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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19. 2018

그렇게 간단치가 않아

영화 영주, Youngju, 2017

분주한 출근길에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들 앞만 보고 걷는다. 두리번거리는 나는 미세먼지 가득한 도심을 헤치고 나아가는 얼굴들을 유심히 지켜본다. 난 이 도시의 어디쯤에 좌표를 찍고 사는 걸까. 세상이 온통 잿빛으로 물듦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뉴스를 듣는다. 그들도 나처럼 지금 여기가 어디쯤인지 궁금할 테지. 마스크를 끼고 거무튀튀한 얼굴을 가린 1호선 사람들은 말이 없다. 그들은 마치 간첩이 접신하듯 이어폰에 자신을 파묻고 세상의 이해관계를 살핀다. 왜 그 청년은 사람을 죽였을까. 왜 그들은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했을까. 그러던 중 다소 가벼운 한 외신 보도가 내 귀를 붙들었다. 내용인즉슨 호주 시민들이 핫도그에 양파와 소시지 중 무엇을 먼저 얹을지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는 보도다. 인도양을 옆에 낀 거대한 대륙은 고작 핫도그 때문에 싸우는구나. 어쩐지 마음이 아늑해진 나는 호주 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어떨까상상한다. 모르긴 몰라도 소돔과 고모라의 현생을 보았다며 호들갑을 떨 테지.


핫도그와 예송논쟁     


이 핫도그 논쟁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떠올리게 했다. 스무 권이 넘는 분량을 가진 조선왕조의 굵직한 사건들을 구경하며 내가 주목한 건 작은 갈등이 만든 파국의 여파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예송논쟁이다. 현종이 즉위(1659년)할 즈음 자의대비의 상례 절차인 상복을 두고 서인과 남인은 각을 세운다.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되는 일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 이 논의로 수년의 국력을 낭비했음은 물론 조선 왕가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송시열 같은 꼰대가 왕보다 더한 권력을 누리고, 시대에 꼭 필요했던 실학자들은 명분이라는 장막에 갇혀 허우적댄다. 핫도그 논쟁과 예송논쟁은 그런 의미에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할 말은 많은 대표 사례라 할만하다.

예송논쟁의 본질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파생한 사건 이면의 맥락이 핵심이다.  핫도그 논쟁이 빵 위에 양파를 위에 넣으면 바닥에 떨어지기 쉬워 인명피해를 유발할 수 있다는 논의로 시작됐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대척점에는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 일일이 정하다 보면 세상은 썩어빠진 규제로 가득 차리라는 우려가 공존한다. 사회적 논의가 어느 지점까지 다가가야 하는가에 문제에 있어서 호주 국민들은 핫도그를 볼모 삼아 거리를 측정한 것이다. 뭐 그깟 것까지 일일이 따지냐며 면박을 주는 게 아니라 이 결정이 미칠 향후의 영향까지 살피는 모습이다. 이는 그 자체로 내겐 문학적 사고의 영역이다. 예송논쟁 역시 이 씨 가문의 세습 왕정이 성리학자들과의 권력다툼으로 심화되면서 그에 따른 갈등이 표출된 사건이다. 신하들이 왕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붕당정치의 근간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세상일이라는 게 우리의 생각만큼 단순 명료하게 풀리지 않음을 보여주는 역사의 한 단면이다.

얼마 전 이준익 감독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영화 <사도>에서 여러 인물을 통해 다층적인 조명에 감탄한 바 있다. 연산군을 미친놈 취급하고, 영조를 조선의 중흥을 이끈 명군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만드는 건 쉽다. 하지만 기존 관념을 뒤집기 위해서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인간은 알던 그 사실 그대로를 좋아한다. 기존의 관념을 뒤집어놓는 텍스트엔 불편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준익은 사도를 둘러싼 여러 인물의 입장에서 각각에 일류 변호사를 붙여준다. 사도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혜경궁의 속내와 끝내 사도를 죽이길 원했던 사도의 어미 영빈 이 씨,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낙담하는 아버지 영조와 큰 충격을 받는 와중에도 이 사건의 여파를 한시도 잊지 않았던 정조 이산까지. 하나의 갈등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그 갈등의 맥락을 앎으로 해서 역사는 인간에 대한 이해로 나아간다. 역사는 그렇게 각 인물이 퍼뜨린 시실과 날실을 통해 전후관계를 맺어간다.


영화 영주     


얼마 전 한 시사회를 통해 영화 <영주>를 보았다. 영화에서 곧 성인을 앞둔 영주는 부모님을 사고를 잃어 동생과 같이 힘겨운 삶을 버텨낸다. 배우 김향기의 얼굴이 어른과 아이 어딘가에 걸친 묘한 지점이 있어 과도기 특유의 혼란스러움이 그득하다. 매일 사고나 치는 동생을 보살피며 알바까지 뛰느라 인생이 무척 힘겨운 영주는 위기에 봉착한다. 동생의 합의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통장 잔고가 바닥난다. 설상가상으로 대출사기까지 당하고 평소 자신을 도와줬던 고모까지 등을 돌리자 더 이상 매달릴 수 있는 곳이 없다. 결국 영주는 부모를 죽게 만든 교통사고의 가해자를 찾아 나선다. 그녀의 속내는 뭘까.  

처음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 다짜고짜 찾아가서 돈을 더 달라고 요구할 심산이었다. 우리는 부모가 죽었는데 너는 과실치사로 집행유예를 받아 잘 먹고 잘 사니 내게 돈을 달라! 마음속 이면에는 직간접적인 복수를 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 증거로 영주는 가게에 몰래 들어가 금고를 뜯어 달아나려고 한다. 하지만 착한 영주는 오히려 가해자인 남자에게 선의를 베풀고, 그들 아래서 일을 하며 안정을 찾는다.

예측과 달리 검소한 삶에 건강마저 좋지 못한 가해자를 보며 영주의 속내는 복잡해진다. 영주는 이들 부부의 마음에 동화되기 시작한다. 가해자 역시 뜻밖의 살인에 괴로웠으며, 목숨을 끊고 싶을 정도로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는 사실은 위로가 된다. 이들 부부에게 코마 상태의 아들이 있고, 작은 두부가게를 운영하며 소박하게 산다는 점도 영주의 마음을 녹인다. 무엇보다 부모가 없는 영주에게 정을 주고 그녀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부부는 자존감이 무너진 영주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영화 영주, 배우 김호정은 붙들고 놓아주는 감정의 연기로 열연한다

두부를 만드는 부부      


감독은 영주가 두 부부를 지켜봤고 그로 말미암아 증오 대신 따듯한 무언가를 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그 자체로 선뜻 이해에 가닿지 못한다. 왜냐하면 영주에게 크나 큰 포용력을 주는 건 그 자체로 캐릭터에 대한 횡포이기 때문이다. 영화엔 영주의 마음을 붙드는 하나 더가 필요했다. 난 영주가 어렵사리 다가간 부부 밑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관객 모두가 영주의 복수에 위태로운 마음을 갖는 순간에 그녀는 일을 한다. 이른 새벽부터 뜨듯한 두부를 만들고, 잘게 썰어서 가게에서 파는 모습은 따듯한 마음을 선사한다. 오후엔 단골가게에 배달을 하고, 저녁 영업 마감시간이 다가오면 그 두부들을 반찬삼아 밥을 먹는다. 그렇게 매일 건실한 노동의 현장에서 안온함을 느낀 영주는 복수를 잊고 머무름을 택한다. 난 영주가 분명히 복수의 마음을 접은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잊었다고 믿는다. 이는 영악하게도 자신의 미래를 위한 계산적 고려이기도 하며, 전적으로 패배한 삶의 리듬을 되찾으려는 본능이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의 문제에 있어서 영주가 얻어 낸 결기는 어디에서 오는걸가. 우선 부부가 구축한 삶의 양태에 호감을 느낀다는 연출이 있다. 최저임금의 아르바이트와 라면을 삶아먹는 삶의 부박함에,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동생의 위태로움은 영주를 집에서 몰아낸다. 영주는 오히려 잘 구축된 노동의 일상에 머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영주는 부모의 죽음으로 가난보다 가혹한 척박한 일상을 부여받았다. 두부 가게 가해자 부부는 영주에게 정상적인 인간의 루틴을 보여줬고, 일상의 질서가 고통 속의 인간에 기름칠을 할 수 있는지 몸소 실천했다. 무엇보다 부부는 살인의 충격과 아들의 뇌사상태를 오로지 노동 현장에서 극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영주에게 더없이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가 종착지로 가는 지점은 결국 내리막의 한 지점이다. 영주는 가해자 부부에게 자신이 피해자의 딸임을 밝힌다. 순수한 선의의 대상으로 영주를 바라보던 부부는 복잡한 속내를 숨기지 못한다. 가해자 부부와 피해자의 딸 영주가 공존할 수 있는가는 질문거리로 남겨둔다. 이 작품 안에서 종종 등장하는 한강대교를 걷는 영주의 모습은 그 자체로 힘이 쭉 빠진다. 긴긴 다리는 끝나지 않을 듯 길고, 춥고 배가 고파 이탈하고픈 마음이 굴뚝같다. 영화를 본 이후 출퇴근길에 한강대교를 건널 때면 영주의 무거운 얼굴이 떠올랐다. 매일 버스에서 마주치는 무수한 사람들의 얼굴과 뉴스에서 들려오는 비극은 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을까. 눈 깜짝할 세 지나가는 하루하루 속에 난 낯선 얼굴들의 근심을 상상한다. 삶은 대단한 복잡성을 들이대며 날 위협하고, 미세한 균열을 눈치채지 못한 체 어림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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