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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Sep 09. 2018

여러 가지 고독들로 둘러싸인 고독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저

꽤 오랜 시간 전화영어 수업을 했다. 하루 10분, 정해진 시간에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 속 그녀는 늘 반가운 목소리로 날 맞이한다. 늘 일관된 톤으로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묻는다. 내겐 하루가 저물 무렵이지만, 그녀에겐 이른 아침일 것이다. 대체적으로 그녀의 질문에 허둥지둥 대응하다가 끊기고 만다. 뚜뚜뚜, 가끔은 그녀가 자기 얘기를 해주기도 한다. 오늘 아침엔 커피를 끓이러 일어나다 리모컨을 떨어뜨려서 남편을 깨우고 말았다며, 어젠 아이가 주스를 급히 먹다가 체해서 하루 종일 고생했다며.

무라카미 하루키 씨

난 전화를 내려놓은 후 눈을 감고는 그녀의 어두운 집과 한적한 골목을 떠올린다. 구글맵으로 샌디에이고의 어느 낯선 동네를 찍어, 로드뷰를 보며 그녀의 출근길을 상상하기도 한다.(관음증인가) 그녀가 키우는 레트리버의 모습을 찾으려고 마우스를 쉭쉭 젖는다. 온화한 기후와 서민층 동네 특유의 벽돌 같은 집들을 쌓아 올린 샌디에이고는 내 인생과 무관한 곳이지만, 그녀로 인해 난 이 도시를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그녀의 삶과 드넓은 샌디에이고에 마음을 준다.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선선한 지중해성 기후를 가진 이 도시의 해안도로를 걷는 나를 상상한다. 상상 속의 그는 내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결코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마치 또 다른 나의 삶을 떠올리는 것과 같다. 그런 상상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면 나는 글을 쓴다. 일말의 가능성이 현실의 누군가에 의해 일축되기 전에 스케치하듯 삶의 또 다른 곳에 조명을 비춘다.

      

하루키의 일상


난 가끔 하루키의 하루를 노트에 적어본다. 아침엔 일어나서 조깅을 한다. 조깅이 끝나면 간단하게 두부와 야채샐러드를 먹고, 네 시간가량 집필에 집중한다. 일찍 끝났다고 쉬이 펜을 내려놓진 않는다. 정량의 글자를 새겨 넣는 게 중요하다. 어느새 시간은 늦은 오후가 된다. 늘 앉던 편안한 소파에 앉아 재즈나 클래식을 틀고 독서를 한다. '존 콜트레인' 보다는 '마일즈 데이비스'를 듣고, 가끔 술이 먹고 싶을 땐 스카치위스키를 한 잔 한다. 얌전한 고양이가 옆에서 목을 긁고, 저물어가는 여름을 품고 해는 어느새 자취를 감춘다. 저녁엔 생선구이나 꼬치를 먹는다. 그는 교토 외곽에 살지만, 도시 속 개츠비들의 화려한 삶과는 거리를 둔다.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부자지만, 저녁은 늘 텅 비어있다. 그가 구축한 삶의 리듬이란 매일매일 똑같이 여전히 그대로인 것 그 자체다. 이제 저녁 9시다, 잠이 든다.

하루키의 메가 히트작 <상실의 시대>를 원작으로 한 영화 <상실의 시대>, 둘 다 원제는 Norwegian Wood

어쩌면 하루키는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사람일 것이다. 그의 인터뷰를 읽다 보면 이 재미없는 아저씨의 소설을 읽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왜냐하면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 평범하기 때문이다. 마치 하루키가 어릴 적 잃어버린 쌍둥이 동생처럼, 하루키와 똑 닮았지만 다른 환경에 놓여있을 뿐이다. 하지만 인물의 기질은 바뀔 수 없는 법이다. 비슷한 선택, 유사한 취향, 똑 닮은 루트로 모험을 떠나는 것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재미없는 아저씨의 소설을 무수하게 읽었다. 다 세기도 귀찮을 정도로 많이 읽어버렸다. 가끔 나는 나 자신을 하루키 세대라고 말하곤 한다. 처음 소설에 재미를 붙일 무렵 서늘한 도서관의 귀퉁이에서 그의 책을 읽었다. <상실의 시대>, <해변의 카프카>를 읽으며 처음으로 두꺼운 책을 떼는 맛을 알았다. 장편소설을 읽을 만큼 읽자, 마약 같은 에세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글쓰기, 정확하게 말하면 작가라는 직업을 위해 하루키가 취하는 모든 제스처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쉴 땐 어떤 작가를 읽는지, 다른 예술적 취향들은 뭐가 있는지, 정말 달리는 것 말고는 달리 하는 게 없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심지어 뭘 먹고살며, 어느 동네에서 어디를 산책하는지를 파파라치처럼 파헤쳤다. 그렇다 난 명백히 하루키적 일상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올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게 되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이 책을 읽고 나서 생각한 것이 있다. 아 우리 하형은 돈을 참 쉽게 버는구나. 몇 년 전에 <잡문집>이라고 진짜 잡문들을 다 모아서 몇 만권을 팔더니, 이제는 하다 하다 자신이 쓴 에세이들을 총 정리해서 소설론으로 펴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이 책은 마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하고 싶은 이야기>, <위스키 성지여행>, <하루키 에세이 전권>, 여행기 <먼 북소리>를 짜깁기한 책처럼 보인다. 또 다른 생각은 하루키는 흘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깨달음이다. 흔한 SNS도 일절 하지 않는 그는 대외활동도 최소화하고 오로지 글쓰기로 자신을 반영한다. 그는 어쩌면 작가로서의 궤도에서 이탈하는 모든 행동을 멀리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이 정도의 명성을 가진 이라면 어쩔 수 없이 흘리는 흔한 실수가 거의 없다.(물론 예루살렘 수상과 연설은 예외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 존경할만한 자제력이며, 또 다른 의미론 하루키라는 사람 자체가 일상의 리듬 안에서 쉬이 벗어나지 않으려는 샐러리맨과 다르지 않다는 방증이다. 온 세상이 그를 노벨상 후보로 치켜세우고, 책을 내기 전부터 한국에서 백만 부 이상 팔아치웠지만 스피커는 끝내 울리지 않았다.(어떻게 그렇게 팔아줬는데 한국을 한 번도 안 올 수 있어 하형!)

그렇다면 그가 세상과 담을 쌓고 만든 이야기는 대체로 어떤 것일까. 난 한 마디로 ‘회한’의 이야기라 정의한다. 그건 내가 택하지 않은 또 다른 나를 상상하는 마음이다. 마치 도플갱어처럼 같은 얼굴을 하지만, 정작 삶에선 마주칠 리 없는 평행우주 속 이야기다. 가능성으로서의 나 자신, 장소나 시간이 바뀐다면 이렇게 될지 모른다고 여겨지는 나 자신의 플롯이다. 어쩌면 그건 나라는 인간을 검증하고, 나와 타자 혹은 세계와의 접점을 확인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장편소설 <1Q84>에서 고속도로의 귀퉁이의 쪽문을 타고 넘어간 또 다른 달의 세계처럼, 보이는 것은 같으나 결코 현실과는 거리를 둔 또 다른 일상이다. 그 흔한 메타포들은 하루키적 인물을 통해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한다. 그 고유의 인장이란 이루어질 수 없기에 마음이 애달프고, 나와 멀지 않기에 애틋해지는 회한의 도시다. 일상의 빽빽함에 지친 도시 속 나는 하루키가 그린 가능성의 세상을 읽으며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시간을 확장시킨다.

하루키의 단편 <토니 타키타니>를 원작으로 한 영화 <토니 타키타니>

하루키의 인기 비결엔 평범한 인간이 하는 이야기라는 점이 있다. 나와 같이 지루하고 매력이 없는 이 사람은 늘 집안에 틀어박혀 있다. 하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자신의 영혼을 위로해 줄 현재의 여인이 있고, 꼴에 과거에 자신이 사랑했으나 잃어버린 지나간 여인이 있다. 현재의 여인은 그에게 부족할 것이 없지만, 이 평범한 남자는 과거의 여인이 남긴 생채기를 치유하지 못하면 늘 골골대며 살 수밖에 없다. 이 상처 난 가슴을 지닌 남자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서, 우리 보통 사람의 일상이 그런 것처럼 오늘의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 결국 결핍을 매우고, 제자리를 다시 찾은 남자는 어제와 다르지 않은 균일한 세계 속에 머문다.


마치 아웃복싱을 하는 권투선수처럼     


하루키는 가벼운 사람이다. 마치 아웃복싱을 하는 무하마드 알리처럼 날렵한 문장을 가지고 있다. 단문과 쉬운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은 어디에 메이는 법이 없다. 이는 현실감을 내려놓은 문장에 기인한다. 현실에 천착하고, 대의에 매달리면 타이슨처럼 주먹은 묵직할지 모르지만, 나중엔 귀가 잘려나갈 것이다. 헤비급의 인파이터는 주먹 한 방에 집중하느라 경기 내용에 손상을 입게 된다. 마치 반전에 집착하던 <식스센스> 이후의 '나이트 샤말란'처럼, 반전 빼면 아무것도 없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범죄 소설처럼 하품을 자아낸다. 하루키는 세상과 살짝 거리를 두고 주류사회의 주변부를 배회한다. 자기 내면이 원하는 이야기를 쓰고, 개인의 취향이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는 도구가 된다. 오늘이라는 날 속에 또 다른 새로운 날이 생겨나지만, 결코 그 하루는 기시감을 띈 체 공기를 부유한다.

이런 가벼운 문장이 가진 반복성은 그를 마치 소설 잘 쓰는 기술자로 느껴지게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소설가의 왜곡된 이미지와 반대 지점에 하루키가 있다. “퇴폐적으로 살면서 가정 따위는 돌보지 않고, 아내의 기모노를 전당포에 잡히고 돈을 마련해 때로는 술에 빠지고 여자에 빠지고, 아무튼 마음 내키는 대로 살면서 그러한 파탄과 혼돈을 통해 문학을 자아내는 반사회적인 문인, 그런 고전 소설가의 이미지.”가 아닌, 성실하게 타자기를 두드려 정량 정속으로 작업량을 채워가는 직업인의 고된 노동이 있다. 그를 보면 자화상으로 유명한 사진가 척 클로스의 명언이 생각난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난 그저 일하러 갈 뿐이다.” 하루키는 기상천외한 섹스신만 빼면 모든 것이 평균적인 남자의 모험을 적는다.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한 영화 <버닝>

내 삶 속엔 흥미로운 소재란 게 없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 흔한 일상,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을 것들이 흩어져 있다. 내가 글을 쓸 때 손에 꼽아들 수 있는 소재들이란 모두 변변치 않다. 세계문학을 다 읽고 나면 작가의 대단한 인생을 응축한 연보가 있다. 이번 달엔 20세기 초에 태어난 두 작가 ‘생 택쥐페리’와 ‘뮤리엘 스파크’의 인생을 엿보았다. 거기엔 마치 위인전의 전개처럼 온갖 세상 곡절을 모두 통과한 대단한 삶이 있었다. 두 번의 전쟁과 아직 검증되지 않은 가치들이 출몰하는 혼돈 속에 두 사람은 작가가 되었다. 마치 이 정도 인생 곡절 없이 작가가 되긴 무리라는 듯 기가 죽는다. 와 이런 인생이라면 평생 소설의 소재가 끊이지 않겠네, 좀 부러운걸. 난 별 볼일 없는 나의 삶을 매주 노트에 적는다. 매번 같은 이야기만 되풀이하는 삼류 작가가 된 기분으로 블로그에 글을 올린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영화 한 편을 앞세우고, 소설 속 인물에 날 대입하여 인생을 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내게 하루키는 어쩌면 거창한 대의명분 없이도 글을 쓸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손에 잡히는 가치를 최대한 멀리한 체, 의미에 구멍을 뚫어 허공을 바라보게 한다. 한 줌의 바람과 한 뼘의 햇빛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는 듯 현실의 대지에서 까치발을 들고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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