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챠 <그랜 토리노>
정말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났다. 한옥들 사이 좁디좁은 골목에 자리한 커피집에 약속을 잡았다. 곧 미국으로 출국하는 친구를 축하하는 자리였다. 이게 축하할 일인가 싶었지만, 이런 구실 없이 만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역 화장실에서 나름 잘 보이려고 왁스도 묻히고 백탁 크림도 발랐다. 도착해보니 연락이 뜸했던 애들이 죄다 모여 있었다. 근황을 묻고 잘 됐다며 연신 너스레를 떨었다. 영재로 커가는 아이, 골드 싱글의 화려한 연애, 초고속 승진, 강남 아파트 분양권에 화룡점정으로 돌싱까지. 어쩜 다 이리도 잘 지내는지 몰라. 마치 행복한 이유를 대야만 이기는 게임에 참여한 기분이었다. 인스타그램 피드처럼 비현실적이고, 불행 따위는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녀석들 얼굴은 지나치리만큼 현실적이었다. 이제 푸석푸석하고 쭈글쭈글해진 면상엔 과장이 없었다. 속으로 나 정도면 동안이라고 생각하며 뿌듯해했다. 그러게 수분크림을 잘 바르고 자야지.
다들 하나씩 좋은 소식을 하나쯤은 터뜨리는데 난 도통할만한 얘기가 없었다. 친구들의 해맑은 표정을 보니 내 순탄치만은 않은 고민을 꺼내기가 망설여졌다. 그냥저냥 끄덕거리며 아 그게 정말이야, 라는 말을 반복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던 차에 예나 지금이나 매사 질문이 많은 친구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아무리 찾아봐도 우리 얘기는 찾을 수 없던데." 무슨 말인가 했더니 내가 작년에 쓴 책에 자기 얘기가 없다는 소리였다. 생각해보니 정말 이들과 함께 동고동락한 한때가 마치 시식을 위해 도려낸 수박 한쪽처럼 빠져있었다. 첫 책이니만큼 내 짧은 인생 전반을 고루 녹였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이십 대를 같이한 그들을 빠뜨렸다.
조금 어색한 기분이 풀리자 다들 켕기던 것들도 하나둘 털어놓는다. 한 친구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차선 변경을 시도한다고 한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친구는 결혼으로 인생 2막을 맞겠다며 입매를 가다듬고 웃었다. 내 옆자리에 한때 나랑 말도 안 했던 친구가 직장의 처우가 불만스럽다며 목덜미를 긁고, 난 그들 속에서 못지않은 어려움을 토로했다. 각자 1인분을 잘 해내기 위해 분투하는 꼴이 예뻐 보였다. 사실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그걸 다 꺼내놓진 못했다.
오후 내내 떠들다 보니 한때 점심을 먹고 공원 언덕배기에 올라 돗자리를 깔고 종일 놀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땐 뭐가 그렇게 좋다고 쉼 없이 고민을 털어놨을까. 근데 왜 지금은 할 얘기가 없을까. 켜켜이 쌓인 시간이 산더미라 하나씩 풀어내면 밤새도록 얘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같이 얘기할만한 뭔가가 사라지고 없다. 같은 연령대에 비슷한 걸 공부하고 사회에 나와 비슷하게 살 줄 알았는데 그들과 내가 찍은 좌표평면은 어딘지 모르게 꽤 흩어져 있다. 내가 그은 x축과 y축의 교차점은 그들보다 우측으로 좀 더 가 있었고, 상대적으로 일찍부터 궤도이탈을 시도했던 친구는 아예 다른 차원에 점을 찍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차에 하나둘씩 시계를 살피는 녀석들. 난 괜히 야속해 식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다들 각자의 밤을 상상하는 얼굴이었다. 우리가 만난 시간은 전야제에 불과하고 축제는 곧 시작인 것만 같았다. 차려입고 나온 그들의 근사한 옷차림도 다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리라. 오후 네 시에 조금 못 미친 시간이다. 창밖을 멀거니 바라봤다. 겨울도 이제 한풀 꺾인 모양이다.
내 20대는 혼자인 기억이 대부분이다. 요즘엔 혼자 사는 이들이 예능 프로의 주요 포맷이라 익숙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혼자라는 개념은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관념이었다. 고독이라는 어휘가 부정적으로 쓰이는 한국에서 혼자라는 말은 훼손된 상태를 의미했다. 예능에 나오는 셀럽은 발랄하게 혼자 즐기지만, 내겐 그의 모습이 다다이즘 화가의 작업물로 보인다. 화려한 주방에서 시간과 공들여 완성한 요리를 혼잣말하며 먹질 않나, 손님을 초대하곤 자기 침실을 소개하는 이해 못 할 짓을 벌인다. 내게 혼자란 휑뎅그렁한 집에서 화장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에코를 타고 온 집안을 울리는 상태를 말한다. 난 간혹 이렇게 늙어갈 내 노년의 일상을 상상한다.
아마 아침에 일어나면 간단한 시리얼을 먹고 출근 준비를 하겠지. 구부정한 자세로 바지를 주섬주섬 챙겨 입고, 매일 입는 흰 라코스테 셔츠를 입는다. 허벅지는 지금보다 꽤 얇아졌으려나. 짧은 머리는 대충 물로 헹구고 가방에 소설책 한 권을 넣는다. 아마 꽤 이름값 하는 두꺼운 책도 고민 끝에 챙길 것이다. 불룩해진 가방엔 연필이 몇 자루 있고, 가끔 끄적이는 수첩이 자리한다. 누가 봐도 남루한 행색을 하고서는 출근 버스에 몸을 싣는다. 아침은 출근 지옥이지만 이어폰에 울리는 누군가의 대화에 집중한다. 지갑 속엔 사진이 한 장 있다. 오늘은 뭘 먹었는지, 괜찮은 사람과 지내고 있는지. 점심 막간에 별로 남지 않은 기억을 짜내서 몇 문장으로 적는다.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늙어가는 존재에 대해. 퇴근을 헬스장에 들러야 한다. 저녁 식사는 닭가슴살로는 안 되겠지. 요즘 내가 누리는 해질 무렵의 고요함은 아마도 노년의 내 삶을 재현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소설과 영화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노년의 삶은 비인기 종목이다. 도시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노인을 생생하게 다룬 작품을 보기 어렵다. 한 마디로 늙음과 정면으로 대면하는 텍스트가 희귀하다. 내가 곧 늙어감에도 늙음을 떠올릴 수 없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내 육체의 쇠퇴, 죽음과의 대면이 겁나는 걸까. 상상할 수 없는 건 욕망할 수 없다. 나이 듦이 필연적으로 부수하는 것을 그저 어림짐작할 뿐이다. 사회 곳곳이 청년 문제에는 그렇게 골몰하면서 노인문제를 외면하는 건 왜일까. 구체적이지 않은 상상은 늘 불안을 자아낸다. 그런 의미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노년에 만들어내고 있는 영화들은 어떻게 위엄을 갖고 늙어야 하는지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한 이야기다.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한국전쟁 참전하고 평생을 자동차 회사에서 일하다 은퇴한 노인이다. 심술궂은 노인네로 무료하게 살던 월트는 이웃집 소년 타오(비 방)를 갱단의 협박으로부터 구해주면서 친해진다. 그랜 토리노는 미국인의 전형을 보여주는 자동차다. 생산도 끊기고 월트에 의해 조심스럽게 운영되는 사라진 자동차다. 월터도 마찬가지다. 그는 평생 미국을 위해 살았지만, 지금은 찬밥 신세다. 월터가 따랐던 미국적인 모든 것이 젊은이들에 의해 훼손되고 있다. 시간의 실향민처럼 오직 과거에서만 살던 월터는 점점 더 완고한 노인이 되어간다. 그렇게 하루하루 별다를 거 없이 살던 월터는 어느 몽족 이민자들과 연대하면서 자신이 목소리를 낼 여력을 얻는다. 어쩌면 위엄 있는 노인이라는 건 이제 남겨진 이들에게 미욱하게나마 보탬이 되는 게 아닐까. 그럴 수 있다면 늙는다는 것이 그렇게 부박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