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챠 <졸업>
졸업을 봤다. 이렇게 좋을 줄 알았으면서도 생각만큼 좋아서 볼이 얼얼했다. 영화가 민망하고 우스운 데다가 기묘한 분위기라 자꾸 볼을 꼬집었다. 이제야 봤다는 게 신기할 만큼 이 작품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왔다. 그런 영화가 있다. 언젠가 더 애틋하고 각별한 시간에 보려고 저장해놓은 그런 영화. 하지만 그런 시간엔 켜지지 못했고, 결국 아주 우연한 시간에 손이 갔다.
이야기는 되게 한국 드라마 같다. 익숙하게도 어린 더스틴 호프만이 아버지의 동업자 집안의 나이도 지긋한 로빈슨 부인과 바람이 나는 얘기다. 하긴 이 당시 더스틴 호프만은 유아인보다 잘생겼고, 상대역인 로빈슨 부인을 연기한 앤 밴크로프트는 김희애보다 섹시하다. 영화는 옷을 훌러덩 벗는 로빈슨 부인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휩쓸려가는 더스틴 호프만의 어눌한 연기로 시작된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주인공은 앞으로 뭘 하고 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 탓에 심란하던 참이었다. 궁지에 몰리면 유혹은 더 극심해지기 마련이다. 유혹이 빠져나갈 구멍으로 여겨지기에 도덕적인 타락을 방관할 수 있다. 고작 더벅머리 스무 살 아닌가. 금기를 보면 손사래 치다가도 달려들고 싶은 게 그 나이다. 고작 나이 많은 여자랑 나누는 섹스가 자신이 세상을 향해 내지를 수 있는 단말마의 고함이라도 되는 듯이 필사적이기 마련이다. 그는 로빈슨 부인에게 말한다. 제가 아는 아줌마 중에 제일 섹시해요.
그는 로빈슨 부인과의 섹스를 본격적으로 즐기기 시작한다. 속 깊은 대화를 좀 하고 싶었는데 부인은 그냥 젊은 몸을 원할 뿐이다. 그는 이 막장극에 심취했는지, 슬슬 지겨워졌는지 어쩌자고 로빈슨 집안의 딸 일레인과 교제를 시작한다. 처음엔 귀찮고 찜찜해서 안 만나려고 했는데, 보니까 얼마나 좋아. 예쁜 데다가 어리고 말까지 잘 통하네. 이건 내 여자라고 생각할 정도로 뿅 가는 거다. 하지만 결국 그는 솔직하게 '네 엄마랑 잤다'라고 털어놓는다. 일레인을 사랑하기에 어쩔 수 없이 고백한다. 그건 용기지만 헤어짐을 막을 도리는 없다.
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차인 남자가 택하는 선택은 극단적이니 조심해야 할 터다. 그는 요즘으로선 잡혀가기에 십상인 방법을 택한다. 일레인이 다니는 대학 캠퍼스에 가서 무작정 서성이기. 청강하는 척하면서 그녀를 훔쳐보기.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는 허튼짓. 하지만 이를 어째, 그녀는 벌써 다른 우스꽝스러운 남자 놈과 결혼을 약속한 상태다. 생긴 건 꼭 원숭이처럼 생겨서, 뭐로 보나 나보다 못한 놈인데 그녀는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제 끝이 난 걸까. 그는 상심해서 짐을 챙기고 집에 돌아가려고 한다. 이렇게 끝난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어쩔 텐가. 이제 취업도 해야 하고, 정신 차리고 사람 구실도 해야 하는데. 근데 놀랍게도 그녀가 문을 두드린다. 결국, 제 발로 그가 묶는 방을 찾아온 거다. 역시 남녀관계는 알 수가 없다. 그는 입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를 막을 길이 없다. 근데 섣부른 낙관은 금물이다. 여자 맘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 없지. 네가 지은 죄가 막중한데 그렇게 쉽게 돌아오겠냐. 쉽게 돌아와도 문제가 있는 거지. 그녀는 그에게 돌아온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냥 놓치긴 아쉽고 순순히 다시 만나기엔 믿기 어려운 그를 떠보려고 한다. 순수해 보이는 그녀도 계산 들어간 거지. 그를 패닝 된 상태로 걸어두고 이도 저도 아닌 말을 한다. 그를 보면 몸이 끓어오르지만, 그렇다고 현실적인 판단을 무시할 순 없다. 그냥 당장은 내 곁을 떠나지 말라고 말한다. 자기에겐 결정할 시간이 필요하고, 너는 죄가 있으니 기다려야 마땅하다고 읊조린다. 이게 뭔 소린가 싶지만, 그는 그녀를 잡고 싶었기에 마냥 벅차기만 하다. 순수한 건지 멍청한 건지.
이제 우리가 사랑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결혼식장에서 신부를 훔쳐 달아나 버스에 오르는 익숙한 엔딩신. 사실 우리가 졸업에 관해 아는 유일한 장면이기도 하다. 나도 그랬다. 로맨틱하고 달콤한 도주 아닌가. 하지만 좀 더 지켜보면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버스가 출발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는 게 어색하다. 뜨뜻미지근한 이 눈빛은 뭘까. 두 사람은 이제 어떻게 살까. 계획은 있을까. 곡절을 겪은 만큼 더 탄탄해질까. 그들이 처한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나갈까. 젊으니까 뭐든 가뿐히 처리하려나. 시작의 설렘과 무턱대고 맞이한 결혼을 향한 두려움이 교차한다.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고, 출근을 매일 반복하는 게 기꺼울까. 충동적인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려나. 아니 왜 벌써 걱정을 해. 그걸 고민한다고 잘 되는 것도 아니잖아. 무턱대고 신부를 잡아챘으니 이제 무턱대고 살면 그만인 것을. 난 올라가는 엔딩 크레디트를 다 올려 보내고 두 사람이 나눌 대화를 상상했다. 믿음직한 말을 건네는 그, 화답하듯 더 큰 포부를 밝히는 그녀. 이 작품의 마지막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결국 내 몫이다. 영화는 굳이 두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의 결정이 불러올 결과를 마주할 자신이 있냐고. 지금 이 선택을 감내하고 이겨낼 마음이 생기냐고. 내가 선택했으니 어쩔 수 없는 거냐고. 나는 두 사람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자리를 떴다.
오늘도 철봉을 하러 길을 나섰다. 볕이 너무 좋다. 오늘은 바람이 상쾌하게 몸을 감싼다. 종일 어떤 위안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다녔다. 결재하다가 잠깐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고, 보고서를 쓰다가 잠시 어제 읽던 소설이 가져온 생각을 메모했다. 난 그간 우리를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거리를 두니까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특별함을 가져오려고 말을 만들었지만, 사실 다들 그런 특별함을 만들어내며 산다. 별반 다를 게 없는 특별함은 빛이 나지 않는다. 철봉을 끝내고 샤워를 했다. 헬스장이 열리면 하체랑 데드리프트부터 할 거라고 다짐했다. 대충 몸을 닦고 침대에 누워서 또 인스타그램을 켰다. 자꾸 나를 부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신호들이 있다. 여러 곳곳에서 화려하게 사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조용한 방의 적막을 이겨냈다. 이들은 또 얼마나 특별한지. 나도 이런 특별한 애정으로 살만했다. 구차하고 미련한 계산을 안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특별해지려 애썼다고 해두자.
카페만 들어가도 알 수 있다. 온갖 만남이 있다. 건너편에 앉아도 되는 걸 굳이 의자를 끌어다 옆에 앉아야 하는 다정함이 있다. 어느 자리는 다시없을 환희가 있고, 어느 자리엔 너덜거리는 와중에도 붙들고 있는 고집도 보인다. 모든 걸 다 내놓을 수 있는 사이지만, 또 어떨 때는 끝까지 숨기기도 해야 마땅한 관계들. 솔직하게 날 드러내서 내보이는 노력을 하고, 멋져 보이기 위해 허세도 섞어 말을 한다. 어쨌든 지금은 우리가 꽤 잘 맞는다고 느낀다. 시간이 지나 삐걱거리더라도 지금은 아무런 걱정 없이 감정을 쌓아간다. 어디서 말하기 부끄러운 말장난을 계속하고, 누구에게나 숨겨 마땅한 치졸한 모습도 고백한다. 사실 내가 그의 치부와 허점을 알아갈 때 고유한 기쁨을 느꼈다. 그건 나만 알고, 나는 친히 보듬을 수 있는 내밀한 거니까. 근데 그게 이제 내 것이 아니라면 어쩔 셈인가.
자책감은 나를 소모한다. 그건 잘 떨어지지 않아서 철봉을 할 때는 물론(이때가 가장 세긴 하다) 긴 시간 걸을 때, 카페에서 커피를 시키고 기다릴 때, 초밥을 먹기 전에 간장을 따를 때, 특히 잠들기 전 천장을 볼 때 몸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진다. 그게 살이라면 좋겠지만, 유심히 보니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감정에 가깝다. 나를 멍청하다고 생각하고, 굴욕적인 행동을 하고도 그게 내 탓이라고 믿어버린다. 나와 달리 평온할 상대를 생각하면 불을 끄고 눕기까지가 되게 어렵다. 불을 꺼야 자는데 불을 끄러 가지 못하니 새벽이 점점 더 짧아진다. 이불을 치우고 화장실에 가보지만 소용없다. 손이 끈적한 것 같아 비누로 씻어봐도 왠지 찝찝하다. 그냥 일찍 잠들고 싶은데 그냥 드러누워 있으면 가관일 걸 알기에 불을 끄고 팟캐스트를 켠다. 언제든 전과 같이 마음을 돌릴 수 있다는 속 편한 믿음은 어디에서 왔을까. 비겁하게 다 없던 일로 하자는 말은 어떻게 그리 쉽게도 꺼냈을까. 과거가 될 용기도 없으면서 집착은 왜 그리 심한지 원. 다시 몸을 돌리며 가장 몸에 좋고 잠이 잘 오는 자세라는 오른쪽 손을 쭉 뻗고, 우측 볼을 천장을 향해 누운 다음에 다리 사이에 베개를 끼고 입맛을 다신다. 내가 잠을 이루는 필살기니까 오 분 안에 잠들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내 바람대로 잠은 오지 않고 다시 졸업을 떠올렸다. 섹스에 탐닉한 관계, 왠지 모르게 순수해 보이는 또 다른 관계. 그에겐 어느 쪽이 더 절실했을까. 그는 침대에 누워서 그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