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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13. 2018

비오는 날 광화문에 혼자

그들에게 린디합을, 손보미 저

그들은 우산을 들지 않았다


역시 비 오는 날은 별로다. 아침부터 내리는 부슬비를 보고 있노라니 외출할 기분이 싹 가신다. 올해 초 호기 좋게 부모님과 파리 여행을 할 때도 이렇게 비가 내렸다. 현지 가이드와 잘난 아들 역할을 겸한 실로 미션 임파서블에 가까운 일정이었다. 난 모처럼 효자가 될 기회에 의욕에 넘쳤다. 근데 이 놈의 비가 도와주지 않았다. 열흘 동안 매일 새로운 여행지를 구글맵에 의지해서 얼마나 걸었던가. 날씨만 좋았다면 그 모든 여정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을 터다. 복잡한 파리 대중교통을 몇 번씩 갈아타고, 입에 맞지도 않는 프랑스 레스토랑을 전전하며 부모님 눈치를 얼마나 봤던지. 그래도 장한 아들이라고 연신 감탄을 늘어놓는 두 분을 보며 으쓱 했다. 그저 수많은 파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전과같이 낭만적으로만 보이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 극장에서 본 영화, 파리에 사는 여인에 관한 이야기 <렛 더 선샤인 인>, 쥴리엣 비노쉬는 여전히 아름다우시다.

TV에서 보던 유럽은 늘 화창한 날씨로 어머니를 유혹했다. 내가 처음 프랑스 남부를 렌터카로 여행할 거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반대했다. 그녀에게 프랑스란 샹젤리제 거리의 화려한 불빛과 개선문의 여유였다. 수많은 박물관과 튈르리 공원의 산책길이 그림처럼 그려졌다. 하지만 여행이란 게 기대를 꺾는 과정이라고 했던가. 유람선을 타고 에펠탑 야경을 본 이후로 여행의 기대치는 내리막을 걸었다. 환상이 사라지면 현실세계의 먹고사니즘이 눈에 들어온다. 교통체증과 바쁜 일에 치여 고달파하는 파리 시민의 얼굴이 그때서야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놈의 생계를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난 그것을 여행의 묘미라고 생각하지만, 프랑스 인들의 눈빛엔 우리가 명동의 중국인들을 보는 그런 무심함이 뭍어 있었다.

궂은 날씨가 지긋지긋했던지 어머니는 흙빛으로 물든 센 강을 바라보며 한 마디 하셨다. “왜 쟤들은 우산을 안 쓴다니.” 나이 지긋한 노인부터 젊은 친구들까지 우산을 쓰는 법이 없다는 걸 어머니는 신기해하셨다. “그거야 파리니까. 파리지엥이랑 우산은 안 어울리잖아” 파리에서만큼은 뭐든 척척 대답할 줄 알아야 했던 나는 섣불리 대답을 해드렸다. 속으로는 똑같이 궁금했으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며. “저러니 냄새가 나지. 아 그래서 향수 산업이 발달했나 봐.” 지천에 깔린 개똥을 피하려고 하이힐을 신기 시작했다던 파리지엥이라면 그럴 수 있지. 근처 마트에서 5유로짜리 3단 접이 우산을 냉큼 사서 어머니를 향해 펴 들었다.      

9년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파리에서 재회한 제시와 셀린느, 영화 <비포 선셋>

여행 당시 쓰던 그 우산을 요즘에도 쓰고 다닌다. 내 인생에 더 이상의 파리는 없다면서 진절머리를 쳤는데, 또 이 우산을 보고 있자니 그립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 서울 하늘은 흐림과 우중충의 경계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다. 괜스레 멜랑꼴리 한 기분에 젖어 귀에 꼽은 이어폰을 빼서 가방에 넣었다. 평소 하던 대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영화 한 편을 보고 근처 스타벅스에 둥지를 틀었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재밌는 소설책을 읽으면서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기에 교보문고로 들어갔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집어 들고 전에 읽던 지점부터 읽기 시작했다. 소세키(욕 같네) 특유의 단문을 읽으며 마음을 아늑하게 하고 싶었다. 근데 막상 읽다 보니 내용이 너무 염세적이라 도통 집중이 되지 않았다. 삶과 소설을 동일시했던 일본의 사소설 작가들은 과연 비 오는 날씨를 좋아했을까. 그들은 늘 초여름의 비 오는 창밖 풍경을 배경으로 글을 쓴다. 일이 없어 한량을 자처하는 그들은 맘에도 없는 죽음을 떠올린다. 서점에서는 내 기분에 맞춰 ‘콜 포터’의 피아노곡을 틀어준다. “Lets do it, Lets fall in love.” 그래 비는 와도 사랑은 해야지, 여기서 뭐하는 짓이냐.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등장하는 '콜 포터'

이런 기분이 되고 나면 이미 마음의 평정을 깨뜨려버린 터라 사색도 독서도 좀처럼 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지난 유럽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펼쳐놓고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그것도 건성으로 넘길 뿐,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다. 사진 속 시간들은 분명 모든 걸 주고도 바꾸지 못할 애틋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기억은 다시 소환할 수 없기에 실감이 나지 않는다. 지금 사진으로 애써 건져 올렸던 기억은 몇 해만 지나도 백지처럼 하얗게 소멸할 것이다.      


프랑스에 살며 세계 각국의 미술관을 찾아다니길 좋아했다.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고, 그 순간을 영구적으로 만드는 명화들에 속절 없이 빠져들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도 좋지만, 후기 인상주의의 거친 붓질이 내게 더 잘 맞았다. 내가 찍은 스마트폰 화면 속 그림은 미사리 노천카페에 걸린 모조품처럼 조악하다. 어느 항구를 묘사한 그림 속에는 배와 돛대와 화려한 하늘의 구름과 검푸른 물이 손에 닿을 듯 그려져 있었다. 그 앞에 옷을 걷어 부친 어부와 소일거리를 찾아 거리를 배회하는 동네 건달들이 술병을 들고 설친다. 그들의 근육은 거친 붓질로 더 실감 나게 불퉁거리고 있다. 난 은근슬쩍 내 팔뚝을 만져보며 이제 여름이 다가오고 있음을 불안해한다.     


손보미 작가의 단편집, 그들에게 린디합을


그녀의 연락은 좀처럼 잘 오지 않는다. 그걸 기다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기다림은 쉼이 없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다시 독서에 집중한다. 누가 그랬을까 연애는 어른들의 장래희망이라고, 다시금 시작될 만남에서 얻게 될 생채기는 겁이 나지만 조심스레 구겨진 마음을 펼쳐놓는다. 아 진짜 오늘 집중 안 되네. 그때 창밖으로 흰 백합을 들고 가는 남자가 보인다. 그의 상기된 표정을 보며 이상한 위로를 받았다.

몇 달간 프랑스에 살며 읽은 한국 소설 중에 <그들에게 린디합을>이 있다. 소설 하나하나가 힘이 넘치고, 활기에 젖어 요란을 떠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손보미 작가는 확실한 재담꾼이다. 그녀는 유머와 재기, 가끔 삐죽거리는 위악적인 문장으로 작품에 정체모를 공기를 만든다. 난 묘하게 악한 미소를 띠며 그녀에게 동류의식을 느꼈다. 내 동년배 세대들이 이제 주류 작가가 되어간다. 내가 자라온 정서를 공유한 그들이 반갑다. 80년대 중반에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보잘 것 없는 인생들이다. 내가 이 소설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폭우>다. 그렇다 오늘 날씨와 어울리는 작품이다.     

그들에게 린디합을, 문학동네

폭우는 벌 떼같이 쏟아지는 소나기를 뒤로 하고 식당 안에서 혼자서 담배 한 대를 피며 창밖을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그는 레스토랑 사장 미스터 장이다. 그는 지금 안도하고 있다. 자신의 고요함에 관해, 이 침묵 속에서 소나기를 피하고 있음에.  

이 이야기는 경제적, 지적, 정치적 맞은편에 있는 두 부부에 관한 이야기다. 사회적 통념에 휘둘리는 약한 인간들은 모든 소설이 좋아하는 먹잇감이다.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에 휩싸여 실수를 반복하며 종국엔 몰락하고마는 익숙한 반찬이다. 이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저자는 액자구조를 가지고 온다. 이 삶의 치열한 광경을 거리를 둔 듣기만 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레스토랑 사장의 무관심함은 독자에게도 일정한 거리감을 선사한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이 평안한 삶에 감사”하는 고급 식당 주인은 끝까지 이들 부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심각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적절한 응대로 상대를 안심시킨다. 그는 이름 바 배운 사람으로서, 가게의 단골 관리 차원에서 좋은 청자가 되어준다. 커피 한 잔과 홀로 남겨질 정적을 그리워하며 일을 한다. 평탄한 일상, 그 속에 존재하는 파국의 징조와 불균질함은 그에겐 먼 얘기다. 섣부른 관계 맺기를 하며 늘 폭탄 같은 갈등을 앉고 사는 두 부부의 사연을 아침 드라마처럼 멀찍이서 관조한다. 남자는 속된 도시를 좋아하지만, 결코 주류라고 불리는 전형적인 패턴 안으로 뛰어들 마음이 없다.

     

소설에 대한 생각도 잠시, 비는 여전히 그칠 줄 모르고 야단을 친다. 허기가 져 빗줄기를 뚫고 가락국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폰에서 메시지 알림이 뜬다. “오늘은 그냥 집에 있기로 했어요. 뭐하세요?” 난 답장을 미루고 딴짓을 한다. 갑자기 나 자신이 보잘것없이 느껴져 다른 생각을 하기로 한다. 인간의 삶을 감싸는 감정의 충돌들, 그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균열의 징조들이 떠오른다. 이 시간 어디선가 일어날 범죄, 폭우로 물에 떠내려간 어느 가족,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한 광경을 떠올린다. 그릇 안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가락국수 국물을 말끔히 다 마시고 가게를 나왔다. 광화문 광장 한 구석에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무언가에 화가 나 열렬하게 무효를 외치고 있다. 또 반대편으로 눈을 두니 누군가를 추모하는 행사가 한창이다. 작은 우산을 펴 들고 빠른 걸음으로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신문로의 어둑한 골목을 향해 발만 보고 걸음을 재촉했다. 귀에서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카라얀의 지휘에 맞춰 흐르고 있다.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주말의 여유에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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