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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an 12. 2019

어떻게 삶으로부터 퇴장할 것인가

에브리 맨, 필립 로스 저

 서른이 넘어 문득 부모님을 바라보며 당혹스러움을 느낀 적이 있다. 병실 앞에서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을 마주할 때, 모로 누워 책을 읽는 아버지의 뒷모습엔 스산한 기운이 느껴진다. 삶이란 그저 계절의 순환처럼 자연스러운 거라며 짐짓 의연한 척해봤자 소용없다. 나의 근원이자 내 생명의 발원인 그들의 늙음이 망연하다. 쓸쓸한 표정, 더 이상 무언가 크게 기대하지 않는 초연한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 당신에게도 멋진 구절을 읽고 인생의 가능성에 기대어 거리를 걷던 시절이 있었을 텐데.

미술관 옆 동물원 Art Museum By The Zoo, 1998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서른이 넘은 춘희(심은하였다)는 철수에게 말한다.

항상 몇 년 뒤의 내 모습을 생각해보면 끔찍했는데 막상 그 나이가 됐을 때 담담할 수 있는 건, 나이를 한 살씩 먹어서 인가 봐 그럼 그다음 나이가 그리 낯설지 만은 않거든

춘희는 우연히 만난 철수와 느닷없는 동거를 하며 삶의 심박수를 높인다. 오늘 하루 마실 수 있는 커피에 만족하며, 어차피 크게 변할 리 없는 일상을 매만진다. 그건 시간을 유폐시키는 마음이다. 마치 나완 관계없는 일인 양 창밖으로 눈을 돌린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동안은 먼지처럼 쌓인 시간의 더께를 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조금 더 나이를 먹은 어르신은 어떨까. 그들의 유언장엔 어떤 내용이 적혀있을까. 지독한 염세일까? 어쩌면 무한한 정적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난 영미문학 대가 '필립 로스' 작품을 읽기로 한다.

소설 에브리맨, 필립 로스 저

 <에브리맨> 같은 소설을 읽고 뭔가 감상을 남긴다는 건 막막함 그 자체다. 노 작가 필립 로스가 죽음을 떠올리며 적은 이 짧은 소설을 읽고 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만 앞선다. 머리에 피가 흥건할 땐 차라리 죽음을 자주 떠올렸다. 지난한 순환의 끝을 떠올리며 암흑을 상상한다. 우리 엄마도 죽고, 내 친구도 다 결국 다 죽는다니. 믿을 수 없었고 인정하지 않았다. 죽음의 존재를 시간의 구조보다 먼저 깨닫자 막연한 '없음'이 내게 육박한 것이다. 하지만 나이를 스무 살쯤 먹고, 이제는 뭘 좀 안다고 설치기 시작하면 죽음은 젊음 앞에서 자취를 감춘다. 늘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이성과 데이트하며 영원불멸의 미래를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서른이라는 숫자에 다다르자 이제 바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 잠을 청하기 바쁘다. 이 노트북을 앞에 두고 죽음 따위를 적는 건 넋두리에 불과하다. 알 수도 없고, 닥치기 전까지 만질 수도 없는 눅눅한 공기일 뿐이다. 알람시계를 내일 아침에 맞춰두고 자그마한 화면에 눈을 두다 잠이 든다.

입을 메우고, 눈을 가리고, 콧구멍을 틀어막고, 귀를 닫는 것 같았다. 그는 그들에게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더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싶었다. 그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덮고, 아버지가 생명을 빨아들이는 통로를 차단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저 얼굴을 보아왔어. 내 아버지의 얼굴을 흙 속에 묻지 마.(66p)
맙소사 그는 생각했다. 한때 나였던 남자 나를 둘러쌌던 생활, 나의 것이었던 힘. 그때는 어디에도 이질감은 느낄 수 없었다. 한때는 나도 완전한 인간이었는데. (p135)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에브리맨(보통사람)으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한 남자가 있다. 미국 유대인 이민자 3세대로, 그에겐 가족이라는 가치와 종교라는 숙명이 족쇄가 되지 않는다. 개방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유명 광고회사 아트디렉터로 높은 연봉을 받으며, 타고난 예술의 감수성을 가져 그림실력과 작문 솜씨까지 뛰어나다. 거기다 큰 키와 이목구비가 뚜렷한 매력적인 외모, 지성적이고 합리적인 화술까지. 그는 이 모든 무기를 가지고 수많은 여자와 동침을 했고, 세 번의 결혼과 뉴욕 대형 아파트라는 자산을 보유했다.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화려한 인생의 변속기를 바삐 놀리는 그에게 어느 날 죽음이 드리운다. 소설은 끝내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무덤가를 배회한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 2007
조수가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것을 한참 지켜보다 보면, 바다를 바라보며 백일몽에 빠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렇듯이 자신에게도 삶이 우연히 예기치 않게 주어졌으며, 그것도 한 번만 주어졌으며, 거기에는 알려진 또는 알 수 있는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p 130)

 죽음을 다룬 무수한 문학작품이 있다. 하지만 정작 '늙음'과 마주하는 기백을 가진 작품은 드물다. 죽음이야말로 문학의 본원으로 불리지만, 늙음엔 도망칠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다량의 수면제를 집어 들 때까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없는 집의 정적엔 어떤 음습한 것들이 있는지 지켜볼 뿐이다. 생의 이면을 바라보려는 결의가 없이는 쉽게 해낼 수 없다하지만 때로는 그런 막막함이 위로가 되기도 한다. 누구나 늙음이라는 명제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사실에 나 역시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을 읽고 나면 개개인의 죽음은 지극히 사적이고, 그 고독에 발붙일 수 있는 위안이란 존재치 않음을 다시 한번 더 실감하게 된다. 위안이라니 가당치 않다. 삶을 뚝 잘라 절단면을 들여다보면 결국엔 죽음이라는 어둠이 지층 반 이상을 차지할 것이다. '필립 로스'는 화려했던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병과 싸우다 죽은 한 남자를 통해 이를 증명한다. 소설은 장례식에서 시작됐으며, 누군가의 인생은 결국 그 마무리를 위한 회귀의 과정이다.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 보통 남자는 자신이 죽고 나서야 몇몇 환희를 기억해낸다. 몇몇 친구의 죽음을 보았으며, 자신을 떠나간 가족을 그리워한다.


 며칠 전 장례식장에서 만난 누군가는 시체가 다 굳기도 전에 호상이라며 주둥이를 놀린다. <에브리맨>을 읽는 기분이란 마치 그 분노에 맥이 닿아있다. 이제 죽음은 도처에 널려있고, 그걸 인식하지 못했던 무지한 젊음은 사그라졌다. 필립 로스는 말한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162p) 유튜브 걸그룹을 보다 보면 내가 지나간 시간을 떠올릴 수 있다. 이제 저들과도 죽음의 경주에서 10년은 뒤쳐져있다. 저들은 나보다 싱그러운 10년을 더 누릴 테지. 부러워 견딜 수 없다. 이제 저들과 어울리기도 힘든 나이가 됐다. 술자리 친구들은 욕지거리를 섞어가며 연봉과 전셋값 얘기에 여념이 없다. 이제 결혼해서 자식도 낳겠다고 한다. 인생 좋은 때는 다 갔다며 젊은 시절을 회고한다. 고개를 돌린 나는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을 느낀다. 그들의 어른 됨에는 망설임이 없다. 난 어떤 기억을 떠올리며 노년을 맞이할까. 나도 저들처럼 하나의 꼭짓점으로 소멸할 것인가.

그랜 토리노, 2008,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주연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두려워하던 바로 그대로.(p188)

 필립 로스는 2009년 한 인터뷰에서 소설의 소멸을 예측했다. 영화와 TV가 인류의 사고를 장악한다는 비관적 예측이다. 그리고 2012년 권투선수 '조 루이스'의 말을 인용하며 내가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했다며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세상 돌아가는 꼴을 늘 못마땅해했고, 공공의 시대정신이 개인을 나락으로 떨어뜨린다며 분개했다. 작년 5월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언론은 그의 문학적 이력이 아닌 노벨상을 타지 못한 비운을 조명했다. 그가 평생을 거쳐 적어 온 가치는 그의 예측처럼 빠른 속도로 소멸했다. 그 역시 에브리맨이 눈을 감기 전 두려워했던 바다의 영속성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죽음은 그 역시 마다하지 않고 삼켜버렸다.

 영화 <은교>에서 한 노교수는 젊은 여자를 사랑하게 된 후 이런 말을 내뱉는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영화를 볼 당시엔 이 말이 꽤 인상적으로 다가왔는데, 지금 읽어보니 젊음을 시기하는 자의 투정이 보여 졸렬해 보이기까지 하다. 죽음은 왜 망각일까, 삶은 한 번 뿐이라서 그럴까. 늙음은 왜 우스꽝스럽고, 외롭고, 적나라하게 까발려질까. 이 책은 웃음기 가신 얼굴로 손사래 친다. 끝내 진실의 바닥까지 파헤쳐 내려가서 죽음과 마주한다. 더없이 끔찍하고 외로울 거라며 각오하라고 말한다. 그럴수록 난 겁이 나 싱그러운 시절을 떠올리며 눈을 감는다. 내게 남은 건 기억 속의 은밀한 자취뿐이니까생의 음습한 질감을 부정하고 싶어 끝내 책장을 덮고 생각을 끊어냈다. 대가의 유언장엔 내가 그은 밑줄을 다 무시한 채 맥 없는 마침표만 새겨졌다.

거친 바다 멀리 백 미터나 나간 곳에서 해변까지 대서양의 큰 파도를 타고 단번에 들어오던, 늘씬한 작은 어뢰처럼 상처 하나 없는 몸을 지닌 그 소년의 활력은 어떤 것으로도 꺼버릴 수 없었다. 아, 그 거침없음이며, 짠 물과 살을 태우는 태양의 냄새여! 모든 곳을 뚫고 들어가던 한낮의 빛이여. 그는 생각했다. 여름의 매일매일 살아 있는 바다에서 타오르던 그 빛이여 (소설의 마지막 쪽)


표지 사진 출처 : 영화 <그랜 토리노>, Gran Torino, 2008  스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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