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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ug 19. 2018

밤은 부드러워라

야간비행,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저, 1931

들이마시는 숨이 조금은 달가워진 요즘, 극장에 알프레드 히치콕의 작품들이 연이어 걸리고 있다. 텅 빈 평일 저녁, 미처 접하지 못했던 작품들을 예매했다.

한국에 필름 상영관이 사라진 이래 수많은 고전들이 갱생을 위해 아날로그라는 허울을 벗었다. 그 과정에서 아날로그의 물성은 자취를 감췄으나, 필름의 긁힌 자국까진 없애지 못한 체 여전히 한 시절을 증명하고 있다. 마치 인간의 주름살처럼 세월의 틈새를 엿본다. 이런 노력들은 은막의 거장에게 조금이나마 예우를 갖춘 건 아닐까. 명동의 한 멀티플렉스를 찾은 나는 극장을 꽉 채운 인파를 보며 주제넘은 감회에 젖었다.

레베카의 로렌스 올리비에는 자신과 염문설이 있던 비비안 리를 캐스팅하고 싶었으나, 히치콕이 싫어하여 신예 조엔 폰테인과 호흡을 맞췄다. 공공연하게 조엔 폰테인을 괴롭혔다고 알려졌다

무엇보다 고전의 재미를 아는 이들과 한 관에서 즐기고 있다는 흥분이 좋다. 이건 시네마테크에서나 느껴볼 직한 동류의식이다. 이 삭막한 도시에도 여전히 황금시대를 잊지 못하는 무리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상영작 레베카(1940년 작)는 히치콕의 첫 할리우드 진출작이라는 태그가 달려있다. 고로 무척 대중적이나 히치콕 특유의 인장이 적다. 매일 보던 것을 새삼스레 불길하게 만드는 히치콕 특유의 서스펜스도 시들하다. 다만 당대의 대배우 로렌스 올리비에와 신예 조엔 폰테인의 연기를 보는 즐거움이 더 컸다. 이야기를 하기 전에 뜸을 들이는 고전 할리우드 스타일과 괴팍하고 괴짜에 가까웠던 히치콕의 스타일이 섞여 생경한 맛을 낸다.


여러 상념에 젖은 사이 이 느슨한 영화는 맥 없이 끝을 맺는다. 나는 고작 3분도 되지 않는 엔딩 크레디트론 도저히 풀지 못한 회포를 간직한 체 종로 일대를 향했다.


우리가 고전에 기대하는 것들


소설 야간비행,  문학동네 표지가 참 이쁘다.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앙투안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1931년작)을 읽었다. 우리가 흔히 클래식이라 부르는 ‘고전’이란 오늘 이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다. 옛날 작품 치고는 재밌는 걸 감탄하며, 지금 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고개를 끄덕여봤자 재미가 없다. 마흔 살도 넘은 기아 타이거즈의 투수 임창용에게 완봉승을 기대할 수 없듯이, 히치콕에게 크리스토퍼 놀란의 <그래비티>를 바랄 순 없는 법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고전의 가치란 후대가 받아 든 예술적 자산에 지대한 공헌을 한 거장의 뒷모습을 구경하는 것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야간비행>이 50페이지만 더 길었어도 완주하기 어려웠을지 모르겠다. 고지가 저 앞인데 몸은 축 처지고 책장은 도통 넘어가지 않았다. 셍택쥐페리 특유의 고매한 영웅주의에 도통 마음을 주지 못한 나의 소갈머리를 탓해야지 뭐. 그래도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으며 끝을 보고 나니 기분은 좋다. 마치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침대에 누운 아비의 육신처럼 기분 좋은 뻐근함이 자리한다.     


생텍쥐페리 야간비행을 하며 지켜온 것


사실 소설보다 더 흥미로운 건 생텍쥐페리의 생애다. 스무 살 남짓해서 결혼과 등단을 동시에 하고 어려서부터 꿈꾸던 프랑스의 조종사가 되었다. 정비사·작가·군인·우편배달부·기자라는 직업을 다 가졌으나 미처 서른 중반밖에 되지 않았다니. 참으로 다사다난한 삶이라 할 수 있다. 짧다면 짧은 44년의 생애를 그 누구의 불로장생보다 치열하게 살아낸 셈이다. Antoine-Marie-roger de Sanint-Exupery, 그의 긴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생텍쥐페리는 프랑스의 잘 나가는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한 번도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적이 없다. 그는 프랑스 50프랑 지폐에 들어갈 만큼 온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그건 아마도 1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에 영광의 시기가 돌아올 때 왕성하게 활동한 탓이 크다. 책을 안 읽는 사람도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읽었을 정도니까. 그리고 44살에 정찰기를 타고 프로방스 해변에서 행방불명되었다. <야간비행>의 극 중 조종사 ‘파비앵’이 임무 중 교신이 끊긴 것처럼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자신이 쓴 소설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살았던 셈이다. 생텍쥐페리는 위험과 죽음을 낭만으로 끌어 앉고 나아가는 남자였다. 그의 이상과 삶의 기표가 고스란히 새겨진 소설이 바로 <야간비행>인 것이다.

1933년 영화화된 헐리웃 버전 야간비행 포스터

야간비행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건 조종사 파비앵이지만, 서문을 쓴 작가 ‘앙드레 지드’의 말처럼 눈길을 끄는 건 회사의 책임자 ‘리비에르’의 존재다. 전형적인 제국주의의 독재자를 상기시키는 리비에르라는 캐릭터는 늘 전쟁의 가치를 숭상했던 작가 생텍쥐페리의 성향과 고스란히 겹쳐진다. 요즘으로 할 것 같으면 꼰대 소리나 들을만한 워커홀릭이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돈 되는 일에 대의명분을 건 하수인이다. 조직의 이익과 인생의 가치를 동일시하고, 그에 부합하지 않으면 모두 제거하는 것이 이런 남자들의 방식이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자신의 독선적 기질을 대의를 위한 고독한 선택으로 둔갑시키는 불량 분자다. 막상 조직에 코앞의 이익을 들이대지만, 길게 보면 모두를 불행으로 이끄는 위험 분자다. 놀라운 점은 생텍쥐페리가 리비에르의 기질을 끝내 부정하지 않고, 마치 그것이 남자의 길인 양 독자들을 설득하고 있다는 의심이다. 개인주의와 삶의 자그마한 행복을 찾아 나선 2018년 사람들에겐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은 소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고전의 가치란 이해하지 못할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고 평생 돌아보지 않을 역사에 말을 거는 과정이다. 참을성 있게 들어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역사적 맥락을 받아들인다. 1931년 전간기의 유럽은 활황을 맞은 자본과 예술의 낭만이 사람들을 고조시킨 말 그대로 황금시대였다. 우후죽순 생겨나는 이해받지 못한 가치들이 사람들을 획책한다. 생텍쥐페리는 주위를 쓱 둘러본 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이 위험천만한 야간비행에 기꺼이 낭만을 던졌다. 작은 가치들을 뭉개버리는 그의 영웅심리는 보수적인 프랑스인들을 감화시켰다.      

붉은돼지를 연출한 미야자키 하야오는 공공연히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에서 작품의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제국주의 찬양의 혐의도 피할 수 없었다.

생텍쥐페리의 소설들이 자전적 경험과 주변부 사람들에 영향을 받은 건 우연이 아니다. 모든 행동주의 문학가처럼 이성의 시대를 짊어진 젊은 예술가는 오로지 눈으로 관찰 가능한 것에 문학적 기반을 두었다. 자신이 직접 숨을 들이마시며 느낀 것에만 펜을 들었다. 비행을 하며 느낀 흥분과 어스름 저녁에 이륙 간 엄습하는 심장박동이 그를 추동하는 예술적 원천이었음이 분명하다. 추상적이고 사변적으로 흘러가는 예술 기조를 못마땅해하며, 코앞에 닥친 가치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야간비행> 읽는 중 어느새 리비에르의 비장한 선택 앞에 심장을 뺏긴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아마도 작가가 가진 야심이 당대에 혼란을 잠재울만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나 역시 스스로 감응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세상에 알게 모르게 생텍쥐페리처럼 조종사 출신의 작가들이 꽤 된다. 내가 아는 작가만 하더라도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 로알드 달, 리처드 바크 같은 대문호들이 있다. 나는 높은 하늘에서 타들어 가는 노을을 등지고 이야기를 상상하는 작가들을 상상해본다. 그건 마치 세속적 가치를 뛰어넘은 신의 영역에서 세상을 그려내는 조물주의 마음은 아닐까. 화가들이 세상을 네모난 틀에 영속시키는 사변적인 존재라면, 하늘을 나는 작가들은 어쩌면 명민하게 세상을 갈고닦는 초월적 존재는 아닐까. 그들을 이상화하고 어쩌면 대지에서 저 하늘로 몰아낼수록 인간으로의 삶은 피폐해졌을지도 모른다. 극 중 리비에르가 그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터놓지 못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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