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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Dec 07. 2018

이토록 뜨거운 맘

부탁 하나만 들어줘

  퇴근 후 회사 근처 스타벅스에 앉아있다. 노트북을 두드리며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의 후기를 적는 중이다. 요즘 ‘브런치 무비 패스’ 덕분에 마감일을 앞두고 글을 쓴다. 쪼들리지만 대가가 있는 글이라서 기분이 나쁘지 않다. 어려서부터 전업 작가가 되고 싶었다. 큰 욕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대단한 작가라기 보단 글로 밥 먹고 살 수 있는 삶을 염원했다. 그때는 소박하다고 믿었던 꿈이 지금은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그래서 딴생각 않고 조금씩 노트를 축낸다. 그러다 간혹 매일 꿈과 조금씩 멀어진다는 느낌에 뒤척인다. 퇴근 후 동네 카페에서 책을 펴지만 시간의 좌표면에서 나는 한 두 발자국씩 뒤로 물러선 느낌을 갖는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가버린 것이다. 이런 느낌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나조차 믿지 않는 꿈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긴 어려운 일이다. 섬찟하다 짐짓 노트 속에 허튼 문장을 적어본다.

 내년에 책 한 권이 나온다. 계약서를 책상 서랍에 넣고 보고 또 보았다. 과거에도 몇몇 출판사의 공모전을 통해 문집을 낸 경험이 있다. 처음 책을 받아 들었을 때 열 명이 넘는 공저자들 틈에 끼인 내 이름을 확인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다 고민 끝에 아버지께 드렸다.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여기 제 글도 있어요, 하며 툭. 유달리 책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단숨에 읽으셨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다시 툭. 내 책이 나오면 또 아버지께 드릴 테지. 이번엔 그렇게 빨리 툭하시지 않겠지.  


 매주 영화 시사회에 다닌다. 영화를 볼 땐 희희낙락 다리를 꼰다. 좋은 기분도 잠시, 극장을 나온 순간부터는 여지없이 ‘투 두 리스트’에 영화 후기가 추가된다. 뜨겁던 커피가 식어가듯 주말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마감일이 코앞에 이르러서야 키보드를 붙잡고 씨름을 한다. 글은 자정 무렵이 돼서야 끝이 났다. <부탁 하나만 들어줘>처럼 끝내주는 스릴러에 사족을 붙이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 재밌는 영화에 무슨 말을 보탠단 말인가.


쿨한 것도 변하고 쿨한 이도 변한다


 난 <부탁 하나만 들어줘>를 ‘쿨하지 못한’ 여성이 끝내주게 ‘쿨한’ 여성을 딛고 더 ‘쿨해지는’ 이야기로 읽었다. 우선 끝내주는 ‘에밀리’를 알아보자. 모두가 동경하는 도회지의 커리어 우먼이자 섹시한 '크레이지 푸어 아시안' 교수 남편을 뒀다. 에밀리는 그림 같은 저택에 살며 철저하게 사생활을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는다. 퇴근 후 집에 오면 독한 술을 연거푸 들이켜곤 옷을 벗어 젖힌다. 관용적인 표현으로 혀를 내두르게 하는 여자다. 난 영화를 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요즘 영화들은 세상의 모든 쿨한 여성들을 비슷하게 그린다. 정작 그들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체육관에서 땀을 쏟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가혹한 식단 조절과 절제력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고액 연봉을 위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맥북을 붙들고 밤을 지새우는지 관심조차 없다. 쿨의 조건은 태도와 외형이 만드는 뻔지르르함이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쿨한 여성을 희화화하여 에밀리의 비현실적인 면모를 비춘다.

 최근 에밀리와 친해진 쿨하지 못한 ‘스테파니’는 전형적인 헬리콥터 맘이다. 고작 하는 취미라곤 주부 노하우를 공유하는 브이로그뿐이다. 에밀리에 비하면 시시해 보이는 주부의 삶은 영화에서 따분하게 그려진다. 유기농 식탁에 집착하고 아이의 교육에 기를 쓴다. 이처럼 옷차림부터 말투, 육아방식과 라이프스타일까지 두 사람은 대척점에 선다.


 작품에 변곡점이 생기는 지점은 에밀리의 실종에 있다. 아마도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를 따라한 게 분명해 보이는 의도적 실종이다.(뭐 길리언 플린의 뉴욕의 기자 출신이니까 그녀의 소설을 따라 하는 게 응당해 보인다) <나를 찾아줘>의 실종녀 '에이미'의 잠적을 따라한 에밀리는 남편을 닭 쫓던 개로 만든다.(벤 에플렉의 멍청한 표정을 재현하지만 역부족이다) 황당한 건 에밀리의 아이를 떠안은 스테파니다. 처음엔 호의로 시작한 보모 역할이 지속되자 스테파니는 에밀리의 실종에 의구심을 느낀다. 변변찮은 직업도 없는 스테파니는 에밀리의 과거를 추적한다. 스테파니는 쿨한 척을 위해 가리어진 에밀리의 실체를 밝히고 싶다. 결국 그녀가 살아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스테파니는 죽음 속에 사라진 에밀리를 다시 소환하기에 이른다.

 

'나를 찾아줘'가 아니라 '내가 찾으마'


 여기서 재밌는 점은 늘 에밀리의 육아 심부름이나 하던 스테파니의 전복顚覆이다. 스테파니는 에밀리의 삶을 통째로 접수하려 한다. 이 시점부터 영화는 치정극과 개싸움이 횡횡하는 막장 스릴러로 변모한다. 저승에서 돌아온 에밀리와 에밀리가 남긴 유산을 적대적 M&A 하려는 브라더 퍼커 스페파니. 스테파니에게 중요한 건 그녀가 가진 삶의 방식으로 에밀리의 허황된 삶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스테파니는 유사 에밀리가 아닌 자기 방식대로 저택을 접수한다. 처음엔 동경으로 시작된 관계일지도 모르나, 어느 순간부터 스테파니는 자신이 구축한 단단한 일상이 에밀리의 형체뿐인 주말 드라마보다 낫다고 믿는다. 에밀리는 부유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 정체성마저 거부하고 자기 삶을 팔아치웠다. 고작 보험금으로 한 탕치는 방식은 쿨녀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부스러진 인물상은 <그것이 알고 싶다>가 매주 강조하는 '그런데 말입니다'가 잠복한 위태로움이다. 살림살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스테파니는 집 속의 안온함에 매료된 사람이다. 결코 최고급 정장을 입을 순 없어도 알파걸 운운하는 허세들보다 잘 먹고 산다. 그녀 앞에 산적하게 놓인 야채들은 새로운 쿨의 정의를 말한다. 스테파니는 에밀리의 온갖 옷과 장신구가 놓인 방을 자신의 원색 아이템들로 바꿔놓고 에밀리의 남편과 섹스를 한다. 늘 일방적 영향을 주는 관계로 보였던 두 사람의 관계가 뒤틀리는 지점이다.


 최근 맘 카페, 지역 반상회 등을 필두로 한 온오프라인 주부모임들이 언론에 오르내린다. 그들이 가진 바이럴 파워와 배타성이 지닌 결속이 사회적 힘을 얻고 있다. 흥미로운 건 과거엔 집에 틀어박혀 살림과 육아만 한다는 인식을 뒤집고 외부로 시선을 향한다는 점이다. 이는 내 아이와 가족들이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든다는 의도로 읽을 수도 있으나, 그와 달리 정치적 메시지를 담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남편과 시어머니를 향한 증오를 동력 삼아 이루어진다는 외부의 시선과 달리 그들은 꽤나 능동적이다. 집에 앉아서도 SNS로 세력화가 가능하고 고학력 여성들이 다수가 되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걸 어려워하지 않는다. 과거엔 남편의 사회활동을 위해 경력 단절을 참아냈지만 이제는 주부와 엄마로서의 정체성에 골몰한다. 물론 갑질과 반 페니미즘 성향 등 부정적으로 다뤄지는 의제도 없지 않지만 숨죽였던 세력이 힘을 얻는다는 건 긍정적 신호다. <부탁 하나만 들어줘> 역시 이 점을 명백하게 의식한 영화로 보인다. 21세기 초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로 시작한 직장 여성의 고충을 담은 영화들은 이제, 유튜브로 자기 삶을 노출하는 원색의 주부들에 눈을 돌린다. 영화 후반부 생방송으로 복수극을 감행하는 스테파니의 쇼맨십은 그 정점이다. 폴 페이그 감독 특유의 비틀린 유머는 시종일관 객석에 낄낄낄을 유발하지만, 때론 유튜브 속 채팅창 속 이름 모를 군중들의 깔깔깔에 간담이 서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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