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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un 03. 2019

그는 자멸할 권리가 있다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저

그는 외관상 완벽한 사람이다. 좋은 직장과 준수한 외모에 잠들지 않는 도시,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파트까지 소유했다. 그러나 그런 화려함 뒤에 눅눅한 비밀이 있다. 그는 중독되어 있다. 그의 깔끔하고 나무랄 데 없는 집 안 곳곳은 남에게 들킬까 무서운 썩은내가 진동한다, 깔끔한 사무실에는 차마 남이 볼까 무서운 뭔가가 있다. 번지르르한 사물은 그의 욕망을 자극하기 위해 전시되어 있다. 거기선 대화는 겉돌고 정서적 교감도 요원하다. 아니 원치 않는다. 그곳은 그저 하수구처럼 배설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그의 집을 방문한 사람은 잘 갖춰진 세간을 쓱 둘러보다가 내쫓긴다. 그것이 그가 안심하고 사는 방식이다. 그래서 일상은 격렬하지만 열정적이지 않고 곁에 누군가 있지만 머물지 않는다.


바닥을 치는 맛이 있다. 영화를 볼 때 몰락의 징조가 보이면 속으로 ‘더더’를 외친다. 더 파괴되고 찢어지길. 파멸은 질리는 법이 없다. 누군가 아픈 소리를 한다면 쉬이 동정을 꺼내지만, 이면엔 아직 더 남았다는 냉소가 고개를 든다. 세상은 신데렐라 스토리를 좋아한다지만, 실은 그 신데렐라가 다시 추락해 비명을 지를 때 열광한다. 낙차가 클수록 짜릿한 법. 병든 낭만으로, 인간은 다 그런 존재라는 합리화로 흉포를 머금는다. 짐짓 고개를 들면 비열해지고 입꼬리는 비틀린다. 유독한 마음이 미처 새 나갈세라 늘 하던 방식으로 아픔을 위로한다. 어려서부터 배운 대로 위선의 미소로 다독인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관심도 없으면서 예의를 꾸민다.

간혹 세상이 끝장이 나 더는 소생 가능성이 없길 바란다. 그건 나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게 바닥을 치고  나면 보이는 게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한 생각이 고개를 든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영화관에서 비극 앞에 선 인물을 구경했다. 불 꺼진 상영관에서 그의 비참함에 몰입했다. 수년 전 아이들이 바닷속으로 사라졌을 때도 난 뭔가를 파괴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가학성에 눈을 떠, 나 자신을 벌주는 상상에 몰두했다. 다 끝났으면 좋겠어, 용서를 구할 길 없는 수인처럼. 난 일종의 재난영화를 보듯 무너져 내리는 창밖을 상상한다. 지층이 흔들리고 거의 다 끝나갈 무렵 난데없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도래하길 염원한다. 기계장치를 탄 그가 우리를 굽어보고 혀를 차며 리셋 버튼을 눌러주기를. 세상이 파괴되길 울부짖는 핑크 플로이드처럼 염세를 찬양하길.


최승자를 읽으며 바닥을 떠올렸다. 온갖 감정을 여과 없이 배설하는 그의 시를 읽으며 평소엔 의식 못 했던 음습한 마음을 품었다. 활자로 새겨진 시체가 썩는다. 죽어간 그들, 우연히 삼겹살을 먹고 맥주도 마시며 돈독한 시간을 보냈지만, 미처 장례식도 찾지 않았던 잊힌 사람들. 최승자는 사랑과 죽음이라는 고루한 주제 대신, 인간이 굳이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불편한 감정에 탐닉한다. 분명히 내 속 어딘가 있지만 돌보지 않았던 감정이다. 일종의 울부짖음으로, 결국은 피학성으로 만들어진 세계다. 누군가는 70년대를 살아간 작자의 시대상을 상기하겠지만, 난 그녀가 쏟은 단어 하나하나의 여파에 집중했다. 직설적 허무랄까. 늘 번듯한 채 타인 앞에 서지만 속으론 온갖 오물을 흘리며 다니는 나. 존재의 가벼움을 숨기기 위해 당위를 앞세운 번지르르한 그가 있다. 최승자는 그럴싸한 삶을 꾸리고 사는 이에게 절망을 드리운다. 사회가 꾸며내는 모양새에 발맞추는 이에게 차디찬 저주를 보낸다. 시집은 첫 문장부터 패배를 선언하고 끝없이 추락한다. 시집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한 치의 빛도 드리우지 않는다.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도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는 <일찌기 나는>이다. 고시원 쪽방에서 소주만 마시고, 조현병에 피골이 상접하여 시만 썼던 시인. 불면을 버티지 못해 환자복을 입고 온 거리를 내지르던 사람. 그가 병실에서 겪었을 시간을 떠올리며 이 시를 읽었다. 죽음이란 어쩌면 영원한 망각이다. 따라서 인간의 근본, 다시 말해 인간 정신의 불멸에 대한 확신은 흙 앞에서 위태롭다. 결국 내가 돌아갈 곳. 진정한 공포는 비굴하게 살다가 아무런 기록도 없이 사라지는 것 따위다. 마치 루머처럼 조각난 정체성이 두렵다. 난 최승자의 시를 읽으며 비록 사라질지라도 상처를 정확하게 그리려는 마음을 읽는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스스로 관찰하지 않으면 도통 알 수 없다. 생채기를 무시하고 덮어버리면 그 이후엔 그야말로 공백이다. 극단적인 비관주의로 물든 그녀의 시를 읽는 게 지쳐도, 공허를 품은 그녀의 단어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상한 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사랑이다. 최승자의 사랑은 어쩐지 무색하다. 그녀는 어느 장에서나 사랑을 말하지만 그건 몰락과 맞닿은 비하다. 아리송한 일이다. 왜 사랑은 안식이 되지 못할까. 온통 상처만 남기는 게 사랑이라면 왜 결국은 사랑일까. 사랑이 오직 외로움에 불과하다면 그렇게 곡진히 적을 필요가 있을까. 여러 의문이 이는 가운데 난 멋대로 답을 내렸다. 사랑이야말로 시간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것임을. 완전히 파멸하는 와중에도 시간을 거스르는 건 실연뿐이라고. 사랑에 고통받고 그걸 되새기는 시간만이 현실을 헤집는 유일한 시간이라고. 굳이 보고 싶지 않았던 내 속의 문드러진 꼴을 지켜보는 짓. 난 그녀의 그을린 시간에 한껏 시달리다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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