신과를 찾아 생판 모르는 의사라는 작자에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스키너의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두려움을 직접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환한 불빛에 침을 흘리는 조건 삽입의 원리와 같은 것이다. 두려움에 지속적으로 노출돼 상처에 익숙해지면 동요를 멈출 수 있다. 낯선 프랑스 친구는 내 얘기를 들어주었고, 난 그 시간을 보탬 삼아 나아졌다. 이야기를 한다는 것 그 자체로, 글을 쓴다는 것 그 자체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행위 자체가 스스로를 다독인다. 말끔하게 상처가 낫진 않지만, 연고를 바른 것처럼 점차 아물어간다.

추운 겨울 오후 식어가는 햄버거를 앞에 두고 얘기를 늘어놓던 그 시간, 창문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동네서는 보기 드문 아름다운 눈송이였다. 유럽의 봄은 요원하고 이 놈의 겨울은 아직 끝낼 생각을 않는다.


Greatest Love Of All, 영화 토니 에드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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