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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ul 13. 2019

낭만적 여행과 그 후의 독서

여행의 이유, 김영하 산문

여행과 책이 어울리지 않는 이유


 난 여행지에서 책을 읽지 못한다. 글자 사이로 틈입하는 낯선 신호를 외면키 어렵다. 기내에서도 책을 펴지만, 괜스레 감회에 젖어 멍해지기 일쑤다. 작년 유럽 여행엔 흑사병에 관한 책을 챙겨 갔지만 몇 장 읽지도 않고 그 무거운 걸 고스란히 가져왔다. 계획으론 책을 다 읽고 유럽 한 카페에 두고 오려 했지만, 여전히 읽지 못했다. 그런 날 스스로 한심해하면서도 어쩌면 그런 계획의 어긋남 속에 여행의 본원이 있지 않을까 지레짐작한다.

 여행 중 기차 객실에서 마음먹고 소설을 펼쳐도 그날 우연히 골목에서 마주한 이름 모를 이가 떠올라 책을 덮는다. 그러다 창밖을 보면 이국 정치에 휩싸여 아련해지고, 구글 검색창이 아니면 다시는 오지 않을 도시를 바라본다. 이름 하나 외우기 힘든 마을에 온 감각을 열고 헤벌쭉한다. 하루 일정이 끝나 호스텔에 누워도 독서는 어림도 없다. 내일 일정을 짜고 그날 찍은 사진을 인스타에 올리며 히죽대기 바쁘다. 비싼 호텔이 아니면 조명이 어두워 독서 따윈 사치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여행지에선 장소, 사물, 심지어 끊임없이 들려오는 여러 소음마저도 그 존재를 인정받으려 아우성친다. 과다 정보에 시달리다 보면 욱신거리는 다리와 함께 밤은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고로 내 여행에선 책을 펼 시간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여로에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상황과 직면하니 책 따위에 흥미가 가질 않는다.

 여행은 질 들뢰즈가 말한 순수한 시 지각적 상황의 발현이다. 마치 여정을 구성하는 요소 하나하나가 날 지우는 느낌이 든다. 내 존재는 과거와 미래를 통해 지탱되는 맥락일진대, 여행은 앞뒤 다 자르고 오롯이 현재만 도드라진다. 그저 지나가는 순간에 머물지 않고, 시청각적 이미지가 온 세포를 깨운다. 그건 책과 달리 생동감이 넘쳐 와이파이 신호처럼 생각을 울린다. 김영하는 산문 <여행의 이유>에 이런 문장을 적었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모든 게 현재시제로 서술된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련,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은 원경으로 물러난다.” 그렇게 행랑을 챙겨 집에 돌아오면 벌어진 시차처럼 현실 감각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여행을 잊는다. 그러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 비로소 그 여행이 내게 뭘 남겼는지 떠올릴 수 있다.


독서, 축소 지향의 여행


 여행과 달리 독서는 일상에서 잠시 엿보는 일탈이다. 여행보다는 여파가 미미하지만, 선형으로 쭉 뻗은 하루에 가지를 치는 밤도깨비 여행에 비견할 수 있다. 내 일과는 항상 급히 처리해야 할 일과 급하진 않지만 중요한 일로 빼곡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뭐부터 처리할지 미적거린다. 하지만 책은 앞뒤가 정확한 세계다. 덧붙여 독서란 타인을 주시하는 행위이며, 그럼으로써 우리는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일상이 결국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예측할 수 있다. 문장에서 어떤 상징이나 은유를 발견하며, 이에 그치지 않고 저만의 방식으로 이해하려 애씀으로써 사고를 확장한다. 내 구태의연하고 틀에 박힌 일상이 전혀 다른 양상을 가진 허구의 세계에 포개지며 색다른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적어도 불시에 찾아든 딜레마에서 문학이 어떤 말을 걸어줄 거란 기대를 한다. 김영하의 표현대로라면 독서란 여행과 같이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전혀 다른 무언가를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행위다. 거기다 책은 단출하고 시공간의 제약도 받지 않기에 여행이 가진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 여행엔 비할 바 없지만 짧은 여행도 쉽지 않은 나 같은 사람에겐 독서가 가진 축소 지향의 여정이 제격이다. 퇴근하고 하루가 저물기 시작함을 의식할 때 책을 펼치면 방구석에 누워서도 방랑자의 기분으로 타인을 구경할 수 있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여행으로도 결코 실감할 수 없는 내밀한 기분을 맛보기도 한다.

마드리드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는 브론스키와 만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책을 꺼내 든다. 그녀는 소설을 읽었고 무슨 내용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읽는다는 것, 즉 책에 쓰인 타인의 생활을 뒤따라간다는 게 왠지 모르게 불쾌했다. 그녀는 당시 무엇이든 직접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브론스키가 남긴 채취와 제스처를 거역할 수 없었다. 헤아릴 수 없이 긴 벌판을 가로지르는 기차에서도 마음이 밀접해진다는 말이 뭔지 알 수 있었다. 현현한 욕망이 발현하자 책이라는 간접 경험은 시시하게 보일 수밖에. 소설을 읽는 행위는 가상의 인물을 따라 낯선 풍경에 발을 디디는 경험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손에 쥘 수 있는 실제가 눈앞에 아른거리면 소설은 그저 일차원의 가상에 머문다. 실감이 없으니 무력하고 허탈한 마음에 시달린다. 이처럼 독서가 가진 한계를 인정할 때 여행은 전에 없이 큰 가치를 지니게 된다. 꿀 같은 휴가에 굳이 비싸고 번거로운 여행을 왜 떠나야 하는가를 묻는 이에게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에서 이런 답을 한다.

“지금도 나는 비행기가 힘차게 활주로를 박차고 인천공항을 이륙하는 순간마다 삶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는 기분이 든다. 휴대전화 전원이 꺼지면서 누군가가 불쑥 전화를 걸어올 일이 없어진다. (중략) 여행에 대한 강렬한 기대와 흥분이 마음속에서 일렁이기 시작하는 것도 그때쯤이다. 내 삶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순간이다.”

프라하

김영하는 여행의 여파를 적는다


 <여행의 이유>를 읽고 생각했다. 난 여행 에세이를 싫어한다. 여행이란 한 개인의 고유한 경험인데 그걸 글로 읽으면 감질난다. 여행은 개인에게 압도적인 경험일지 몰라도 그걸 글로 펼치면 흔해 빠져 보이기에 십상이다. 책이란 어쩔 수 없이 간접 경험이며, 아무리 곡진하게 적어도 바깥에 선 자에겐 한갓진 소리로 들리기 쉽다. 단순히 남의 떡이 커 보이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못된 심보가 아니다. (맞을지도) 그래서 김영하는 걸출한 여행기는 대부분 작가가 겪는 이런저런 실패담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좌충우돌 모험기를 읽으며 독자는 편안한 소파에 앉아 재난 영화를 보듯 고난을 멀찍이서 구경한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미슐랭 요리를 먹고, 별 네 개짜리 호텔에서 셀카를 찍다, 바에서 돈 많은 훈남을 만나 꿈같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라면 그 누구도 여행 에세이를 달가워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의 산문 <여행의 이유>는 여타 여행에 관한 산문과는 결이 다르다. 이 책은 자신의 여행을 복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행 이후 일상에 끼친 여파를 살핀다. 때 되면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일상에 자국을 남기는 여행의 이유를 찾는다.


 김영하는 프랑스 작가 실뱅 테송의 말을 빌려 여행은 여행자가 외부 세계에 감행하는 습격이며, 여행자는 언젠가 노획물을 잔뜩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약탈자라고 규정한다. 난 간혹 명동 거리를 걸으며 무수한 관광객에 질릴 때가 있다. 명동 성당마저 빼앗긴 기분이 들어 얼른 군중을 피해 을지로 귀퉁이로 달아난다. 난 그들을 달가워 않는다. 어렵사리 돈을 모으고 짬을 내 휴가를 온 이들을 난 현지인이라는 이름으로 멸시한다. 유럽에서도 주요 관광 도시가 오버 투어리즘으로 고생하고 있다. 도시를 점유한 여행자에 의해 내 소중한 터전에서 밀려나고 내가 자주 가던 카페가 관광객에 잠식된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수전 손택은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진다 해도 여행은 영혼의 식민주의라 말하기도 했다. 이런 관점에 대해 김영하는 자신이 배낭여행을 하던 시절을 떠올린다. 낯선 타국에서 기대치 않게 환대를 받았던 경험은 누구나 있으리라. 그들은 나를 도울 아무런 이유도 없었지만, 그저 여행자라는 이유로 친절을 베풀었다. 내가 잘나거나 불쌍해 보여서가 아니라 모든 게 낯선 손님이라고 커피 한 잔을 대접했다. 김영하는 이를 보답하기 위해 가끔 길을 헤매는 외국인에게 친절을 베푼다고 한다. 자신이 받은 덕을 순환시키고자 한다. 그것이 이 지구에 잠깐 머물다 떠나는 무수한 여행자들이 서로에게 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일이라고 말한다.

런던

다시, 아침 출근길에서


 난민 문제는 한국뿐 아닌 세계의 화두다. 과거 특정 인종에 대한 약탈로 점화되었던 양상이 요즘엔 외지인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양상만 다를 뿐 세계의 비극은 용어를 달리해 반복된다. 어디 그뿐인가 한국도 세대, 종교, 가족, 젠더 갈등으로 들끓고 있다. 겉으론 친절한 척 웃지만, 지성의 탈로 가린 속내는 SNS에선 고스란히 드러난다. 선동가에 의해 단순히 직조된 구호에 휘둘려 습관처럼 각을 세운다. 배척의 논리처럼 쉬운 피켓 구호가 어디 있을까. 난 가끔 내가 유럽을 그리워하는 이유가 이 갈등의 도시에서 도피하고 싶은 욕구에 있는 건 아닌가 의심한다. 김영하는 이런 도피 심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대결한다. 때로는 내가 강하고, 때로는 적이 강하다. 적의 세력이 나를 압도할 때는 이길 방법이 없다. 그럴 땐 삼십육계다.”

 난 고고한 유럽이라면 속된 갈등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있다. 뉴스를 조금만 훑어봐도 지금 EU가 분열되기 직전이라는 걸 알 수 있지만, 인스타로 지인의 여행을 구경하다 보면 내 입은 헤벌쭉한다. 여행을 통해 단독자가 되어 모든 사회관계를 끊어내면 얼마나 시원할까. 카페에 앉으면 책은 안 읽고(도대체 언제 읽냐) 대놓고 스카이스캐너며 인터파크 항공 같은 항공 예약 사이트를 띄워놓는다. 유럽 아무 도시나 검색해서 가격을 알아본다. 전 세계를 그렇게 한 바퀴 돌다 급히 내 처지를 깨닫고 창을 닫는 식이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쓴 <빨강 머리 앤>엔 이런 말이 나온다. 여행이 정말 좋은 건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이 끝나고 인천공항 터미널에서 도착하면 현실감이 엄습한다. 비참한 얼굴로 내일 출근 시간을 챙겨야 할 따름이다. 여행은 일시적인 쾌락이고 일상은 지독할 정도로 현현하니까. 김영하의 산문은 여행의 이유를 말하지만, 난 읽을수록 절실히 이 도시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 그러더라 행복은 반복에서 온다고. 일상은 매일 아침 알람을 끄고 도리질 치는 실제다. 이제 여행에 대한 글을 이만 접고, 책을 펴야 할 시간이다.


사진 출처 : 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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