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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18. 2019

개인에게 자신을 돌려주는 일

태연한 인생, 은희경 저

 '요셉'은 글이 풀리지 않아 카페 통유리를 응시한다. 창밖은 무구한데 정신은 산란하다. 도통 집중을 못해 카페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가 돌아간다. 냉소를 머금고 내뱉는 숨이 거칠다. 그는 몸을 의자에 기대곤 날 선 생각에 젖는다. 염세에 찬 생각은 은희경의 단단한 문장으로 뇌까려진다. 알만하다 너라는 놈. 주말만 되면 동네 커피집에 얼굴을 디밀고 잘 써지지도 않는 글을 붙들고 낙담하는 너.


카페 창작론


 카페는 뭔가에 골몰한 사람들의 집결지다. 지극히 개인적인 그들은 무관심이라는 느슨한 연대를 가진다. 요셉은 막 우산을 털며 카페 문을 연 미인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그녀를 기틀 삼아 뭔가를 적는다. 잘 쓰는가 싶더니 어느새 백스페이스를 연속으로 때린다. 글자가 지워지면 다시 무책임한 공백이 덩그러니. 그 새를 못 참고 깜빡이는 커서는 요셉을 옥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구태의연하고 진부한 문장을 두고 볼 순 없으니까. 요셉은 슬슬 주인 눈치가 보여 근처 다른 카페로 자리를 옮긴다. 소심한 놈. 요셉은 요즘 슬럼프에 빠져있다. 난관에 부딪힌 그의 집필에 내 맘도 편치 않다. 과거에 매여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는 꼴이 남 일 같지 않다.

태연한 인생, 은희경 저

“고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적요로운 평화를 주었다. 애써 고독하지 않으려고 할 때의 고립감이 견디기 힘들 뿐이었다.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 속에 요셉의 삶은 흘러갔다. 요셉은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다.” (p.265)


 은희경 장편 소설 <태연한 인생>의 화자 요셉은 늘 카페를 찾는다. 매일 출근하듯 동네 핸드드립 전문점을 찾아 노트북을 편다.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허기지면 끼니도 때운다. 오전 내내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던 요셉은 카페에 앉아서야 기운을 차린다. 그는 오늘도 뭔가를 적어야 한다는 초조한 마음만 급히 챙겨 나왔다. 카페에선 그가 무참히 얼굴을 비벼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는다. 요셉은 이런 열광적인 무관심에 마음이 놓인다. 은희경은 이처럼 작정하고 카페를 본거지로 삼아 요셉에게 그녀의 자의식을 심는다. 눈치 채지 못하게, 때론 노골적으로 작가와 인물, 이름 모를 타자의 시선을 이야기에 포갠다. 회색 소음이 웅성거리는 카페에서 <태연한 인생>이 시작되는 셈이다.


 한때 요셉은 대학에서 소설 창작 강의를 했다. 당시 조교로 있던 제자 '이안'은 요셉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한 마디로 무구한 여자의 인생을 파괴한 악인이다. 현학적인 말로 그럴싸하게 도배된 책을 몇 권 펴냈지만 그는 위선자다. 요셉이 술자리에서 떠벌이는 개인주의란 타인에겐 무책임의 발로다. 예술은 말이야 개인에게 자기 자신을 되돌려주는 거야, 라며 일갈하는 요셉은 괴변으로 제 이기심을 포장한다. 그뿐만 아니라 인텔리 특유의 삐딱한 태도와 이른 결혼 실패로 말미암은 콤플렉스, 문단의 외면에 바닥까지 떨어진 자존감까지. 이런 복합적인 상황은 요셉을 상종하기 어려운 인물로 만들었다. 무엇보다 최악인 건 자존심이 밥 먹여 줄 리 없기에 누추한 생활고가 그를 옥죄고 있다. 이처럼 요셉은 막다른 길 앞에 서 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는 건 평소라면 홀가분한 일일 테지만, 일정이 텅 비면 예기치 않은 자기 연민에 시달린다. 고독은 제 의지로 고립될 때야 비로써 거머쥘 수 있다. 지금 요셉은 누가 보더라도 주류에서 밀려난 한물간 작가일 뿐이다. 세상엔 지루한 놈들뿐이니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도 괜찮다고 자위할 수밖에. 그는 카페에 앉아 태연하게 과테말라산 드립 커피를 시킨다.

 이안은 요셉을 오랜만에 찾아와선 자신의 영화에 출연해 달라고 제의한다. 요셉을 출연시키고 그의 캐릭터까지 고스란히 살리겠다는 참신한 기획이다. 과거 이안은 요셉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며 그가 지닌 위선을 언젠가는 깔아뭉개 주리라 다짐했다. 이제 나름 잘 나가는 감독이 된 이안은 자기 영화에 요셉을 출연시켜 제대로 망신을 줄 생각이다. 물론 요셉이 이안의 속셈을 모를 리 없지만, 오래전 연인이었던 '류'가 영화 제작에 참여한다는 말을 듣고 요셉은 마음을 바꾼다.


통속과 패턴


 예술과 달리 일상은 통속과 패턴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그게 속 편하니까. 유사 이래 새로운 이야기가 없듯, 일상 마디마디엔 우연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통속이 자리한다. 소설의 내러티브는 차마 진부함을 두고 보지 못하겠지만, 내 삶은 항상 미지근한 권태에 찌들어 있다. 매일의 반복이 무의미로 수렴하는 권태. 요셉은 새로운 누군가와 얼마간 교감하면 어김없이 밀어내기 바쁘다. 야멸찬 자기 비하로 파탄을 자초한다. 늘 사람을 피하고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는 여자를 향해 비열한 냉소를 뱉는다. 성욕에 못 이겨 비루해질 땐 그 무력감에 다시 카페를 찾는다. 다 잊고 뭔가 참신할 걸 써보겠다고 뻔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통속과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 첩첩산중, 은희경이 등장한다

 소설에서 과거 연인 '류'는 오로지 요셉의 기억으로만 유효하다. 소설 속 그녀의 인생은 오직 요셉의 회고로만 서술된다. 권태와 흥분, 체념과 극적 연출 효과를 두루 갖춘 류의 인생은 통속적이다. 하지만 그녀의 통속적인 삶을 회고하는 이가 바로 요셉이다. 그는 참신하고 독창적인 글을 쓰고 싶지만 늘 미끄러진다. 요셉은 류의 삶이 자신에게 남긴 매혹에 저항하지 못한다. 늘 새로운 이야기에 목을 매면서도 류에게만은 순간의 정념처럼 들끓는다. 충동적이며 순수한 의지를 휘감은 그녀를 통해 요셉은 통속의 전희를 맛본다. 류는 결국 패턴 안에 기생할 요셉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는 셈이다. 각자 인간에겐 의지해야 통속이 있고, 그 굴레 안에서야 비로써 예술도 빛을 발한다. 작위와 형식이 없이 바로설 수 있는 이야기란 없듯이. 은희경은 통속을 멸시하기보단 오히려 패턴 안에 머물 수밖에 없는 구태한 인간의 삶을 적는다.


첩첩산중


 실의에 빠진 요셉과 달리 난 그가 앉은 카페를 상상하기 바쁘다. 나 역시 수많은 카페를 거닐며 홀로 책을 읽으니까. <태연한 인생>을 읽으며 오랜 기간 동안 카페에서 창작의 고통에 시달렸을 은희경 작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요셉이 혼자 밥 먹기 좋은 식당을 찾았다가 산악회에 치여 먹고 싶은 생선구이를 즐기지 못하는 사건은 작가의 경험이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묘사다.

 은희경은 과거 영화에 출연했다. 홍상수의 몇 되지 않는 단편 <첩첩산중>이다. 정유미가 우연히 은희경의 집을 찾아가서, 선생님이 제일 잘 쓰세요. 이제부터 글만 쓸 거예요, 라고 말하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내가 실제 은희경을 처음 마주한 장면이다. 이후 은희경을 읽을 때마다 이 장면을 떠올린다. 흥미로운 건 영화 <첩첩산중>의 주요 인물 셋이 모두 작가라는 사실이다. 문성근은 저명한 작가이자 교수고, 이선균은 막 떠오르기 시작한 작가다. 등단도 못하고 빌빌 거리며 두 남자와 사귀는 정유미는 창작에 못 이겨 악다구니를 쓰는 게 꼭 요셉처럼 보인다. 제자가 애인이고 친구가 또 그 애인의 애인인 이런 상황은 홍상수식 아이러니의 필수조건과 같다. 배운 놈이고 덜 배운 놈이고 여자랑 자고 싶어서 말이 많다. 그러다가도 어느새 귀여워져 넋 놓고 보게 되는 그런 영화다. 영화에서 은희경은 정유미가 바라는 스타 작가로 등장한다. 정유미는 운전하다 말고 죽어도 돼 죽어도 돼 스스로 뇌까린다. 그녀는 스스로에 못마땅하고 집필에 절실하다. 성공을 향한 욕망에 배겨내지 못한다. 그녀는 요행을 통해 뭔가 이루려 하지만 결국 이 지긋지긋한 인간 사이에서 폐곡선을 그린다. 그녀는 은희경처럼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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