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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ul 15. 2018

당신의 시계가 가리키는 곳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 원제 Timekeepers, 사이먼 가필드 저

혼자 사는 내게 빨래는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다. 우선 양이 적다 보니 빨래를 돌리기가 애매하다. 좀 더 있다 해야지, 오늘 입은 옷만 더러워지면 해야지 하다가 속옷 함이 텅 비어버린다. 빨래는 세탁기가 하는데 어려울 게 뭐 있나 싶다가도, 수 십 년 동안 빨래를 하신 어머니가 여전히 세탁기 돌리는 걸 지긋지긋해하는 걸 보면서 반성한다. 오늘 아침에도 뭘 섞어 빨지 말라고 했는데, 뭘 손빨래하라고 했는데 생각하다 우물쭈물거린다. 세탁기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는 모든 가정주부들의 일이 줄어들 거란 기대가 팽배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 과거엔 며칠씩 입던 옷을 요즘엔 한 번만 입고 빤다. 조금만 얼룩이 묻어도 세탁통에 쉬이 던져버린다. 더 잦은 빨래와 더 잦은 건조의 세계, 우리 세탁기는 쉴 틈이 없다. 세탁기는 주부들의 가정일을 덜어주지 못했다. 갖춰지면 갖춰질수록 더욱 부산스러운 삶일까. 나이가 들면서 비싼 옷들이 많아졌다. 손빨래, 드라이클리닝, 다림질까지 하게 된다. 옷의 가치가 부가적인 노동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그러다 보면 대학시절 온갖 옷들을 너나 할 거 없이 세탁기에 처넣고 건조까지 시켜버리던 게 그립긴 하다. 시간을 물처럼 쓰면서도 한없이 낙관적인 미래를 그리던 게 엊그제 같다.

찰리 채플린, 모던 타임즈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 사이먼 가필드 저     


일요일 동네 카페엔 나처럼 노트북을 펴 든 이들이 다수다. 오늘 내가 카페에서 보내게 될 시간은 딱 네 시간이다.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라는 책의 서평을 적어보자. 말이 서평이지, 서평을 빙자해서 휘갈기는 잡글이다. 사실 이런 책이 가장 글쓰기 어렵다. 인문 교양서라는 책들은 거의 대부분 지식의 전달을 목적으로 한다. 승부의 관건은 학자적인 마인드로 쓸 것인가, 혹은 흥미 위주로 풀어 가독성을 높일까에 있다. 난 대체적으로 저널리즘에 기초한 교양서를 좋아한다. 그래서 ‘말콤 글래드웰’, ‘빌 브라이슨’, ‘볼프 슈나이더’의 책을 닥치는 대로 사서 읽는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읽기도 좋고, 문장이 쉽고 매끄러워 침대에서 읽어도 무난하다. 이 부지런한 양반들은 자신이 모르는 영역에 침투해서 온갖 정보를 취득한 후, 책을 엮을 수 있는 정보의 형태로 나열한다. 학자 출신의 ‘유발 하라리’, ‘제러드 다이아몬드’, ‘칼 세이건’, ‘스티븐 핑거’의 책이 무거운 마음으로 다가가는 학술서에 가깝다면, 이 기자들의 책은 지적 탐구에 관한 욕심보다는 호기심에 기초한 지적 허영의 충족을 우선시한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전달해야 한다는 의무감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우선 독자의 흥미를 잡을 수 있는 소주제를 뽑아 든다. 종국엔 팔릴 수 있을만한 제목을 붙이며 책을 포장한다. 사실 정보를 취득할 수 있는 학술서야 도서관과 구글 검색으로 모두 찾을 수 있다. 요즘 중요한 건 서 말의 구슬을 꿸 수 있는 날실의 존재다. 내가 좋아하는 저널리스트 출신의 작가들은 정보의 맥락을 알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현실세계와의 접점을 찾아내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를 쓴 ‘사이먼 가필드’ 역시 다방면의 분야에서 자신의 조사능력과 발군의 필력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책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 왼쪽은 한국판 표지, 오른쪽은 영문판 표지(영문판 표지 탐이 난다)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는 시간을 볼모로 삼아 ‘사이먼 가필드’가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들을 엮은 것이다. 시간은 얕은 매개에 불과하고, 그저 여러 시간 속에서 전전긍긍했던 사람들을 의식한다. 책의 원제는 타임키퍼다. 말 그대로 이 책에 등장하는 무수한 이들은 흘러가는 시간을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스위스 한 마을의 시계 장인부터 영국 기차의 발명과 시계산업 속의 마케팅 기법, 머이브리지에서 시작된 영화라는 환영까지 시간의 주변부를 어슬렁거린다. 물론 프랑스의 공화력처럼 다소 지루한 학술적인 내용도 있지만 대충 읽고 넘어갔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떨어지지 않아 좋았다. 대영박물관의 초창기의 모습과 시간을 아끼기 위해 음식문화를 없애는 사람들을 다룬 챕터는 흥미로웠다.


클로드 모네와 백 투 더 퓨처     


작년 한 해 동안 프랑스 사람들과 식사하며 그들이 식사시간을 인생의 기쁨으로 여긴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손이 가는 와인과 싱싱한 채소, 갓 구운 소고기와 애피타이저와 디저트를 챙기는 세심함. 장을 보고 요리하며 손님을 초대하고 긴 대화를 나누는 것까지 프랑스인들은 식사라는 카테고리를 확장한다. 요즘의 나는 어떤가. 한국의 한 도시에 사는 나는 하루 일과에서 식사라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뭐든 축약해내고야 만다. 자주 사 먹는 도시락, 일회용 그릇들과 배달음식들이 내 식탁을 채운다. 그렇다면 내가 누리지 못한 프랑스인들의 식사시간은 다 어디에 있는 걸까. 문득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난 그들이 느끼는 음식이라는 문화의 시간성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걸까. 식사시간을 아껴 획득한 두 시간을 영화에 쏟는 건 어떤 의미일까.

클로드 모네(좌), <인상, 해돋이>(중),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파리)(우)

영화와 요리에 관한 가장 유명한 도시 프랑스 파리에서 60유로짜리 식사를 해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저을 것이다. 영어자막도 없이 상영하는 프랑스의 낡은 영화관을 찾은 이라면 그런 소리 못하겠지. 히포크라테스가 남긴 무수한 명언 중 이런 말도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몇 달 전 파리 여행을 할 때 한 미술관에서 ‘클로드 모네’의 1872년 작 <인상, 해돋이>를 보았다. 그때 내 정말 예술은 긴 것이구나 생각했다. 전 세계의 무수한 이들이 인스타그램으로 모네의 그림에 해시태그를 붙일 때도,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의 그림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맞았다. 영속의 시간을 거쳐서도 그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며 희미한 새벽 햇살을 한 남자에게 비추고 있었다. 예술의 본질은 시간을 붙잡는 것이다. 그것이 늘 죽음을 기억하는 인간에게 영원불멸한 시간을 선물한다는 건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난 내 유년시절을 호출하는 영화로 늘 <백 투 더 퓨처>를 꼽는다. 3편까지 있는 이 시리즈의 비디오를 무수히 돌려봤다. ‘마이클 제이 폭스’가 여자 친구(제니퍼였나?)를 드로리안을 태우면서 여행은 시작된다. 과거로 돌아간 마티는 무심코 흘린 시간으로 전 지구가 누릴 미래에 강력한 파장을 미친다. 난 거실의 작은 TV 앞에 앉아 넋을 놓고 마티의 모험을 구경했다. 이때부터 타임슬립과 평행우주를 다룬 영화들을 좋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종탑에 걸린 시계에 매달리고, 미래의 부모를 옷장 안에서 엿보는 마티는 내 영웅이었다. 일요일 아침, 한 없이 긴 하루의 시간을 등에 지고 홀로 남겨진 나를 떠올린다. 그 시절의 난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백 투 더 퓨처의>가 그린 미래는 유년의 나를 생생하게 추억하게 돕는다.

영화 <백 투 더 퓨처>, 마이클 제이폭스가 여전히 그립다.

결국 시간을 선물하는 일     


사랑이란 결국 시간을 선물하는 일 아닐까. 늘 부족한 시간에 쫓기며 사는 난 연애할 시간이 부족하다. 누군가에게 이 짧은 하루의 일부를 선물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렇지만 날 바라보는 그녀의 맑은 눈과 헤어지기 아쉬워 보채는 말투에서 시간이 한없이 영원하게 느껴지진다. 그때 사랑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이다. 난 내 부족한 시간을 쪼개 그녀에게 선물한다. 지난 한 해 동안 무수한 유럽의 국가들을 여행했다. 그 하루하루가 빛처럼 빠르게 흘러갔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지금도 눈에 선한 아름다운 도시들이 가득하지만 결코 시간은 빠르게 흐르지 않았다. 과다한 정보의 유입량이 내 의식을 긴장하게 만들었으며, 시간은 끄트머리를 잡고 내 머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낯설고 부대끼는 시간들은 마치 시간이 유예된 것처럼 길게만 느껴진다. 기억에 두꺼운 자국을 남긴 그 낯선 공간 안에서 난 여행의 가치를 이해했다.

여행의 시간성은 책을 읽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늘 새로운 책을 읽기를 욕심내고, 그 진입장벽에 하품을 하다가도 다시 글 안으로 눈을 쏟는 건 왜일까. 그건 지적 호기심을 통해 내가 누릴 수 없는 시간을 선물 받는 것이다. 굳이 오슬로에서 청어요리를 먹지 않아도, 스위스 시계산업의 장인들을 만나지 않아도 그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독서와 극장, 연애와 여행은 이 부박한 삶이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들일 수 있는 시간적 낭만이 아닐까. 늘 반복되는 시간의 좌표평면을 탈출할 수 있는 오늘 하루의 선물이다.

영화 만추, 3일이라는 제한된 시간 동안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 영화 초반 시계를 선물하고 그것을 받아들며 카운트다운은 시작된다.

난 시간을 아끼기 위해 세탁소를 자주 애용한다. 가끔 우리 동네 세탁소 아저씨는 왜 물빨래해도 되는 걸 가져왔느냐며 통박을 한다. 이런 것까지 나한테 맡기냐는 표정이 날 위축시킨다. 세탁소 아저씨는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신용카드를 뺏듯이 가져간다. 이삼 주에 한 번씩 세탁소를 찾는데 그때마다 아저씨는 동남아 국가 출신으로 보이는 한 청년을 쥐 잡듯 잡고 있다. 종이가 구겨진 것 같은 표정으로 4옥타브 미 정도의 데시벨로 달달 볶아댄다. 거의 다 일에 관련된 내용인데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고개만 숙이고 있는 그 친구가 안쓰럽다. 내가 세탁소를 이용해서 아낀 시간은 어느 정도일까. 타국에서 홀로 떠나 와, 영문을 알 수 없는 동네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욕을 듣는 이 친구의 이름은 뭘까. 그는 이 시간을 나중에 어떤 형태로 기억하게 될까. 근처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난 검정 가죽 끈의 손목시계를 보며 서둘러 걷는다. 내가 사는 이 거리가 어쩌면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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