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의 서재 <콰이어트>
최근 회사 동료들과 대화가 잦다. 심심찮게 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일에 대한 얘기부터 시시콜콜한 사생활까지 여러 얘기를 들을 수 있다. 난 늘 내가 다가오기 쉽고 어떤 문제든 얘기를 나눠볼 만한 사람이길 바랐다. 매사 유머러스하고 말을 꺼내기가 부담 없는 동료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개그를 날렸는데, 그들의 표정이 어두워 유머 선집을 사 보기도 했다. 그래서 하나둘 내 사무실을 찾는 이들이 늘어날 때마다 긍지를 가졌다. 내 방 문턱이 낮아졌고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여러 얘기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 역시 미루어 추측하던 것과 달리 현저히 상반된 생각이 많았고, 짚고 넘어가야 할 건 노트에 남겼다.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없으니 우선 적어두고 밑줄을 그어뒀다.
전과 달라진 건 아침 시간이다. 사람 마음이 어찌나 간사한지 커피로 목을 축이면서 일에 집중할 때 방문을 두드리자 성가시기 시작했다. 자꾸 날 찾으니 그간 세워져 있던 문턱이 그립기도 하다. 튼튼하던 문턱을 괜히 없앴나 싶다. 내 일만 딱 하고 퇴근하던 때가 그립기도 하다. 경계를 넘어 스멀스멀 밀고 들어오는 그들 각자의 사연은 나 하나도 수습하기 벅찬 일상을 짙은 물감으로 덧칠했다. 우린 같이 모여 일하는 사이니, 업무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건 오산이었다. 직장이란 곳은 어찌나 고충이 많은지 말이 말을 만들어낸다. 불쑥불쑥 찾아오는 통에 업무와 사생활의 경계는 점차 희미해져 간다. 다들 일보다는 관계가 힘들고, 단순한 일에도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제기한다. 예전부터 버릇처럼 되뇌던 말이 다시 목젖까지 치달았다.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돼.” 이거 유아인이 영화에서 한 대사인데, 난 지드래곤이 랩으로 한 뉘앙스가 맘에 든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허탈하게 되뇐다.
내게도 어떤 권위 같은 게 생긴 걸까. 권위라면 좋을 테지만 의식할 새 없이 삐져나온 권위의식이라면 어쭙잖다. 내 고요한 오후를 방해하는 낯선 이의 방문이 못마땅하지만,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위치다. '아니 왜 좋은 얘기는 하나도 없고, 다 불평불만만 많은 거지? 나 땐 안 그랬는데. 내가 너무 사람 좋게 굴어서 쉬워 보이나.' 드립 커피를 내리기만 하면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곧 점심시간인데 어김없이 똑똑. 그래 회사생활이 다 어렵지. 할 말이 많은 것도 알겠어. 왜 화나지 않겠어. 사색과 명상 대신 지끈지끈한 고민거리를 듣다 보면 내 마음도 덩달아 시끄러워진다. 이제 진짜 밥 먹으러 갈 시간이야.
나는 사회생활 초기에 다른 팀원은 물론이고 윗분과도 잘 지내는 모범 사원이었다. 심지어 입사하자마자 죄다 선배들인 축구동아리에 가입했고, 주말엔 말 많은 동기 모임, 같은 직급끼리 모여서 선배 욕하는 친목회, 일부러 오비 내면서까지 져주러 가는 골프 모임까지 하면서 친목을 관리했다. 지금은 희대의 개소리라고 생각하는 <카네기 인간관계론>을 백팩에 넣고 다니며 읽던 시절이다. ‘열 줄이면 정리가 될 당연한 소리를 길게도 써놨구나.’ 근데 그렇게 기를 쓰고 사람을 만나고 다니니 혼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책도 영화도 잘 못 보고 심지어 글도 전만큼 쓰질 못했다. 주변에 사람이 들끓으면 두 팔 벌리며 미소를 지을 줄 알았는데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다. 쓰잘머리 없는 모임을 나가느라 진을 뺀다. 그렇게 소진된 기분에 아무것도 못 할 때 책 <콰이어트>를 읽었다. 어디 캐나다 퀘벡주 조용한 마을 동사무소에서 흐트러짐 없이 도장이나 찍어줄 듯한 다소곳한 작가 수전 케인은 이 책으로 나 같은 내향적인 사람에게 말을 걸어온다.
책 내용은 단순하다. 우리 사회는 어쩔 수 없이 외향적인 척하는 사람이 많다. 외향성을 유능하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향적인 사람은 전반적으로 평가절하를 당하는 게 사실인데, 조금만 살펴보면 조용한 사람도 꽤 강점이 있다는 말이다. 크게 떠벌이고 모든 사람을 아우를 수 있어야만 좋은 사회생활을 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 어찌나 달갑게 들리던지. 이후로 내향성이 지닌 힘을 믿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사무실 구석에서 제 할 일만 하다가 단백질 셰이커를 들고 칼같이 퇴근하는 박 모 대리가 되었다. 회식 안가. 술 안 먹어. 대인관계 좁아. 결정적으로 내 할 일만 딱 하면 바로 퇴근해버리는 앙칼진 구석이 생겼다. 어느 순간부터 모든 사무실의 역학관계를 멀찍이서 구경하며 어떻게든 몇 발자국이라도 떨어지려 안간힘을 썼다. 업무에서만큼은 누구도 날 터치할 수 없도록 차가운 얼굴로 방어막을 쌓고, 피곤하고 한심하게 이리저리 부대끼는 사람은 애당초 멀리했다. 사회생활은 다이어트 식단과 비슷해서, 지속할 수 없으면 실패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한다.
이런 무기력한 태도는 내 글에도 묻어있다. 나는 돌아가는 꼴을 관찰하고 그걸 잘 써보려 하지만, 관찰을 넘어 현상에 개입하는 건 꺼린다. 난 부대껴서 뭔가를 결론짓는 활동을 불편해한다. 난 전적으로 홀로 구축하고 홀로 생각하다가 홀로 나자빠지는 데 익숙하다. 나는 세상에 곁들여진 피조물이자 기껏 해봐야 장식물이 되고 싶다.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기척 없이 사라지고 싶다. 내가 죽으면 아무것도 없이 먼지가 되고 싶을 뿐이다.
어느 날 오전에 업무를 하고 있는데, 똑똑 소리가 들렸다. 그냥 할 얘기가 있어서 왔다는 동료였다. 요즘 정치 얘기를 하며 우스갯소리를 이어갔다. 분명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온 것 같은데 그는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말을 끌었다. 난 그저 이 자리가 아무런 용건 없이 끝나길 바랐다. 근데 그가 느닷없이 '근데 과장님 작가라면서요?'라며 물어왔다. 나는 아니라고, 잘못 안 거라고 말하고 싶은 욕구를 꾹 참고 어떻게 아셨는지 물었다. 어색한 웃음으로 초조함을 숨기고 너스레를 떨었다. 난 알았어야 했다. 내가 다니는 이 파티션으로 둘러싸인 곳에도 누구 하나쯤은 가방 속에 소설책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맥심 모카골드를 마시며 연예 뉴스 얘기나 하는 틈바구니에도 글을 쓰기 위한 영감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내가 작년에 쓴 1쇄도 미처 다 팔아내지 못한 에세이 따위를 읽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고 믿었던 건 내 오만이었을까. 설마 다 소문이 난 건 아니겠지. 알다시피 내 첫 책엔 우울한 연애, 실패한 관계, 비루한 집안 사정은 물론이고 느닷없는 지질함과 폭력이 엄연하다. 내 직무와 어울리지 않는 염세적인 구석과 회사 생활의 권태로움까지 고루 담겨있다. 난 뭔가 섬뜩해져선 말을 딴 데로 돌리기 바빠졌다. 읽히길 바라서 쓴 책이 읽혀서 곤란해지는 이 상황이 우스웠다. 왜 무수한 동료 브런치 작가가 가명으로 활동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내 앞에서 환한 웃음으로 내 글쓰기 노하우를 묻는 동료 앞에서 나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는 나름대로 내 책과 브런치, 언론 보도까지 파악하고 온 상태였다. 그는 속 모르는 호의와 친근함으로 날 대했지만, 난 말을 고르면서 이 불편한 자리를 모면하고 싶을 뿐이었다. 빨리 점심으로 제육 덮밥에 된장국을 먹고 싶었다. '저기 시적 허용이라고 아세요. 그거 다 제 얘기 아닌 거 아시죠. 이슬아 작가도 허구와 사실 경계에서 쓴다고 하더라고요. 아니 제가 이슬아 급이라는 말은 아니고요. 그냥 저도 지금 쓰는 게 다 뻥이라는 말이에요. 아니 글은 진실인데, 내용은 다 허구에 불과하다고요. 글은 저랑 완전히 딴 사람 같지 않나요. 하하. 제대로 보셨어요. 그게 시적 화자를 상정하고 쓰는 건데, 하루키 표현대로라면 어렸을 때 생이별한 쌍둥이 형을 저로 상정하고 쓰는 거랑 비슷해요.' 난 말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놓으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중언부언이라는 말을 몸소 체현하며 그를 떠나보냈다. 난 죄송한 마음에 친필 사인한 책을 한 권 선물했다.
난 요즘 불안을 자주 느낀다. 낯선 도시의 삶은 외로움을 가중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분리된 것은 무력하다는 것, 사물과 사람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 "분리는 죄책감과 불안의 원천이고,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독을 떠나려는 욕구"라 했다. 나는 어떤 합일한 뭔가를 찾지 못해서 자꾸 누군가를 불러들이는 건 아닌지 의심한다. 누가 날 이유 없이 찾아오는 게 아니라 나를 찾아달라고 떠벌이고 있었다. 수다를 떠는 자리에서 친밀감을 확인한답시고 모든 걸 털어놓으며 공감을 강요한다. 남에겐 드러내기 어려운 내 결여를 드러내 보이고 동정을 바라는 식이다. 어린아이처럼 유치한 짓이지만 분리된 고통을 상쇄하려면 이 방법뿐이다. 난 이별의 고통을 여러 모임 자리에서 꺼내며 견뎌냈다. 그들은 처음 나타난 내가 갑자기 연애담을 털어놓자 휘둥그레한 눈으로 날 쳐다본다. ‘저 새끼 뭐야 갑자기 나타나서 왜 저런 얘길 꺼내는 거야.’ 그래도 어떤 다정한 사람은 내 고백에 고개를 끄덕여주며 공감한다. 진득하게 들어주며 자리를 뜨지 않는다. 난 그 자체에서 어떤 합일의 순간을 본다.
연인이란 섹스 외에도 매일 내 너절한 감정을 받아주는 관계일 수도 있다.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내 근심을 금과옥조를 받들 듯 주의 깊게 대한다. 하지만 권태에 빠지면 어떤가. 서로 간의 고통에 관심이 없고 제 생각만 하기 바쁘다. 그 결과 내 얘기를 잘 들어줄 누군가,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난다. 이전과 다르리라는 환상을 품고 다시 어느 술집에서 또랑또랑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본다. 나는 드립 커피를 내리며 내 사무실로 친히 방문해준 그의 얘기를 듣지만, 실은 나 역시 드러내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다. 좀처럼 나를 보여주지 못해 역부족이다. 그가 내게 고민을 잔뜩 쏟아내고 나갈 때 난 어깨를 붙들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하고 싶다. 제 얘기 좀 들어보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