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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ul 28. 2018

기도하는 그 손을 잘라서

킬링 디어, The Killing of a Sacred Deer 2017

금요일 퇴근길, 기분 좋은 저녁이었다. 좋은 사람을 만나러 가는 저녁, 귀에선 pH-1의 신곡이 흘러나온다. 날씨는 더웠지만 해가 지자 마음이 포근하다. 지하철을 타기 전까지는 그랬다. 용산역에서 노량진역을 향하는데 지하철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다소 쉰 목소리의 기관사가 모두 내려달라고 방송을 한다.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떠밀리듯 열차에서 내렸다. 짜증스러운 얼굴로 저마다의 길을 가는 사람들.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응시하던 나도 다소 가라앉은 기분으로 밖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려는 내게 사람이 투신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이명처럼 그런 말들이 사람들 사이를 배회했다. 그제야 난 이곳이 노량진 역임을 알아차렸다. 그럴만한 곳에서 그럴만한 사고가 일어난 것일까. 무표정한 사람들에게 잠시간의 머뭇거림도 없다. 마치 이 밤의 일이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는 것처럼. 

킬링 디어, 속수무책으로 죽음에 내몰리는 보통 인간

선한 사슴은 누가 죽였을까.


누군가 내 종교관을 물을 때가 있다. 난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의도가 뭘까, 쩜쩜쩜. 3초의 시간이 흐르면 대답을 해야 한다. 그의 눈빛에 담긴 함의를 애써 무시한 체 어버버 어버버. 나조차도 이해하지 못할 무언가를 내뱉겠지. 어떻든지 간에 난 종교를 갖고 있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신을 믿지 않는 건 아니라고 덧붙이진 않는다. 

 가끔씩 신의 존재를 의식한다. 어제 퇴근길에 홀로 걷다가 네온 속으로 지는 노을을 바라볼 때 ‘그’를 떠올렸다. 마치 맘 속 만년설이 녹아드는 기분이랄까. 그럴 땐 매일 스쳐 지나가는 동네 슈퍼의 형태도 달리 보인다. 막 들어서려던 신용산역 7번 출구도 애써 모른 척 지나쳤다. 인간이 만든 신의 모조품으로는 미처 도달하지 못한 정념. 지금 주먹을 쥔 기분을 잊지 않으려고 가방 속의 책을 만져봤다.      

<킬링 디어> 악의 등장에 개연이 없고, 징벌의 힘은 절대적이다. 무구한 자연의 빛은 그들을 속절없이 비춘다.

영화 <킬링 디어>(The Killing of a Sacred Deer)는 한 털 많은 의사와 불편한 미소를 지닌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 영화는 신이라는 존재를 특이한 방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의사는 의료사고로 소년의 아버지를 죽였다.(실수인지 고의인지 혹은 사고인지도 알 수 없다) 소년은 아버지를 잃었기에 그를 아버지의 대용으로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부재와 상흔에 관한 이야기로 보인다. 하지만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 


자신의 아비를 죽인 의사에게 원망하는 마음은 없었을까. 영화는 이쯤에서 속내를 드러낸다. 평소 소년은 의사의 손이 곱다고 칭찬을 하곤 했다. 의사가 손을 잘 씻고, 손으로 환자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이며. 그리고 자신의 엄마를 의사에게 소개하여주며 노골적으로 가족이 되길 요구한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며 따라 하려고 노력한다. 그건 마치 신에게 재물을 바치는 죄 많은 인간처럼 보인다. 신의 힘에 경도된 신자처럼 취약하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전작, <더 랍스터>, 교배되는 커플들에 관한 우화

좋은 이야기란 어쩌면 익숙한 이야기를 전혀 마주친 적 없는 낯선 것으로 만든다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난 이 영화가 적극적으로 그리스 신화의 모티브와 성경의 구절들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오는 것에서 그 의도를 읽었다. 무엇을 낯설게 보이게끔 했는가. 이제 신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영화가 의사의 존재를 신의 위치에 올려놓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의사가 현대 의료기술의 실행자라는 측면에서 바라본 것일 뿐만 아니라, 그가 수틀리면 한 인간을 죽이는 것도 어렵지 않게 실행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우리가 의사를 선생님이라고 칭하며 어려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거엔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교사들의 설자리가 예전 같지 않은 것을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생각을 갖게 된다. 가르침의 영역에는 대용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고 믿는 반면에, 여전히 현대 의술은 의사라는 절대자의 도움 없이 발현이 불가능하다는 믿음(혹은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고학력자들이 어느 분야로 지원하는지 지켜보면 이 의심을 확신하게 된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힘의 도취, 누군가 머리를 조아리며 목숨을 갈구하는 기도하는 자세의 모습. 이 시대의 의료기술은 영생을 구하려는 무매한 인간들의 종교가 아닐까. 종교적 영생이란 성경책에 묻혀 잘 보이지 않지만, 현대 의술은 프로작처럼 우울감을 환희로 바꾼다. 경구 피임약으로 잉태할 생명의 가능성을 없애며, 발 잃은 자를 다시 걷게할 순 없어도 쉬이 상아탑에 오른다. 처방전을 쓰는 의사의 손은 그래서 때론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소년이 의사의 손을 어루만지며 복종하는 것도 이쯤에서 이해가 간다. 내 아비를 없앤 손이 아닌가, 여차하면 배를 내밀고 목숨을 맡길 손이 아닌가.     

<킬링 디어>, 생존과 모성,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아내, 니콜 키드먼

영화에서 의사는 소년에게 시계를 선물한다. 마치 신탁의 한 형태처럼, 째깍거리는 기계식 시계가 소년의 손에 채워진다.(신은 시간을 통제하는 걸까) 이 장면은 조금 높게 잡은 와이드 숏으로 촬영되었다. 우리는 조물주의 위치에서 그들의 신탁을 구경한다. 소년은 놀란 얼굴로 이 부탁을 용인한다.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담해진 소년은 의사의 병원과 집을 자주 찾는다. 처음엔 초대였지만 이후엔 노골적인 요구로 이어진다. 사슴 같은 와이프와 토끼 같은 자식들을 둔 의사는 결국 소년을 멀리하려고 한다. 그들의 거리감은 필연적인 징벌의 시작을 알린다. 신의 권한을 갖게 된 소년은 아비의 부재를 자신의 절대적인 힘으로 되갚는다. 재단 위에 올릴 재물을 스스로 택하라는 것. 그렇지 않으면 다리를 잃고, 눈에 피를 흘리며 거식증에 쓰러질 것이다.


이야기의 두 가지 갈림길     


난 이 영화를 보며 기계적으로 사회적 함의를 찾으려다 멈췄다. 솔직히 조금 피곤했다. 이 영화의 복수는 무자비할 뿐 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처벌이 있지만 그 작동법에 일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 소년에게 그런 힘이 생겼는지는 논외다. 느닷없는 정언명령이 나타났고, 의사는 이에 저항하기는커녕 자신이 믿는 현대 의술에 천착하다가 스스로 매몰한다. 그 비굴함과 처절함은 후반부로 갈수록 기괴해지고 끝내 우스꽝스러워지고 만다. 마치 누군가의 죽음을 잔치국수로 조롱하는 천박함처럼, 팔짱을 끼고 히죽거린다.

<킬링 디어>, 악을 숭배하는 소녀, 힘에 도취된 아이

영화에서 어떤 상징과 의미를 찾는 건 마치 버릇 같은 것이다. 그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는 인생의 복잡함을 편하게 받아들이려는 본능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는 마치 스스로 낯설게 보이게끔 의도하는 철없는 10대처럼 기행을 반복한다. 그 낯설음이란 마치 도처에 깔린 비극을 주어담는 천진한 태도다. 그 어떤 은유도 없는 후반부의 처벌과 고통의 시간들은 간명하다 못해 서늘하다. 윽박지르고 호소해 봐도 소년의 복수는 쉼이 없다. 딸은 다리가 마비되고, 아들은 눈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다. 


인생에 닥친 위기라는 것은 얼마나 허무맹랑한가. 오늘 아침 웃으며 떠났던 그녀가 주검이 되어 돌아오는 것처럼 황당하다. 현실의 비극은 전초도 없고 그 어떤 개연성에도 저항한다. 소설로 만들어지면 우연을 남발한다고 혹평을 들을 이야기가 매일 벌어진다. 하지만 그 비극의 하나하나가 당사자에겐 절대적 운명인 것이다. 호사가들은 늘 모든 일이 벌어진 후에 징조를 찾아내지만, 일이 벌어지기 전에 씨실과 날실을 엮어내는 사람을 보았는가. 란티모스의 영화가 낯설게 느껴진다면, 아무런 개연에도 집착하지 않는 비극의 연쇄작용에 있다.

킬링 디어, 뱀의 새끼처럼 혀를 날름거리는 소년

난 최근 어느 자리에서 장르소설과 순수문학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자리는 광장에 내몰린 어르신들에 관한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이해할 수 없는 가치에 목을 매는 어르신들을 바라보는 복잡한 속내가 드러나면서 대화는 무거워졌다. 누군가는 그들을 악으로 치부하고 넘긴다. 그 악행엔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꼰대질을 한다고 말했다. 틀탁이라는 말을 남발하다 태세를 바꾸곤 그들을 동정한다고 말하며 마무리한다. 집에 계신 연로한 부모님이라도 떠올렸을까. 

최근 사회학자들은 광장의 노인들을 과거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특성으로 읽기도 한다. 영광의 시대가 지워진 사람들은 시간의 실향민이 되어 울부짖는다. 그들의 속내가 어떤지와 관계없이 바라보는 자의 시선이 노인들의 역할을 각기 다르게 규정하는 것이다. 장르문학은 선과 악을 갈라내는 자의 이야기다. 하지만 순수문학은 한 인간의 속내를 파고들어 이 세계의 불균질함을 어루만지는 시도다. 섣부르게 누군가를 악으로 부리기보다는, 한 발 나아가 그 악에도 이유가 있을거라고 유심히 지켜보는 태도가 순수문학의 힘이다. 난 <킬링 디어>를 보며 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작가의 고민이 느껴졌다. 무지몽매한 사람들은 느닷없는 처형 앞에서 장르영화처럼 죽어간다. 왜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하는 의사는 끝내 답을 찾지 못한체 살아남았다. 


안토니오 그람시, 헤게모니     


가끔 노량진을 보며 도시속의 섬처럼 느낄 때가 있다. 벽에 둘러쌓여 빠져나가기 요원한 큐브처럼 몇 걸음 못가 주위를 둘러보게 만든다. 죽길 원하는 자에게 스크린 도어는 출구가 되지 못한다. 그건 무엇을 위한 대처도 아니다, 그저 광고판에 불과할 뿐. 얼굴을 새로 만들고, 매끄러운 유방을 지어낼 수 있다는 선전문구가 섬뜩하다. 버스를 타기 위해 나온 노량진의 표정은 무척이나 분주했다. 학원에 가는지 책을 가방 가득 넣고 서둘러 걷는 여자, 아직 학생의 티를 벗지 못한 청년은 노점상의 떡볶이를 맛있게 먹는다. 오랜만에 둘러본 노량진은 여전했다. 위협하듯 무서운 속도로 뚫고 지나가는 119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도 그들의 일상을 바꾸지 못했다. 혹시 저들 중 누군가 음습한 마음을 가지고 노량진역을 향해 걸어가진 않을까. 고위공직자의 공무원 특혜 채용에 관한 뉴스가 옥외 전광판에 떠오른다. 

옥중수고, 안토니오 그람시

헤게모니라고 했던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저서 <옥중수고>(Prison Notebooks)에서 계급 간의 관계를 도식화한다. 그가 말하는 헤게모니는 한 계급이 단지 힘의 위력으로써만이 아니라 제도, 사회관계, 관념의 조직망 속에 동의를 이끌어냄으로써 자신의 지배를 유지하는 수단이다. 다시 말하면 성공적인 헤게모니는 지배계급의 이해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종속 집단인 피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이것을 자연스러운 것, 또는 상식적이며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헤게모니의 기초는 단지 경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의 문화생활 속에 존재하는 통합적 형상이라고 읽는다.

그들의 헤게모니 안에서 마치 그것이 인생의 모든 것인 냥 교육되어 그 우물이 조금만 탁해져도 숨을 쉬지 못한다. 마치 대야에 갇힌 잉어처럼 그곳에서 팔딱거리다 맨바닥에 떨어져 질식되고 만다. 상품가치가 떨어져 죽의 생선의 악취는 노량진의 분주한 밤과 겹쳐진다. 새로 지은 노량진 수산시장의 화려한 네온이 새로운 시야를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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