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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ug 26. 2018

낯선 여름, 문을 두드리다

영화 <마더!>, Mother!, 2017

며칠 전 한참을 뒤척이다 잠에서 깼다. 의식은 한참 전에 돌아왔지만 몸을 움직이기가 버거웠다. 어제 늦은 시간 들른 헬스장에서 깜냥에 걸맞지 않은 쇳덩이를 들다가 삐끗한 모양이다. 정작 그 순간엔 느끼지 못했는데 통증은 오늘 아침에야 날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내 수컷의 기질이 옆자리의 건아들과 경쟁을 부추긴다. 나 스스로도 놀라는 이 미련함에 아연하다. 피식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이 시간에 날 찾는 이가 누구란 말인가. 조금 기다리면 가겠지 하는 마음으로 다시 눈을 감고 헛된 상상에 집중했다.

낯선 이의 방문은 이 집을 소돔과 고모라의 현생으로 뒤바꾼다. <마더>,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세 번 넘게 벨소리가 울리다 이제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난 어려서부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극심한 공포를 느끼곤 했다. 학교 다닐 때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다. 맞벌이하는 부모님과 밖으로만 도는 형은 집에 나타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보지도 않는 TV를 켜놓고 기억도 나지 않는 짓거리를 했다. 친구도 없고,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없었다. 어둠이라는 포근함에 안겨 정적과 마주했다. 그건 외로움과는 다른 아늑한 고요였다. 그런 시간을 깨우는 것은 바깥세상의 침범이다. 불시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 몸이 얼어붙곤 했다. 난 그 난폭한 소리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내 세계를 해치려는 낯선 타자의 방문을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텅 빈 벽지만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이렇게 나이가 먹어서까지 그 시간들은 유폐되어 이식된 걸까.

감독 대런 애러노프스키, <레퀴엠>, <블랙 스완>, <더 레슬러> 등 다수

오늘 아침도 유사한 두려움에 멍하니 침대 위만 바라봤다. 어쩔 줄 모르던 나는 조심스럽게 렌즈로 문 밖을 내다보았다. 검은 옷의 남자였고, 키가 컸는지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검은 가방을 들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그는 이상하게 몸을 흔들거렸다. 외판원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 누구도 내 집을 방문할 리 없다. 손에 우산이 들려있는 걸로 봐서 밖에 비가 오는 모양이다. 어젯밤 태풍이 왔다는데 깜빡 잊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내가 문밖을 내다보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의 두드림이 멈췄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내가 문 앞으로 다가왔다는 걸 알기라도 하는 듯, 내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손바닥 안에 두고 지켜보고 있다는 듯. 그럴 리 없겠지만 견디지 못한 나는 몸을 돌려 휑뎅그렁한 집을 바라보았다. 냉장고 한 구석에 어떤 존재라도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요 며칠 동안 나는 혼란스러워져 있었다. 솔직히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삶의 회로 안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런 때도 있는 법이다. 손에 잡히는 이유를 건져 올릴 수 없지만, 만물의 메커니즘이 교묘하게 뒤틀린 상태에서 부유하고 있다. 마치 대런 애러노프스키의 영화 속 인물이 된 느낌이다. 그의 영화 <마더>는 낯선 방문자가 집에 들이닥치며 벌어지는 하루 종일을 다룬다. 마치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처럼 낯선 이의 방문이 하루를 녹록지 않게 한다. 아니 오늘 하루에 그치지 않고 인생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언뜻 보면 알아차릴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지만, 시간이 흐른 후 탄식과 함께 드러난다. 이런 느닷없는 균열은 대런 애러노프스키식 혼란과 아주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카버는 고독한 방 안에서 회한에 젖는다는 것이고, 애러노프스키는 마치 스포츠 중계처럼 대놓고 일상의 곳곳에서 폐허의 악다구니를 친다.

주연보다 나은 조연진, 미셸 파이어와 애드 헤리스, 영화 <마더>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해보자. 영화엔 한 부부가 등장한다. 남자가 스무 살쯤 많아 보이고(물론 하비에르 바르뎀이니까), 여자는 무척 미인이다.(역시 제니퍼 로렌스니까) 남자는 저명한 시인으로서 영감의 원천을 찾기 위해 시골의 성 같은 집을 세운 사람이다. 이 저택은 남편이 결혼 전부터 살던 집인데, 한때 큰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었다. 하지만 어린 아내의 헌신으로 되려 더 멋들어지게 재건되었다. 어린 아내는 우리의 통념처럼 남편의 예술적 저력에 존경을 표하며, 순종적인 아내의 역할을 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가끔씩 비치는 알 수 없다는 표정과 남편의 의도를 따라가지 못해 서투른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의 지적 차이가 갈등을 유발할 수 있음을 어림짐작하게 한다. 여자는 모든 사물과 낯선 사람들을 골똘히 보며 잘 해보려고 다짐하지만, 상황은 마치 날카롭게 솟아난 돌기처럼 그녀를 옥죈다.      

어느 날, 부부의 집에 낯선 손님이 찾아온다. 자신을 의사라고 소개하는 남자(에드 해리스)는 하룻밤 신세를 지길 부탁한다. 내키지 않는 여자는 거부하려고 하지만, 시인인 남편은 살가운 그 남자에게서 뭐라고 발견했는지 쉬이 집에 들인다. 여자는 불안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달걀 한쪽 먹여 보내려고 하지만 이 의사 새끼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의사의 다른 가족들이 연달아 찾아오며 아내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그 반면 남편은 아이디어의 고갈로 시를 쓰지 못하다가 이들의 등장으로 마치 구원의 한 조각을 집어 든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영화는 점입가경으로 치닫는 혼란을 중계한다. 여자의 눈을 통해 마치 신경증에 걸린 사람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에 이물감을 느낀다. 내러티브는 보편적 예상을 단 한 번도 답습하지 않고 엇나간 길로 달려 나간다. 그걸 지켜보는 내 손바닥도 흥건해지고, 자리는 바늘방석처럼 욕지거리가 튀어나온다. 영화의 이런 불편함은 생의 이면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힘의 원리가 있다는 확신에서 나온다. 그건 종교적이며 어쩐지 맹목적이다. 난 행복이라는 디펄트 값을 고수하려고 유지하지만, 생은 음습한 구석을 드러내며 내 평온한 일상에 생채기를 낸다. 거기에 손에 잡히는 이유란 것이 있을 수 없다. 그걸 견디고 바라보고 글로 적어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항일 뿐이다.

황현산 선생의 <밤은 선생이다>, 양장본으로 살 걸 그랬나봐

복잡하게 꼬인 생각에 도리질을 치다 다시 문득 생각이 나 문 앞에 섰다. 남자는 이제 사라졌을까. 다시 조심스럽게 눈을 렌즈에 대 보았다. 그 남자는 거기에 없었다. 그 일로 인해 나는 괴로운 기분이 되었다. 어째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난 낭패한 기분으로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대충 머리를 말리고 침대 앞에 서니 어젯밤 읽던 책이 보였다. <밤은 선생이다>, 황현산 선생의 산문이다. 하루에 한 두 개의 꼭지씩 꾸준하게 읽었다. 얼마 전 선생님이 돌아가신 이후 오래전에 대충 훑어봤던 책을 다시 꼼꼼히 읽고 있다. 그의 죽음이 무엇으로 인해 날 울컥하게 했는지 잘 모른다.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 그가 떠나가고 글만 남았다는 실감에 몸이 저렸다. 그가 곡진하게 세상을 향해 펜을 든 것처럼, 죽음도 활자처럼 어떤 영속성 안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치 중간에 툭 끊어진 음계처럼 선생은 지상에서 사라졌다. 출판사와 서점들은 선생의 저서들을 모아 두고 이벤트를 하는 모양인데, 난 그것들과 어울리지 못한 체 선생의 글을 정적 아래서 읽었다. 버스 안 창밖에서 본 서울 하늘 날씨는 한 세계의 생성과 소멸, 자연의 분노와 절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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