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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11. 2018

민낯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립반윙클의 신부, A Bride for Rip Van Winkle

말에 빗질을 하듯 가꾸는 남자


친구와 대화를 하던 중 난데없이 ‘넌 그루밍족인 것 같아’라는 말을 들었다. ‘아 그래? 내가 그루브를 좀 잘 타지 하하’하고 넘어갔다. 일 분 일 초 말장난을 멈출 수 없다. 그루밍의 어원은 마부가 말을 빗질하고 목욕시켜 주는 행위를 지칭하는 용어다. 몸치장에 한껏 신경 쓰는 남자들을 칭한다. 과거 비슷한 말로 메트로 섹슈얼이라는 말을 썼다. 이 용어는 내면에 여성성이 있음을 긍정하는 자, 즉 젠더의 정체성 여부를 의식한 말로 쓰였다. 외모의 치장에 신경을 쓰는 건 여성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어쩐지 듣기에 따라서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말이다. 내가 외모에 신경 쓰고 다닌다는 말을 상대는 왜 굳이 꺼냈을까. 내가 무슨 유난을 떠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상대나 나나 아직까지도 외모에 신경을 쓰는 남자를 의식하는 것이다. 여자는 당연히 외모에 신경을 쓰지만, 남자는 신경을 쓰면 이렇게 그루밍한다고 한 마디 보태게 되는 것이다. 이성에게 늘 그린라이트 신호만 잡아내려고 애쓰는 단순한 난 어쨌든 좋은 뜻일 거라면서 스스로를 다독였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서는 마부의 빗질처럼 목을 슥슥 긁고는 잠이 들었다.


그루밍족이라는 용어는 포화상태에 다다른 뷰티산업의 대안을 남성에게서 찾으려는 장사치의 말장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패션잡지 속의 미끈한 남자들은 번쩍번쩍 광낸 흔적이 역력한 녀석들이다. 가끔 카페에서 '지큐'나 '에스콰이어' 속 화보를 보고 있노라면 나 스스로 초라한 행색을 의식하게 된다. 지금 이럴 때가 아냐! 어서 그루밍 해야지! 이에 대해 흔히 쓰는 병리학적 용어로는 '아도니스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스 신화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연인으로 유명한 아도니스는 그리스 로마의 아이돌이었다. 막장 중의 막장으로 통하는 출생의 비밀과 복잡한 여자관계는 보너스다. 아도니스 증후군은 다른 말로는 신체변형 공포증으로 불린다. 외모 콤플렉스가 극심해서 일상생활을 못할 정도로 두려움을 느끼는 남자들을 지칭할 때 쓰인다. 아도니스가 결국 자신의 아름다운 미모 때문에 대리모인 아프로디테와 사랑에 빠지고, 질투에 눈먼 놈한테 해코지까지 당하는 것을 보라. 과거부터 외모에 신경을 쓰는 아름다운 남자에 대한 위험신호가 인류에게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매끈한 아메리칸 사이코


이와 관련해서 생각나는 영화는 <아메리칸 사이코>다. 크리스천 베일이 배트맨이 되기 전, 데뷔 초의 아름다운 육신을 감상할 수 있다. 완벽한 외모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다양한 화장품을 바르며, 옷장 속의 수많은 패션 브랜드들을 줄줄이 외운다. 온몸을 가꾸기 위해서 운동을 쉬지 않고, 미적으로 떨어지는 상대를 경멸한다. 그의 살인행각은 CF를 보는 것처럼 감각적이다. 완벽한 외모를 가진 부유한 남자가 살인을 한다는 설정은 전형적으로 그리스 신화를 차용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수시로 이 남자가 몸을 가꾸고, 아름다운 육신을 뽐내는 모습을 화면에 비춘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하여 자기와 같은 이름의 꽃인 나르키소스, 즉 수선화(水仙花)가 된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나르키소스처럼 자아도취된 아름다움이 화면을 장식한다.

이 당시의 그루밍은 살인자의 사이코적인 특성을 한껏 강조하는 의식처럼 연출됐다. 그는 맨하튼의 아도니스다.

난 이 영화에서 말 그대로 ‘그루밍 신’만 좋았다. 크리스천 베일의 탄탄한 몸과 맵시 있는 슈트 핏을 보는 즐거움이다. 감독의 연출 의도를 유추해보면, 결벽증적인 미에 대한 집착을 통해 살인에 까지 이르는 과정을 통해 미국 사회의 물질적인 면모와 외모지상주의를 지적하고 싶었으리라. MTV 시대의 미국인은 갑작스럽게 돈다발을 쥔 졸부처럼 천박한 과시욕 소비에 여념이 없었다. 영화 속 크리스천 베일은 아름다움과 악행을 하나의 알레고리로 품고 범행을 행한다. 과거 신창원이 꽃으로 장식된 티셔츠를 입고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카메라를 응시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뉴스매체에서는 살인자의 아름다운 얼굴을 선정적으로 다루었다. 그의 애정행각에 미담을 섞어서 그를 현대판 로빈훗으로 만들려고 용을 썼다. 이는 대중들이 범죄자에게도 미적 중요성을 강요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루키즘이 온 세상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했고, 외모의 후광효과에 그 어느 때보다 신경 쓰게 됐다. 강남의 성형외과에 비비크림을 바르는 남자들이 등장한 것도 이 즈음부터다.     


남성이 몸치장에 거부감이 생긴 것은 19세기 후반 유럽이다. 페미니즘이 일반화된 요즘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서유럽에서 벌어졌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강대국들이 전 세계를 식민지화하던 시절, ‘남자다운 것’은 제국주의 시대의 전쟁 발발과 무관하지 않다. 식민지 개척과 제조업의 발달로 고된 노동력은 남성의 상징이 됐다. 전쟁에서는 총탄을 들고 적진을 누벼야 했다. 고로 노동은 남자만의 전유물이 되었고, 여자의 역할론은 보조 수단으로 축소되었다. 남자다운 것의 가치는 미적 추구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 것이다. 한국을 생각해봐도 전쟁과 단기 산업화의 과정에서 유럽이 20세기 중반까지 겪었던 모든 과정을 유사하게 치렀다. 이로서 2000년대가 되기 전까지 남자가 그루밍을 한다는 것은 아도니스의 비극을 내포한 인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로그 인, 립 반 윙클의 신부


최근 온라인 맞선 사이트로 사람을 만나는 친구들이 늘어나고 있다. 바쁜 회사생활과 혼자서 노는 문화의 일반화로 이성을 만나기 점점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과거엔 나이트를 가고, 클럽을 가서 오프라인 만남으로 작업을 하는 것이 대세였다. 하지만 대인관계의 낯가림이 점점 심해지면서 온라인으로 만나는 것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장점은 뚜렷하다. 온라인이 가진 특성들을 고스란히 가지기 때문이다. 빠르고,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으며 선호하는 이상형을 애플리케이션에 입력하면 적합한 상대를 매칭 시켜 준다. 마담뚜 역할을 하는 애플리케이션의 빅데이터는 포토샵으로 잔뜩 조작된 사진들로 상대를 현혹시켜 현질을 촉구한다.

SNS가 만들어준 가족은 현실세계의 대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와 비슷한 소재를 가진 영화가 '이와이 슈운지' 감독의 <립반윙클의 신부>다. 립 반 윙클은 네덜란드 한 단편소설의 제목인데, 영어 표현으로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을 뜻할 때 쓰는 말이다. 영화 속 일본의 한 도시에 홀로 사는 여성 나나미는 SNS 계정으로 남자 친구를 구한다. 소심하고 말이 적은 사회 부적응자로 등장하는 나나미에게 온라인은 자신의 결점을 모두 감출 수 있는 다른 세상이다. 포장된 이미지로 점철된 사이버 스페이스는 애인까지 한 번의 트윗 멘션으로 구할 수 있다. 그렇게 시작된 관계는 불안과 의구심을 불러온다.


립반윙클의 신부는 한국사회와도 많은 유사점을 지닌 일본 사회의 문제들을 들여다본 영화다. 1인 가구의 증가, 고독사하는 노인들, 사이버 스페이스 속 히키고모리, 고령화 사회에 따른 빈부격차, 고용불안 등 깔끔한 일본 사회의 이면을 엿볼 수 있다. 하물며 지진과 원전사고로 황폐화된 일본 사회의 병폐는 한국의 몇몇 정치상황과 대참사들이 연상되기도 한다. 짧은 텍스트와 이모티콘으로 장식된 SNS 속 나는 현실의 문제점이 모두 사라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다. 인간 사이의 관계를 점점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온라인 속에서 안정된 거리감을 찾는다. 나나미에게 현실세계는 부적응의 고통 그 자체다. 하지만 SNS는 그녀에게 실패했을지언정 남편을 선물했고, 이혼 후 그녀의 아픔을 치료해줄 친구가 되어주었다. 유사가족의 역할놀이를 하는 SNS 속 친구들은 그녀가 외로움에 치를 떨 때도 곁에서 위로를 아끼지 않는다. SNS 속 자아가 만들어내는 관계는 진짜는 아닐지언정, 그녀를 속이지 않는다. 퍼거슨 경은 SNS를 시간낭비라고 했지만, 온라인의 관계로 현실의 피폐함을 가꾸는 이들 역시 적지 않다는 것 또한 잊으면 안 된다.

립반윙클의 신부는 SNS와 현실세계 어느쪽에도 방점을 찍지 않는다. 그저 두리번거리는 현대인들이 있을 뿐이다.

과거 이와이 슈운지라면 모든 고통이 감성 안에서 포용되고, 감각적인 화면으로 희망이 내재된 공기를 그릴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일본을 바라보는 이와이 슈운지는 과거처럼 끝없는 빗줄기에 빨간 우산을 받쳐들지 않는다. 현실의 무거움이 도심 곳곳에서 출몰할 때 겁을 집어먹는 나나미의 불안한 얼굴은 이 영화의 시작이다. 하지만 SNS에 로그인할 때 평온함을 느끼는 나나미의 얼굴은 영화가 놓치지 않는 순간이다. 일본의 한 도시, 번화가에서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군중 속을 걷는 나나미는 고개를 숙인 체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다. 그 누구 하나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음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왁자지껄한 술집들에 사람들이 즐비하지만 그들은 완전한 타자다. 그녀는 아랑곳 않고 걸음을 재촉한다. 실내 공기의 눅눅함엔 서늘한 어둠을 드리우고, 미세먼지 가득한 도심에는 환한 자연광이 그녀의 민낯을 비춘다. 나나미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낯선 이에게 인사를 건넨다. 립반윙클의 신부 님이 로그인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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