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질 건 없어도

페스트, La Peste, 알베르 카뮈

by 박민진

날씨가 괜찮아 창문을 열었다. 예기치 않은 소음이 대뜸 귓전을 울린다. 어찌 된 게 이 거리는 일 년 내내 시끄럽다. 정체 모를 굉음은 도시가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다는 삐걱댐이다. 난 거기에 부속품처럼 작은 소음을 보탠다. 콜록콜록. 기침이 도통 떨어지지 않는다. 목을 주무르며 오늘 급히 써야 할 보고서와 자질구레한 소일을 떠올렸다. 매일의 일과. 지금 내가 확신을 가지고 매달릴 수 있는 바다. 우려와 달리 잘 굴러가고 있다. 되도록 잘 떨어내며 산다. 매일 마주하는 사무실 사람과 짧은 인연으로 만난 분들 모두 친절하다. 난 그들과 느슨한 마음을 주고받으며 적정한 평화를 맴돈다. 늘 타인을 의식하지만, 딴청을 피우며 모른 척을 일종의 미덕으로 여기는 지금이 익숙하다.


내 가방엔 늘 두 권의 책이 있다. 소설과 비소설. 거기에 연필이 몇 자루가 섞인다. 소설책은 빼곡하게 친 줄이 무색할 정도로 소용없다. 기계음처럼 울리는 알람 소리를 끄고 사무실에 출근해 일한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닥친 일을 해치운다. 150번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면 몸을 뉘기 바쁘다.

잠은 안도를 부른다. 잠 속에 머물면 불안은 벽에 스민다. 불현듯 이끌린 욕구나 불길한 생각도 잊을 수 있다. 그건 잠시간 유예지만 그렇게 하루는 지나간다. 며칠 전 새벽까지 노트북을 붙잡고 뭔가를 적었다. 뭘 쓰고자 한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마침표를 찍었다. 새벽에 쓴 글은 대체로 회한이다. 만약 그랬다면 어쨌을 텐데,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하고 말을 줄이는 미적거림이다. 미처 하루가 지나기 전에 붙들고 미련을 쏟는다. 그런 글은 아침에 읽으면 처참하다. 값싼 위로를 운운하며 쓴 글엔 자비가 없으니까. 역시 잠을 자는 게 낫다. 아침에 좀처럼 몸을 일으키기 어려워 천장을 보다가 한 생각이다.

Henri Cartier-BressonFrance 1908 - 2004

카뮈의 <페스트>는 말 그대로 역병이 창궐한 가상 도시를 그린다. 알제리 해안 도시 오랑 그리고 그 안에 갇혀버린 각기 다른 사람을 구경한다. 고전 문학이지만 지금과 지금도 그와 다를 바 없이 산다. 카뮈가 그린 오랑은 서울로 바꿔도 다르지 않다. 어느 날부터 쥐가 들끓고 영문도 모른 채 죽어 나가도 사람들은 별 일 없다는 듯 출근한다. 연유 모를 사망자가 뉴스를 장식해도 점심에 커피를 마시며 떠든다. 여러 인간이 모여 그럴싸한 삶을 꾸리지만 의뭉스러운 마음을 내색하지 못한다. 그렇게 살다 불시에 습격한 이물질에 호들갑을 떤다. 그런 멍청한 꼴을 보고 있노라면 사는 게 우습게 느껴진다. 늘 용을 쓰며 살아도 이 모양이니 굳이 아등바등할 거 없지 않나.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계획은 어긋날 리 없으니까.


원인 모를 역병이 퍼지자 수많은 사람이 다들 비슷해 보인다. 절대적 고통 앞에선 인간은 한 모습으로 수렴한다. 시름시름하고 늘 날이 서있다. 그간 인류가 잇따른 재앙 앞에서 취한 모습을 떠올려보라. <페스트>가 지금도 서점 스테디셀러에 담긴 이유는 이처럼 고통의 보편성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재난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예나 지금이나 꼴불견이다. 2호선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출근하는 우리네 인생이 다들 비슷한 것과 같은 이치다. 오랑 시민들은 마치 통증에 갇힌 수인처럼 옴짝달싹 못 한다. 그럴 땐 고고한 개인주의도 말뿐이고 오직 앓는 소리만 난다.


누구나 제 삶을 노래한다. 난 그렇게 믿는다. 다만 거기엔 무구한 쪽과 음습한 쪽이 있을 뿐이다. 난 어둡고 습한 쪽에 끌린다. 내게 삶은 밤이고 우울이며 고단함이다. 사위가 컴컴해도 애착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밤의 고요 때문이다. <페스트>에서 '타루'는 이런 말을 한다 “이건 성실성의 문제예요.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타루는 우연히 관광을 왔다가 페스트로 인해 도시에 갇혔지만, 아랑곳없이 맞선다. 엄연한 비극 앞에서도 성실하게 노래한다. 타루는 페스트가 사라지지 않을 저변임을 안다. 탈락을 확정하고 잔여 경기를 뛰는 선수처럼 안쓰럽다. 그럴 때마다 타루는 쉬지 않고 기록한다. 어수선한 타인들이 사라지고 온전히 혼자일 때 생각을 다듬어 쓴다. 텅 빈 노트에 적힌 고민이 그가 사는 방식이다. 단어 하나하나 조탁에 신경 써서 또렷하게 만든다. 타루의 노래는 기록이며 거기엔 다행히도 빈틈없는 문장이 적혀있다.

Henri Cartier-Bresson: A Decisive Collection

의사 리유도 있다. 그 역시 외지인이지만 페스트에서 도망칠 마음은 없다. “앞으로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이 일들이 모두 끝난 다음에는 무엇이 올 것인지 나는 모릅니다. 당장에는 환자가 있으니 그들을 치료해야 합니다.” 그는 우선 눈 앞에 펼쳐진 재난에 대항키로 한다.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손을 놓지는 않겠다는 입장이다. 마치 지식인 카뮈의 자의식처럼 느껴지는 리유는 뭔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지성을 토대로 생각하고 근사치를 구하는 태도다. 비록 가닿지 못할지라도 우선 책상에 앉는다.

이처럼 타루와 리유는 영웅적 면모와는 거리가 먼 인간상이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사람이 납득 가능한 행동을 취한다. 마치 조지프 콘래드의 유명한 격언, 행동이 위안을 가져다준다는 오래된 말과 일치한다. 카뮈는 두 사람에게 활약상 대신 버티는 삶을 준다. 난 소설을 읽는 내내 까마득한 어둠에서도 작은 소일거리를 찾아내는 그들을 사랑했다. 그래서 소설은 대설이 아닌가 보다. 소설이어서 타인의 작은 마음을 은유하여 세계의 막연함을 형상화한다. 가상의 도시 오랑에서 벌어진 페스트는 허구지만, 현실로 삼투합한 문학은 내게 엄연한 뼈아픔이다. 도시엔 혼돈을 반기는 사기꾼과 본분을 망각하고 달아나기 바쁜 언론인, 불안을 팔아 신을 들먹이는 놈팡이, 관성을 머금은 관료가 횡횡하는 도시. 난 어느 편에 서 있는 걸까. 어제 쓴 것도 오늘 행하지 못해 비척대는 꼴이지만 여전히 생각만 한다.


며칠 전 어느 모임 자리에서 낯선 질문을 받았다. 제 감정을 있는 그대로 공개된 자리에 다 쏟아놓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 누구나 아픈 일이 있고 그걸 숨기고 살아가는데 굳이 글로 다 꺼내놓는 심리는 뭔가. 난 한동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괜스레 부끄러웠다. 출근하고 퇴근을 해서 누군가를 만나면 잘 살다가도 노트북만 열면 우울과 몽상을 적는다. 쓴다고 괜찮지도 뭔가 달라지지도 않는데. 혹 누군가의 동정을 구하는 게 아니냐는, 누구도 묻지 않은 자문을 던진다. 내 약함을 타인에게 드러내 위로를 받으려는 얄팍한 마음을 들킨 것처럼. 막상 얼굴을 마주하면 결코 꺼내지 못할 속내가 노트에 빼곡하다.

난 글쓰기를 통해 나만 이렇진 않다는 걸 확인한다.

누구나 저마다 닥친 일에 급급해서 제 몫의 고통을 감내한다. 글을 쓸 때야 비로소 고단한 이들을 의식할 수 있다. 글을 읽으면 결코 모를 타인의 통증을 체감한다. 어쩌면 난 손쉬운 요행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질문을 애써 웃어넘겼지만, 난 이렇게 또 써서 편안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날 미워하지 말라고 썼다.


한동안 카뮈의 도시를 생각했다. 화장실에서 벽을 보다가, 노트북을 두드리다 창밖에서 차가운 새벽을 떠올렸다. 여전히 잘살고 있는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이후의 상상처럼 만약을 그렸다. 그들을 바다로 떠나보낸 지도 이제 오 년이 넘었다. 그새 까마득한 시간이 지났다. 일로 따지니 천 오백이 넘고, 그걸 시간으로 셈하면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는 고통이 쌓여있다. 난 그들의 통증을 감히 상상한다. 넘겨짚을 생각은 없다. 그냥 그렇게 떠올리다 막연함 앞에 선다. 우두커니 선 까마득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도시는 바쁘다. 여전히 남겨진 이들은 고통에 사무쳐 있지만, 그걸 알면서도 잊어버린다. 뉴스에서는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다고 떠든다. 어느 한쪽에선 이제 그만하라고 지겹지도 않냐며 쏘아붙인다. 시간이 흐르면 그들의 바람대로 다 잠잠해질 것이다. 마치 없었던 것처럼 또 다른 페스트에 급급할지도. 결국 내게 남은 건 계속 떠올리는 일뿐이다. 시대의 불운과 탁한 공기가 거리를 잠식한 이때, 그렇게 쓰며 달라질 건 없어도 날 다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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