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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ul 14. 2019

풍경의 쓸모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유희경

유희경의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은 여타 시집들과 다르게 내가 즐겁게 봤기에 가벼운 필치로 적는다. 처음 읽었을 때 그날 오후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잠시 착각이 들더라. 세상은 살만한 곳이고 나에게도 이런 감각을 글로 풀 수 있는 세심함이 있을 것 같았다. 혹은 내가 시인이 품은 저류의 감정을 누군가에게 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낙관에 으쓱했다. 이 시집은 그런 의욕을 일으킨다. 그리고 시인과 나 사이에 수많은 감정이 오가는 중, 그 표피 아래 숨겨진 풍경이 그려졌다. 하나의 풍경이 그려지면 그다음부터는 자연스럽게 불빛을 가려낼 수 있다.


같이 앉아서 양손을 감추고

참 오래된 것 같네, 하고는

어둑해지는 두 사람의 시간이

한 사람의 사물로 변하기도 한다

나는 그것을 만지고 또 만져본다

―「직선의 소리」 에서 발췌


 오늘 카페에 앉아 이 글을 쓰는 도중 주위를 둘러보니 뭔가를 끄적이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띈다. 평소엔 의식하지 않았던 순간이다. 자연스럽게 눈이 돌아가고, 힐끗 돌아보며 생각한다. 여기 이 사람들 모두 각자 심오한 인생을 사는구나. 어떤 의미에서는 고독하지만, 창밖으로 눈을 돌리면 찰나의 의욕이 선다. 시의 힘이라는 게 별거 있나. 돈벌이는 안 되고, 읽고 나면 사라져 버린다. 그래도 만에 하나 이 시집을 누군가에게 선물한다면 이런 말 정도는 남길 수 있겠다. 비효율적 혼돈의 도시에서 기호화된 언어로 소통하는 게 겨우 주고받는 말 전부다. 그런 상황에서 내러티브는 중요하다. 우리가 안고 있는 개인적인 내러티브를 궁금해하고 끊임없이 되물어보는 것. 그들 각자가 비단 더딜지라도 탄탄한 언어를 구축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부지런함. 첨엔 어색할 지라도 한 마디 정도는 보태는 무릅씀이 돋보이는 시집이다. 유희경은 그런 찰나를 포착해선 근면하게 적는다.


계절은 밑동만 남긴 채 쓰러져버리고 잠마다 꿈마다 구멍이 뚫린 그것을 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소리를 내며 쓰러졌지만, 아직 아무 때도 아니었다 너의 이름을 썼다가 지운 자리마다 나무가 자라고 빽빽한 울음들이 가득했으나 아직 아무 때도 아니었다 지난 염소들은 말뚝으로 남았다 별만이 별을 삼킨다 그래도

―「벌목」에서 발췌


 운전석에 앉아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들을 유심히 쳐다볼 때가 있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어떤 사람은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껌을 씹는다. 음악을 듣는 여고생은 시니컬한 표정으로 전방을 응시한다. 난 그들을 보며 짐짓 놀라워한다. 손가락으로 네모를 만들어 그들을 거기에 놓곤 따로 떼어본다. 그 속에 이야기를 가미하고, 그의 우주를 생각한다. 차마 흘려보내지 못해 서 있는 꼴을 붙잡는다. 한참을 보다 보면 그들은 곤란한 표정을 미처 감추지 못해 일그러진다. 유희경의 시는 주저하는 말투와 혹시 엇나갈지 모르는 시간에 유독 민감한 자아가 있다. 곤두선 감각이 어떤 순간에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기다가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사실적이라 가슴을 시큰하게 한다. 누구나 골치 아파 모른 척하는 걸 끄집어낸다. 그런 사소한 기운은 가끔 실소를 자아내기도 하고, 꿈속 장면처럼 몽롱하게 취해버린다. 집 앞뜰을 바라보며 쓸모를 따지기 이전에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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