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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an 26. 2019

소설의 첫 문장을 되뇐다

첫 문장과 믹스커피의 정서

첫 문장을 기억하는 소설이 있다.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 점심을 먹다가 문득 창밖을 올려다볼 때 불현듯 생각나곤 한다. ‘카뮈’는 <이방인>의 첫 구절을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로 시작했다. 이 선언적 문장을 기점으로 극은 맹렬히 몰아친다. 마치 보헤미안 랩소디의 불현듯 고백, “엄마 나 사람 죽였어.”처럼 뇌리를 떠나지 못한다. 오늘도 서점을 서성이며 매대에 깔린 무수한 책들의 첫 문장을 읽는다. 날 사로잡을 한 권을 건지기 위해, 작가가 심어놓은 주술 같은 문장을 구해주려고.


첫 문장과 믹스커피의 정서


소설 <이방인>, 알베르 카뮈 저

몇 년 전 한창 사무실에서 바쁘게 일할 땐 늘 아침을 굶었다. 매일 아침마다 광인처럼 뇌까리는 알람 소리가 두려웠다. 당시 과장은 유독 날 힘들게 했다. 옆자리에 앉은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오로지 날 휘감는 파티션을 벗 삼아 그 시절을 버텼던가. 추운 겨울, 난 여느 때처럼 무거운 몸으로 출근했다. 강렬한 허기를 머금고 책상에 앉자마자 의식처럼 믹스커피를 휘휘 젓는다. 담배를 피우지 않음에도 뜨끈한 종이컵을 들고 애연가들을 따라 옥상에 오른다. 아 정말 오늘 아침이 싫구나. 

옥상 위의 동료들은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바라본다. 커피와 담배를 손에 쥐고 ‘넌 이 맛을 모르는구나’하는 표정이다. 난 옥상 위에서 보이는 황량한 사무실 인근의 풍경을 종이컵과 함께 삼켜버린다. 의미 없는 한숨과 별 탈 없는 웃음들이 꽤 즐겁다. 평소에 흡연자들이 만드는 연대를 시기했다. 같은 연기를 마신다는 이유로 그들은 서로를 위했다. 그러던 차 믹스커피 하나로 그들 사이에 낄 자격을 취득한 셈이다. 그렇게 우스운 시간을 보내고 사무실로 들어가면 어김없이 담보할 수 없는 하루가 시작됐다. 그럴 때 종종 <이방인>의 첫 문장을 떠올렸다. 왠지 그렇게 중얼거리면 난데없이 단편 하나를 떡하니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삭막한 사무실을 벗어나 문예창작과 학생처럼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혼돈을 적으리라. 당시 블로그를 들춰보면 온갖 우울한 상념이 가득하다. 매일 밤 노트북을 붙잡고 문학에 가닿기 위해 낑낑거리던 그 시절을 난 믹스커피의 시간이라 칭한다. 

소설 <칼의 노래>, 김훈 저

말 많은 우리 부서장은 다짜고짜 차를 한 잔 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는 온갖 신변잡기를 동원해서 얘기를 이어나간다. 할 일은 산더미인데 회의라는 명목으로 세상 어마 무시한 허튼소리를 해댄다. 저녁이면 홀로 남아 야근을 하며 잔업을 했다. 그러니 다음날 출근길이 망가지지 않고 배기나. 그럴 때마다 버스 안에서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를 여는 첫 구절을 읊는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네” 난 꽃은 아니더라도 오늘 하루 무구한 평온이 서리길 기대하며 비탈진 삼각지역에 내린다. 

사람이 무언가에 시달리면 일상이 뒤틀린다. 피로와 굶주림, 괜스레 퍽퍽해진 피부와 침침한 눈. 난 난생처음 직장생활에 슬럼프를 맞이한 상태였다. 딱히 하고픈 일도 없으면서 딱한 생각으로 하루를 흘려보냈다. 당시 날 지켜봐 주던 친구에게도 별 말을 못 했다. 그녀의 눈에는 ‘너만 힘든 게 아냐. 나도 할 얘기가 산더미인 걸’하고 적혀있어 몸서리쳤다. 고개를 들고 차마 그녀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당시 아침을 여는 알람 소리가 ‘존 콜트레인’의 <블루 트레인>이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그 곡을 지금은 듣지 못한다. 난 끔찍했던 시절을 소환하는 그 음악을 내 멜론에서 삭제했다. 고달픈 삶에 벙벙 거리는 웨스트코스트 재즈가 비집고 들어올 턱이 있나.  


행복은 다 비슷하고 불행은 제각각이다.


요즘엔 도통 믹스커피를 찾아보기 힘들다. 단단하게 조여진 하루, 오늘 해야 할 일을 목록에 넣고 처리해가는 긴장감. 내 책상엔 건강 생각한답시고 원두커피가 있지만 종종 믹스커피가 그리울 때도 있다. 빈속에 식도를 타고 흐르는 믹스의 걸쭉함을 떠올린다. 이나영의 얼굴이 새겨진 노란색 맥심 모카골드, 김연아의 얼굴이 그려진 맥심 화이트 골드, 김태희의 미소가 무색한 프렌치카페. 세 가지 옵션을 앞에 두고 마치 오늘의 운세를 점치듯 뽑아들던 시간. 구취와 텁텁함을 부르는 이 음료는 종이컵의 매끈한 모양새와 후후 불어마시는 아늑한 입모양이 합쳐져 먹고 살기의 형태를 완성한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행복한 가정은 다 고만고만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이다”라는 문장을 적고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난 종종 이 경구를 노트에 끄적이며 곰곰이 생각한다. 행복한 녀석들은 저마다 결여 없이 평균 이상의 충족된 삶을 산다. 내가 불행했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대체로 나사 하나가 빠진 때였다. 즉 불행은 저만의 이름으로 명명된 결여에 노출된 시간이다. 마음 한켠이 휑뎅그렁한 틈을 보이면 온갖 잡념이 비듬처럼 솟아난다. 그럴 때마다 난 신용카드를 무기 삼아 구멍을 매우듯 기성품에 목을 맨다.

난 꽤 긴 시간 혼자 살았지만 집에 식기류와 주방도구가 거의 없다. 귀찮으니 다 밖에서 끼니를 챙기니 주방은 늘 무색하다. 하지만 커피 도구만큼은 완벽하게 갖췄다. ‘비알레띠 모카포트’, ‘바덤 프렌치프레스’, ‘칼리오의 드립 커피세트’가 다 있다. 어느 순간부터 믹스커피 대신 공을 들여 커피를 내리고 마시는 게 좋다. 밥은 대충 때워도 드립 커피의 풍미는 포기할 수 없달까. 점점 증세는 더 심해져서 신선하게 로스팅 커피를 찾아 서울 시내의 유명한 커피집과 공방을 돌아다녔다. 황동 그라인더를 사고 값비싼 포트를 집에 들였다. 커피 애호가의 고상한 취미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내가 느끼기엔 일종의 분리 의식이 생긴 건 아닐까 의심한다. 커피를 갈고 여과 용지에 담아 커피를 천천히 내리고 나면 나만의 테두리가 만들어진다. 맹목적으로 통합과 집단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의 틈바구니에서 내 결여를 매운다. 단 하나만이라도 내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돈과 시간을 투여한다. 군중이 가득한 스타벅스에서 회색 소음에 섞여 책을 읽는 즐거움처럼 일상 속에서 개인주의의 만용을 부린다.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 구절은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이태리에서 열흘간 유레일 기차여행을 하던 때 종종 호스텔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야간열차를 애용했다. 새벽을 달리는 기차에서 가방을 끌어안고 쪼그려 자는 건 낭만과 거리가 있다. 경험이라며 스스로 위로했지만, 잘 씻지도 못하고 딱딱한 침대에서 눕는 게 유쾌할 리 없다. 하지만 기찻길을 비추는 따스한 햇살과 주위 여행자의 담백한 표정은 평온 그 자체였다. 입에서 썩은 냄새가 나고 옷은 얼룩덜룩하지만, 다른 여행자와 섞여 농을 주고받다 보면 바다가 들린다. 여행을 한다는 사실 그 자체, ‘여기가 그 유명한 살레르노라니!’ 그 기분 하나만으로 몸은 가뿐해진다. 지금 이 곳이 나와 일면 부지도 없는 타지라는 감회에 젖어 아무 역에나 내린다. 설국의 첫 문장은 마법처럼 나를 다른 공간으로 인도했다. 터널을 빠져나오는 기차의 풍경을 떠올리며 결여를 잊었던 여행길을 생각한다. 속된 흔적을 뒤로하고 타자의 낯선 거리감을 즐긴다.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터널을 빠져나와 맞이하는 낯선 마을을 설국이라고 불렀다. 신호소에 멈춰 선 기차는 나를 이전과는 조금 다른 여행자로 만들어 줄 것이다.

소설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저

이태리 기차역의 낙은 작은 에스프레소바의 향이다. 에스프레소의 향이 온 기차역에 퍼지면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들은 앉지도 않고 작은 커피잔을 손가락에 끼우고 실없는 농을 한다. 그들이 만든 일상의 문턱이란 세상 앞에 나서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틈이다. 그들과 섞여 커피를 마시다 보면 세상의 온도가 2도쯤 오를 것만 같다. 낙천적이고 유머러스한 이태리인의 기질에 맘을 놓는다. 난 뭔 말을 하는지도 모른 체 고개를 끄덕이며 에스프레소를 수 십 모금으로 나눠 마셨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류’는 자신의 소설 <69>에서 이렇게 말했다.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다. 누군가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는 그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뿐이다. 즐겁게 사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지겨운 사람에게 나의 웃음소리를 들려주기 위한 싸움을, 나는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땐 긍정을 강요하는 요새 흔한 자기 계발서처럼 조악하게 느껴졌다. 뭐든 즐기려 애쓰는 젊은이의 객기랄까. 하지만 이태리 사람을 구경하고 돌아오니 이 문장이 더없이 적절해 보인다. 잘난 척과 허세로 휩싸인 문장 속에서 투스카니의 태양을 떠올린다. 이태리인은 자신이 얼마나 즐거운지 보여주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마치 즐거움이야말로 모든 근심을 무화시키는 비법이라도 되는 듯 손가락을 모으고 침을 튀긴다. 그 오버액션에서 즐겁게 사려는 자의 승리를 본다. 나도 질 수 없다. 어떻게든 즐겁게 살 수밖에.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소설 <69>, 무라카미 류 저

요즘 내가 느끼는 가장 큰 고민은 유머다. 웃기는 사람이고 싶다. 나한테 “잘생겼다, 일 잘한다”는 말보다 더 중요한 건 “저 친구 참 유머러스해. 말하는 표정만 봐도 웃겨.”같은 말이다. 난 웃는 얼굴에 늘 고프다. 누구에게나 웃기는 사람이고 싶지만 어릴 때부터 하지 않던 농담이 이제야 늘 리 없지. 그래서 요즘엔 타율은 애당초 포기하고 열심히만 한다. 아재 개그라는 비난을 뒤로하고 말장난에 목숨을 건다. 물론 분위기는 예상대로 삭막하다. 그런 개그 하지 말라고 진지하게 충고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난 한다. 골은 거의 없더라도 풀타임을 뛰어 댕기는 박지성처럼 쉼 없이 허튼소리를 뱉는다. 어릴 땐 과묵하고 조용한 사람이 가진 미덕이 좋았다. 조용한 사람이 미녀와 사귄다는 속설에 솔깃했다. 하지만 세상은 소문처럼 흘러가지 않더라. 과거에 이상형은 말 없고 사연 있어 보이는 여자였다. 나이를 좀 더 먹어보니 내 썩은 개그에도 미소 짓는 여자가 좋다. 말은 할수록 실이 많고, 말실수는 연이어 당혹게 하지만 그래도 웃어주는 사람 옆에 있고 싶다.


표지 이미지 :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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