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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25. 2019

무용지물 전시회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조지 오웰 저

힘든 하루를 마치고 모래 같은 밥알을 입에 넣는다. 심란함을 머금으니 TV에서 울리는 강원도 화재 현장도 다 먼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차 전화가 울린다. 어머니의 하소연.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진다. 속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다그쳐도 소용없다. 후회만 남길 전화를 끊고 한숨이 나왔다. 내 누추한 얼굴은 그녀를 돌볼 여력이 없다.


누군가 한 문장을 떠올리라고 하면 <안나 카레니나>를 떠올린다. “행복한 가정은 다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다 제각각이다.” 오늘 아침에도 지하철에서 고달픈 하루를 예감하며 이 문장을 되뇌었다. 난 행복한 사람은 문학을 멀리한다고 믿는다. 행복은 수월하니까. 모든 게 노래처럼 흘러간다. 행복과 가까우면 내가 미약해진다. 거치적거리지 않으니 관성에 머문다. 내게 문학은 불행에 가깝다. 이야기엔 고유한 어둠이 드리운다. 쓰라린 통증은 그 자체로 각인이다. 치통이 와이파이처럼 골을 울린다. 늘 지켜보던 사람이 모진 말 하나라도 건네면 고독을 실감한다. 그럴 땐 나라는 존재가 무수한 군중 속에서 오롯하다. 그래서 문학은 방에서 읽는 비극이다. 타인의 고통을 엿보며 나 혼자 부서지지 않음에 안도한다. 당신의 통증에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은 불행하면 글을 쓰나 보다. 내 불행을 뽐내려고 감정을 적는다.

한화가 요즘 잘한다, 드문 일이다

무용한 게 좋다. 가령 야구 같은 거. 십 년 가까이 하위권에 맴돌던 한화 야구는 패배의 아이콘이 되었다. 날이 선선해지고 프로야구가 시작하면 그들을 찾았다. 주황색 유니폼은 늘 져도 경기를 하니까. 책을 읽다가도 궁금해 힐끔거린다. 스코어보드엔 관심이 없다. 한화가 야구를 한다는 그 자체로 안도한다. 이기지도 못하는 팀이 여전하다는 게 기적처럼 느껴진다. 투수가 공을 던지는 제스처는 유려하다. 몸을 비트는 게 꼭 춤 같다. 목덜미에 굵은 힘줄을 세우곤 피가 꿈틀거린다. 그런 움직임은 일종의 낙관이다. 팽팽한 일상에도 효율과 발전의 가치를 벗어난 무용함이 펼쳐진다. 근심 없는 무의미의 축제. 그렇기에 세상 무용지물은 가볍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로 느슨한 문장에 끌린다. 심각한 얘기를 피하는 게 아니라 글이 뭔가를 쥐여주려고 힘이 들어가면 따분해진다. 글이 누군가를 바꿀 수 있다고 믿지 않기에, 난 밑줄 친 헤드라인보다는 은은한 내색에 끌린다. 적어도 내 글은 할 거 없는 시간에 쓸데없이 히죽거리면 싶다. 세상 의미심장을 비웃는 허송세월이길 바란다. 마치 한화 야구처럼.


조지 오웰은 왜 글을 쓰냐는 자문에 정치적으로 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물론 이기심이나 미학적이며 역사적인 충동도 있겠지만 정치적 목적이 최우선이다. 이건 일종의 선언으로 세상 모든 책상물림을 향한 경고다. 의도와 목적이 없으면 지극히 사변적인 글이 되니까. 조지 오웰은 팔을 걷어붙이고 사회의 절단면을 들여다본다. 작가의 미덕이란 공적인 도량일까. 난 슬쩍 불편해져서 그의 말을 애써 무시했지만, 나 역시 그렇다고 실토한다. 내 글을 읽는 이름 모를 이에 닿고 싶다. 내 의도대로 글에 공감해주고 뭔가 느꼈다고 말해주면 짜릿하다. 격려 한 마디를 위해 단어를 조탁한다. 신경 안 쓰는 척해봤자 소용없다. 퇴근길에 들른 카페에서 머리가 지끈거려도 되도록 시시해지지 않으려고 문장을 고르고 또 고른다. 이름 모를 그를 의식하며 버둥거린다. 깃털 같은 문장이지만 훨훨 날아가 숨결이 되었으면 좋겠다. 

파리와 런던은 골목 하나만 들어가면 가난한 이들이 내는 신음을 들을 수 있다.

 내 이기적인 마음과 다르게 조지 오웰이 말하는 정치적인 글이란 공공의 영역이다. 내가 스스로 안위를 살피기 위한 글쓰기를 하지만, 조지 오웰은 세상의 근심을 해결하려는 선의가 있다. 모두가 눈을 돌리고 싶어 하는 음습한 문제를 끄집어낸다. 겉이 번지르르한 이 도시에서 숨죽인 이들을 살핀다. 세상은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결기에 문장은 강철같이 두터워진다.



 세상 무용함에 감화된 나는 조지 오웰이 불편하다. 소설 한 편을 써도 사회를 향한 칼과 해결을 모색하는 글쓰기가 영 못마땅하다. 무슨 소설이 보고서도 아니고, 픽션에 왜 현실정치를 끌어들여.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그건 내 열등감의 발현이다.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그렇다고 미욱한 보탬도 없는 글을 쓴다는 자각. 넌 자기 연민을 팔며 무엇을 얻고자 하니. 한낱 불행을 전시하곤 우쭐하니. 내 글은 정체불명의 위성처럼 궤도를 빙빙 돈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숨기고 에두른다. 그러면 일상의 심연을 감출 수 있으니까. 사소한 문제를 상세하게 서술하면 큰 가치는 잊힌다. 글이 마치 진통제처럼 통증을 마비시킨다. 자기 위로의 글은 이처럼 내가 만든 폐곡선을 빙빙 돈다.


세상 신나는 것은 다 쓸데없다. 무책임하게도 쓸모없는 게 늘 재밌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것들이 통속을 비껴간다. 가혹한 시간에 밤은 책이 되고, 창문 밖으로 고독이 미적거린다. 카페에 들르면 얼룩을 가리려고 커피 한잔에 고개를 묻은 낭인이 그득하다. 어쩔 땐 세상이 무용지물을 위한 축제처럼 보인다. 그 증거로 요즘 서울 한 미술관엔 청량한 수영장을 잔뜩 그린 노 작가를 보기 위해 인산인해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헤엄치는 남자를 그리며 동아시아 작은 나라를 떠올렸을까. 그들이 자신의 그림에 감화되어 웅성거릴 줄 예측이나 했을까. 그의 그림은 쓸데없어 보이지만 구슬려보면 도움이 된다. 한구석에 내쳐진 감각을 상기한다. 도넛처럼 텅 빈 동공을 남긴다. 그건 불가해한 사유로 보이지만, 아무리 개운하려고 국물을 들이켜도 그릇에 남는 고춧가루처럼 엄연하다.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은 조지 오웰이 서른이 되기 전에 쓴 기록이다. 접시닦이 생활, 구빈원에서의 생활 등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밑바닥 생활을 거치면서 작가는 상류층 자본가는 프롤레타리아 폭동을 두려워할 뿐, 그들의 생활 개선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보잘것없는 노동자가 표출하는 밑바닥 본능을 단지 폭도에 대한 공포로 치부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에겐 생각할 겨를도 없는 노동을 맡기곤 자기들은 호의호식한다.

인류 지성의 토대가 되었다는 서유럽 주요 도시, 파리와 런던에도 굶주린 이들이 있다. 이 작품은 소설보다는 르포르타주로 읽힌다. 문장마다 분노, 절박함이 느껴진다. 사회를 개혁하지 않으면 살만한 세상은 없다는 단호함이 매섭다.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작가는 어떤 문제든지 뾰족한 수를 마련한다. 민주적 사회주의자로서 가난한 약자를 구호하고 지식인의 게으름을 꾸짖는다.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방향성이 뚜렷하다. 타인을 감화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려는 욕구다. 조지 오웰은 이 작품을 쓴 후 스페인에 가서 프랑코 정권의 파시즘과 맞섰다. 그는 행동주의자로서 총을 들고 거리에 나선다. 직접 보고 느낀 것만 적는다. 난 책을 읽으며 조지 오웰의 행동주의적 문학 태도가 순진해 보였다. 낙담과 냉소에 익숙해져선 그가 그린 마르크스적 유토피아를 비웃었다. 포기와 체념의 편에서 개혁가의 목소리에 하품을 쳤다. 소설의 백미는 파리와 런던 빈민굴을 훔쳐보는 재미다.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타인의 고난을 구경한다. 더러운 식당 음식과 일류 호텔의 비루함. 난 따라지들을 동정하며 읽었을까. 아니다. 연민을 가장한 흥미를 가진다. 난 디스토피아를 구경하는 방관자다. 그게 뼈아팠다.


삶의 구성물은 대부분 불행과 닿는다. 난 그래서 행복이라는 단어가 싫다. 불행을 어색하게 만드는 행복이라는 기본값은 폭력이다. 행복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보는 긍정주의는 질색이다. ‘불’ 자는 ‘행’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내게 가치 있는 순간은 대부분 불행에 기인한다. 음울한 생각에서 글이 솟는다. 어제 공들여 적은 글을 올렸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지만, 신경을 써서 문장을 다듬었다. 불행을 나열하고 들여다보았다. 쓰는 것이 쓰지 않지 않는 것보다 나은 건, 내 불행이 당신의 불행과 다르기 때문이다. 늘 죽을 쑤던 한화가 요즘엔 더 많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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