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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30. 2018

나를 만들어준 여인들

우리의 20세기, 20th Century Women, 2016

잊혀진 나의 20세기


영화가 시작되는 시기는 1979년이다. 처음 <우리의 20세기>라는 제목을 들었을 땐 나의 시대라고 생각했다. 내가 20세기를 ‘우리’라고 부르기엔 어리다는 걸 깨달았다. 우선 86년생인 나의 20세기는 세기말의 끄트머리에 불과하다. 본격적으로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할 땐 새 천년 밀레니엄이 세상을 북돋았다.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내가 여전히 20세기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대에 즐겨 쓰던 것들이 여전히 내 가방에 담겨있다. 낡은 페이퍼백과 비싼 몰스킨 노트, 싸구려 모나미 펜은 여전히 내 가방 속에서 존재감을 과시한다. 예나 지금이나 난 구식 취향으로 사는 재미를 느낀다.

그녀의 얼굴은 의미심장하다. 세월이 흘러 이제 어머니가 익숙해진 아네트 베닝은 고민하는 얼굴이 잘 어울리는 배우가 되었다.

미국의 작은 시골마을인 샌타바버라를 배경으로 시작되는 <우리의 20세기>는 불타는 '포드' 자동차가 영화의 포문을 연다. 미국 산업화의 상징과도 같은 포드가 우리 눈 앞에서 잿더미가 되는 중이다. 영화의 시작이 좋으면 끝까지 좋아지는 경우가 많다. 난 이 영화가 딱 그런 경우였다. 자신의 차가 불에 타는데 도로시아(아네트 베닝 분)는 그저 멍하니 창밖만 바라볼 뿐이다. 90년대의 뮤즈 ‘아네트 베닝’은 여전히 변함 없는 미소를 머금는다. 어느새 눈을 찡긋하고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쳐다본다. 표정엔 당혹감이 배어있지만, 이내 조금 시간이 흐르자 오히려 뭔가 떨쳐냈다는 기운이 앞선다. 세월에 무력해 지기보다는 관대한 얼굴로 시간을 불러들이는 얼굴이랄까. 오랜 시간 동안 지켜봐 온 이 노배우의 표정엔 새로운 시기에 대한 기대감이 엿보인다.

불타버린 차는 사라진 남편의 것이다. 영화의 원제가 ‘20세기 여자들’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장면은 상징적인 출발로 유추 가능하다. 이제 남근의 흔적은 사라지고 온전히 여성들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난데없는 불놀이에 겁에 질린 소년은 이제 자신의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미처 알지 못한다.


엄마 도로시아는 낡은 저택을 수리해서 하숙집을 운영한다. 1924년 생으로 한 번의 이혼을 거쳐 50대 중반이 되었다. 그녀에게 가족은 아들뿐이다. 도로시아는 아들의 교육문제로 고민이 많다. 이 험한 세상에서 아버지 없이 어떻게 잘 키워낼 수 있을까. 그러던 중 하숙집이 그녀의 대안으로 떠오른다.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아들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만)의 삶을 채워주려는 야심찬 계획이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제이미가 좋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무엇이 필요할까. 도리시아는 본인의 고독과 사색의 시간을 지키면서도, 타인의 영향에 아이를 일부러 놓아주는 지적인 여성이다. 그 결과 제이미는 다채로운 세계관을 가진 20세기 여성들과 자신의 중2병을 맞서나간다. 페미니스트이자 펑크를 사랑하는 사진가 애비(그레타 거윅), 어린 시절부터 제이미의 친구인 줄리(엘르 패닝). 이 두 캐릭터의 등장은 이제 영화의 질곡이 녹록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미국 인디영화신의 독보적 존재감을 가진 '그레타 거웩'의 특기는 곤란한 구석이 있지만, 끝내 긍정하게 되는 캐릭터에 전문이다.

나를 만들어준 여인들


난 마이크 밀스의 전작 <비기너스>(Beginners, 2010)를 무척 좋아한다. 75년 만에 커밍아웃한 게이 아버지와 내성적 일러스트레이터 아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마이크 밀스는 이 영화에서 나지막한 목소리와 귀여운 그림실력을 가진 캐릭터 '올리버'(이완 맥그리거 분)를 화자로 내세웠다. 진심을 다하지만 결코 상대를 다치게 않는 고백을 하는 아버지는 올리버와 별개로 매력적인 인물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가장 정확하게 말할 줄 아는 아버지는 직선적으로 매력적이다. 그 반면 한 걸음 물러서서 이해해보려는 삶의 태도가 올리버의 응수다. 이 매력적인 캐릭터들은 조용한 영화에 인상주의 화가의 붓칠처럼 내적 동요를 부른다. 서로 다른 상을 가진 두 인물은 여성 취향부터 삶의 지향까지 같은 점 하나 없지만, 서로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을 일궈나간다. 극심한 물질주의와 인간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전시된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목소리를 낼 것인가. <비기너스>는 철저하게 문학과 미술의 영역, 즉 예술이 세상에 이바지할 수 있음을 말하는 영화다. 이런 감독의 의도는 이번 영화 <우리의 20세기>에도 고스란히 적용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캐릭터에 의지하는 바가 크다. TV 속 지미 카터는 말한다. “많은 이들이 방탕한 삶과 소비를 숭배하지만, 무언가를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은 의미를 향한 갈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라고. 80년대에 들이닥칠 과도한 물질주의를 경계하는 명연설이지만, 영화 속 TV를 젊은이들은 당대의 거치와 엇나가는 말에 헛소리라고 투덜거린다. 오로지 줄리와 애비만이 하나같이 다 맞는 말이라고 박수를 친다. 이것은 영화가 곧 혼란스러운 당대의 격변에서 세차게 흔들릴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탄이다. 제이미에게 세 여성은 자기만의 시각을 가르치기 위해 나타난 세상의 반란분자다.

영화 비기너스, 아마도 이완 맥그리거의 최고 작품이 아닐까.

누구에게나 그런 여성들이 있다. 삶을 살면서 맞게 되는 여러 질곡을 옆에서 함께하는 여인. 도무지 잡히지 않는 절대적 명제 앞에서 슬며시 웃어주는 여인. 그녀는 고독하고 혼자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늘 말을 걸면 확고한 자신의 주관과 삶의 태도를 내게 털어놓았다. 난 그 입모양을 바라보며 그녀를 동경했고, 그녀를 향한 글을 쓰며 내 사고를 두드렸다. 그런 영감의 뮤즈는 자주 나타나지 않지만, 짧은 기간 동안 인생을 흔들고 가버린다. 이제는 볼 수 없는 그녀를 생각하며 난 영화의 장면 장면을 추억했다. 도로시아는 아이가 결석을 하고, 시험에서 부정을 저질러도 놀라지 않는다. 그저 그건 시험일뿐이니까. 호들갑 떨지 않아도 세상에 그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산더미다. 당대의 미국은 전쟁과 매카시즘의 이데올로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깟 시험 따위야 제이미의 삶에서 자그마한 파동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도로시아는 아이가 창자를 꺼내 줄넘기를 하는 이토 준지식 만화를 봐도 같이 웃어줄 사람이다. 한때 무정부주의를 지지했고, 미국의 거친 민주화 과정을 온몸으로 경험한 50대 도로시아는 같이 갈 여정에 힘이 되는 동반자다. 두 번째 여인 애비는 자유롭게 섹스를 하고, 전문직의 직업을 가지고 이 시대의 진취적 존재가 되려고 하지만 속으로는 외로움에 사무친 사람이다. 그녀가 대표하는 세대는 도로시아의 낙천성과는 반대되는 지점에서 그려진다. 그녀의 조울(躁鬱)은 영화에 상당한 재미를 주는데, 극단적 페미니즘을 향한 용어 선택과 남성적 사회를 향한 일갈이 속을 시원하게 긁어준다. 도로시아는 극단적인 애비를 다소 우려하지만, 정작 제이미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세 번째 그녀 줄리는 제이미와 침대에 누워 대화를 나눈다. 제이미의 손이 치마 속으로 들어오면 관계를 망치지 말라고 경고한다. 어쩌면 줄리는 보기보다 강인한 사고를 가진 제이미를 위태롭게 흔드는 사람이다. 도로시아는 그 사실을 눈치 채고 불안해하지만, 결코 줄리를 떼어놓지 않는다. 여인에 대한 아픔과 처절한 마음고생이 아이에게 선물할 성숙한 삶의 태도를 생각한다. 줄리는 섹스를 하지 않으면서도 제이미의 침대에 누워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백한다. 그녀는 진실한 태도로 말하지만, 정작 내용에는 모순이 가득 차 있어 제이미를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어쩌면 '줄리'는 그 누구에게나 한 시기에 모조리 마음을 앗아간 연인일 것이다. 사랑의 열병을 안겨 준 그녀의 재림이다. 다가가려 하면 민감한 발톱을 드러내고, 이내 멀어지기엔 마음에 생채기를 내며 안기는 고양이다. 당신도 누군가를 머릿속에 떠올렸을까. 솔직하고 맑은 그 사람이 줄리에게 겹쳐 보인다면 이 영화는 조금 더 남다르게 보일 것이다.

엘르패닝의 불안정한 소녀역은 적절하다. 아역 시절부터 거장들의 영화에 출연해 온 엘르는 지금 나이에 가장 어울리는 복잡한 심경을 가진 줄리에 가까운 연기를 한다.

소년의 성장은 아름답다. 수많은 성장영화는 웅크린 소년 앞에 소녀를 성장의 보조역할로 소모한다. 대상화된 소녀는 언제나 상처받은 체 물러난다. 감독 마이크 밀스의 선택은 소녀를 놓아주는 것이다. 영화 속 줄리는 그 누구의 억압에도 아랑곳 않고 다른 세상으로 나아간다. 제이미의 맹열한 울부짖음도 못본 체 지나간다. 그녀가 스크린을 벗어나 완전히 홀로될 때 느껴지는 쾌감은 강렬하다. 부모로서 도로시아는 이상화되어 있는 사람이다. 한 우주를 품은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뭘까. 나 스스로 이뤄가기도 벅찬 이때에 그 생명에게 난 뭘 해줄 수 있을까. 남들이 다 결혼하는 20대 후반과 30대 초에 만난 여자와 가정을 꾸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 거친 세상에 아이를 세상에 내놓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일까. 솔직히 말해서 이 영화는 결혼과 출산에 의심할 수 없는 공포를 남긴다. 이 영화 속의 사건들은 한 인간이 자라나는데 영향을 끼친 복잡한 함수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은 여전히 모난 돌처럼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난 도로시아를 보며 뿌리치며 끝내 나아간 그녀를 떠올렸다. 그렇게 우리의 20세기는 지나갔다.



Sarah Vaughan - Come Rain Or Come Shine (1950 Ver)

https://www.youtube.com/watch?v=KAQ4cNLKjgw&feature=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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