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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an 19. 2019

우리가 몰랐던 청년 '조지 오웰'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저

우중충한 구름이 해를 머금은 며칠 전, 서울 북촌 초입의 한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거리낌 없는 상찬과 내일이면 딱히 기억나지 않을 허튼소리가 가득한 자리. 가끔씩 이런 시간들에서 힘을 얻는다. 의미를 배제한 체 웃고 떠드는 그들을 보며 막연한 낙관을 얻었다. 세상사 별거 아닌 것들 투성이인데 개의치 않고 농담거리를 찾아내는 부지런한 일꾼들. 온 도시에 우스갯소리가 가득 차 있고 끊이지 않는 박장대소가 밤하늘의 고요를 밀어낸다. 도시의 농담꾼들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비웃듯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작가 ‘커트 보네거트’는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농담을 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예술이며, 늘 감정적 위협으로부터 떠오른다.” 지친 한 주를 보낸 이들이 먹고 붓고 마시며 휘발하는 이 시간들은 어떤 의미일까. 먹고살기의 존엄과 어리석은 자존심 사이에서 부대낀 그들에게 농담이라는 위로가 필요한 게지, 뭐 그런 거지.(So it goes.)    


낯선 방, 눈에 익은 책들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저

한 잔 두 잔 비워내는 술잔, 혀를 지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방이다. 자리를 옮긴 일행은 한 친구의 집에서 술판을 벌인다.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는 일이 나이를 먹을수록 흔치 않다. 나를 드러내기 힘든 것처럼, 아무리 친해도 타인의 누추한 세간을 본다는 게 기껍지 않다. 괜스레 어색한 나는 언제 자리를 뜰까 눈치나 살핀다. 두리번거리던 나의 시선은 그의 책장에 머문다. 어디 보자, 요즘 잘 나가는 작가들의 책이 많네. 오호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모으네. 책의 제목들을 문장처럼 곱씹던 나는 며칠 전 읽은 한 구절을 떠올린다.      

남성들이 소설을 읽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들이 아예 피하는 소설 장르들이 있는 건 사실이다. 거칠게 말해서 평균치 소설이랄 만한 것들은 여성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하다. 남성들은 존경할 만하다 싶은 소설이나 추리소설을 보는데, 그들의 소비량은 엄청나다.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中 <서점의 추억> 47P.)

예나 지금이나 소설을 싫어하는 남자들은, 무려 1934년의 영국 런던의 한 책방에서도 개체로서의 편향을 드러낸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세계문학이 아니면, 역사서나 추리소설을 읽는 남자들은 '디킨스'의 양장본을 사서 책장에 진열할 허영은 있지만,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일생을 낡은 책상에 앉아 읽어볼 엄두은 내지 못한다. 9 to 6를 사는 보통사람 이야기란 시시하다며 손사래 친다. 오로지 여성들만이 소설이 지향하는 일상의 자취를 더듬을 줄 안다. 뜨거운 커피를 앞에 두고 이야기 속에 몰입하길 즐겨한다.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매사에 세심한 그녀들은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런던에서도 타인의 인생을 읽으며 세상을 좀 더 살만한 곳으로 그려본다.


청년 '조지 오웰'의 아우라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과 <1984>가 주는 위압감으로 압도하는 작가다.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자 1950년대 이전 소설 중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이다. 고전의 황금 레테르를 가진 조지 오웰의 작품들은 누구나 책장에 꽂고 싶은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다. 이탈리아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는 고전이란 사람들이 “요즘 읽고 있어”라 말하지 않고 “요즘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는 책이라고 정의했다. 어쩌면 조지 오웰이야말로 남성들이 거대한 서가에 꽂아두고 허영을 드러내기에 가장 알맞은 작가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우리 선희>, 북촌의 한 빌라, 정재영의 책장과 글을 쓰는 자의 피로감

나 역시 그 위압감에 눌려 인간 조지 오웰을 만나길 주저했다. 내 머릿속 조지 오웰은 매사에 오소독스 한 태도로 잔소리를 하는 꼬장꼬장한 노인이었으니까. 저 높은 상아탑에 앉아 나를 계몽시키려는 대문호의 고매한 눈빛에 절레절레. 그건 마치 '헤밍웨이'와 사석에서 단 둘이 압생트를 한 잔 하는 자리가 주는 부담감이다.(지독한 마초일 게 분명해) 그렇게 조지 오웰의 산문을 읽는다는 건 소설을 읽는 것과 다른 문제였다. 산문이란 한 인간의 사생활을 통찰하는 것인데 난 도통 조지 오웰이 젊은 날 어떤 고민 속에 살았는지 관심이 가질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이념을 앞세운 행동주의 문학가 특유의 심각함에 거부감이다. 이 막연한 짐작은 어쩌면 반쯤은 맞아 들어갔다. 그가 수필에 적은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 제국주의 식민지 억압에 대한 발언을 보라. 칼만 안 들었지 피를 튀기는 정신적 상흔이 글에 가득하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 적힌 선언적 문구,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그의 발언은 군국주의가 부른 시대적 사명에 어떻게든 작가로서 응답하고자 하는 결기가 드러난다. 어릴 때부터 지극히 사변적인 글을 쓰는 작가들을 보며 동경을 키웠던 내 어깨를 죽비처럼 내려치는 선승이 따로 없다.(듣고 있나 하루키) 그래도 산문이란 게 밤의 문학이 아니던가. 힘든 육체적 노동을 마친 한 인간이 세수를 하고 수건을 어깨에 건 체 마음의 여린 결을 연필로 적는 소박한 시간도 있는 법이다. 인간 조지 오웰의 껍질 안에 자리한 ‘에릭 아서 블레어’라는 청년의 숨결이랄까. 다소 무거운 몇 편의 산문을 지나가면, 청년 조지 오웰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선물 같은 일기들이 있다.   

   

<서점의 추억>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저     


성인이 된 조지 오웰은 명문 이튼을 졸업한 후 대학은 포기한다. 촉망받는 재자였지만,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 '버마'(현 미얀마)에서 경찰로 근무한다. 그 누구도 시키지 않은 생고생을 자처한 셈이다. 이후 고국에 돌아와서도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자처하며 하층민의 삶을 체험한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한다. 그는 경험을 글로 적었고, 그 글에 정치적 목적을 결부시켰다. 당의 이데올로기에 휘둘리진 않았으나, 주저 않고 옳고 그름에 대해 논했다. 당시의 글들은 비록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다수의 서평은 생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유럽 대륙을 휩쓴 파시즘과 전쟁에 휘말리기 전까지 정치적인 글쓰기의 토대를 닦은 셈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고생 고생해서 키운 아들이 생고생을 마다하지 않으니 불효자였을 테지만, 본인에게는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키우는데 거지 생활이 더없이 소중한 자산이었으리라. <서점의 추억> 속 헌책방일은 조지 오웰이 아마도 규칙적인 글쓰기를 위해 선택한 아르바이트로 보인다. 불규칙한 생활에 건강이 나빠졌던 조지 오웰은 오전에는 글을 쓰고 오후엔 일하는 이 일을 좋아했다. 그 증거로 글 속엔 한층 어깨에 힘을 뺀 문장과 기대하지 않은 유머들이 있다.      

소설가 조지 오웰은 말년에 <동물농장>을 쓰기 전까진, 늘 돈을 벌어야 하는 생계형 작가였다. 그는 소설을 쓰기 전에도 생계를 위해 무수한 서평을 써야만 했다.

<서점의 추억>은 소품 같은 가벼운 필치의 짧은 글이다. 이 글의 첫마디는 이렇게 시작한다. “헌책방에서 일하던 때 주로 느낀 것은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점이다.”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독서의 동기를 네 가지로 꼽았는데, 첫 번째로 순전한 이기심이라 말했다. 똑똑해 보이고 싶고,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싶은 심리가 독서를 추동한다는 것이다. 그는 작가를 허영심과 자기중심적 인간이라 정의하고, 글을 씀으로 해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자기 인정 욕구를 인정받으려는 무뢰한으로 묘사한다. 나 역시 내가 왜 글을 쓰는지에 관해 평소에 많은 생각을 한다. 난 스스로 내 글을 지극히 개인적인 활동을 상품화하는 과정으로 믿는다. 여전히 난 내가 정말 책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지만, 정제된 글을 통해 카오스의 일상을 코스모스 안에 몰아넣는 것이다. 내 비루한 사고를 미묘한 문장의 배열로 그러모아, 읽고 또 수정해서 내가 원하는 그럴싸한 제목을 다는 기쁨. 난 이를 통해 조지 오웰이 말한 정치적 목적성을 달성할 순 없겠지만, 낱말의 소리와 그로 인한 연상이 주는 기쁨을 한껏 만끽한다. 가을 어느 날 낡은 술자리에서 쓸쓸히 집으로 돌아서는 시간, 밝은 달 아래로 서늘한 바람이 가랑비처럼 떨어진다. 어느 누군가의 말처럼 밤은 책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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