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방구석 여행자를 위한 책들
역병의 창궐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독서 시간이 부쩍 는 기분이다. 바깥을 믿을 수 없는 요즘 같은 때는 오로지 내 방과 손때 묻은 가구에만 의지하며 산다. 모든 게 유예된 세상에도 책장에 꽂힌 책들만큼은 여전하니까. 그게 그렇게 든든하고 위안이 될 수가 없다. 딱딱한 표지를 만져보고 종이 냄새도 킁킁거리면서 변치 않는 것들의 가치를 생각한다. 그걸 극복이라고 부르면 조금 거창하지만, 코로나 시대에 이만한 여행도 없다. 꼭 이렇게 코너에 몰려서야 독서에 애정을 표한다. 오늘은 올해 갇혀있는 날 위로해줬던 여행과 같은 책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뉴욕 어퍼이스트사이드 : 내 휴식과 이완의 해, 오테사 모시페그 저
<내 휴식과 이완의 해>는 도통 찾아보기 어려운 이야기다. 일종의 사회 실험실처럼 잠만 자려는 한 여성을 지켜본다. 부모 유산을 상속받아 말 그대로 가만히만 있어도 풍족하게 살 수 있는 26세 뉴요커 여성이다. 그는 고층 빌딩이 즐비한 어퍼 이스트사이드 고급 맨션에 거주하고, 미술시장의 중심인 뉴욕 상류층 동네에서 큐레이터로 일한다. 가방끈이 길고 며칠을 굶어도 케이트 모스를 닮고야 마는 외모를 지녔으니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휴식이 필요하다며 신경정신과에서 약을 잔뜩 처방받는다. 그리고 매일 밥보다 많은 알약을 삼키고 침대로 들어간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사회관계를 단절한 채 칩거해도 크게 문제 될 게 없는 인생이다. 그는 잠시 쉬어갈 뿐이라고 되뇐다. 힘을 내서 다시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날 수 있을 때까지 잠을 좀 청하려는 것뿐이다. 그의 유일한 외출은 식량을 비축할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과 수면 시간을 늘리기 위해 다시 병원을 찾는 것뿐이다. 의사는 상담을 받으러 온 그의 말을 다 들어주고 온갖 종류의 신경제를 처방한다. 그는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나로선 그게 왜 그렇게 힘에 부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약물에 의지해 동면에 가까운 잠을 청해야 한다면 엄청 중요한 이유가 있을 텐데.
주인공은 쓰레기 같은 남자 놈에게 집착하고, 일터에서도 적응하지 못해 빌빌거린다. 지적이고 유능하지만 야멸찬 부모와 순탄치 않은 어린 시절 사연이 삐죽 대지만, 편의적인 해석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책을 중반 이상까지 읽으니 그가 잠을 청하는 덴 이유가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고 보면 자면서 쉬고 싶다는 데 무슨 이유가 있을까 싶다. 그럴 수 있으니까 그러는 거지. 읽는 내내 그를 비난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배가 부르니 속 편한 소리나 한다고 비아냥대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생각하는 건 인생이 그렇게 예상처럼 가지런하게 정리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가장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식으로 흘러가기도 하는 게 삶이다. 일과가 엑셀 시트처럼 착착 정리가 된다면 소설을 읽을 필요도 없을 거다. 주인공은 훗날 약에 취해 한없이 잤던 이 시기를 어떻게 기억할까. 정말 휴식과 이완의 해라고 믿었을까. 난 복잡한 도시가 지겨워져 차로 6시간이나 걸리는 버지니아의 한 시골 마을로 내비게이션을 찍는다.
버지니아 애난데일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저
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책방 직원이 혹시 물리 서적 판매대에 꽂지는 않을까 우려가 되는 제목이다. 저자의 앤드루 포터라는 이름부터 뭔가 공학자의 냄새가 난다.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 이후 가장 난해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역자 해설을 보니 이 제목은 일련의 물리학 실험에서 따왔다고 한다. 낮에 램프를 켜놓고 관찰하면 빛이 유리창 표면에 부분적으로 반사된다. 가령 빛의 입자 100개가 있다면 96개는 투과하지만 4개는 부딪혀 튕겨 나간다. 문제는 빛의 입자 중 어떤 녀석이 투과될진 아무도 알 수가 없다는 거다. 이런 단상은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수록된 열 개의 이야기에 꼭 맞는 주석이 된다. 사람이 하루하루 스치며 마주하는 일은 무수하지만, 기억에 남는 건 극히 제한적이다. 앤드루 포터는 한 인간에게 희미한 자취로만 남은 기억만이 존재의 총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스라하게 떠올리는 과거를 정밀하게 그려낼 수 있다면 미묘한 생의 감각을 밝혀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순간이야말로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뭐라도 된다는 듯 끈덕진 묘사가 인상적이다.
수록작 중 <구멍>은 친구 탈이 죽는 광경을 목격한 후 평생 후회에 시달리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그는 머릿속으로 그날의 비극을 재구성하며 제 과오를 탓한다. 당시 경황이 없어 경찰과 가족에게 제대로 된 사실을 고백하지 못했다는 걸 후회한다. 차마 상상으로라도 친구가 여전히 살아서 자신과 커피 한 잔을 나누는 시간을 떠올리지 못한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을 떨치지 못해 지금 글을 쓰고 있다. 그렇다면 소설은 무엇을 해야 할까. 그를 어떻게 비극의 구렁텅이에서 꺼내 줄 수 있을까. 앤드루 포터는 사건 당일 무더웠던 여름날의 동네 풍경을 꼼꼼하게 묘사하는 데 주력한다. 마치 주워 담지 못한 진실이 거기 흩어져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날의 시공간을 낱낱이 문장에 옮긴다. 늦은 오후 한 시골 마을 주택가의 후덥지근한 분위기를 그려내는 묘사가 압도적이다. 눈을 찡그리면 쇄석 진입로 위로 물결치듯 솟아오르는 연기가 눈에 선할 정도다. 나는 그저 몇 개의 문장 만으로도 40도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는 버지니아의 가뭄을 몸소 겪은 기분이 들었다.
앤드루 포터는 주인공의 삶이 뒤틀린 지점을 집요하게 그려냄으로써 시간을 되돌리려고 한다. 회한(remorse)이란 한 번 더 깨무는 행위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복기한다는 건 통증과 함께 미련을 갖는다는 말이다. <구멍>에서 화자는 자신이 왜 구멍에 빠진 친구를 그냥 두고 왔는지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가능성의 삶을 떠올려본다. 자신의 구멍으로 들어가고 친구인 탈은 살아남는다면 어떨까. 상상 속에서나마 친구와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모든 게 다 사라진 결말을 떠올리며 자기 방식의 속죄를 택한다. 그건 마치 운명이 폐곡선을 타고 다시금 내게 날아오는 광경처럼 보인다. 언제 내게로 다시 들이닥칠지 몰라 눈을 떼기가 어렵다. 우리가 사는 데 있어서 문학이 왜 필요한지 묻는다면 이 작품에 몇 초쯤 뜸을 들였다가 내뱉는 선문답처럼 보인다.
소설 속 버지니아 지역의 더위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뜨겁고 습하다. 무엇보다 너무 고요하고 지루해서 여행지로는 부적합해 보인다. 그 흔한 스타벅스 하나 찾기 어려운 도시에서 무슨 여행을 할 수 있으리.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고 하와이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다행히 하와이엔 한국인 여행객들이 많은 모양이다.
하와이 호놀룰루 :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저
다단한 삶을 살았던 예술가 심시선의 10주기를 맞아 가족이 한데 모여 그를 추도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유교 사회가 남긴 얼룩은 모두 제거하고 각자 가족들마다 심시선을 추억할 수 있는 선물을 하나씩 준비해서 제사를 지내기로 한다.
세상은 생전의 심시선을 편의적인 해석으로 대상화했지만, 정세랑 작가는 심시선이 쓴 생전의 기록과 예술가로서 살아왔던 이미지에 살을 붙이고 숨결을 불어넣는다. 소설이 시종일관 밝아서 계속 눈을 마주치기에 버겁지만, 세간의 말처럼 청량하기 그지없어서 부러운 마음으로 가족들의 화목함을 지켜보게 된다. 집에 틀어박혀서 하와이의 풍경을 떠올리는 건 그야말로 피서에 가까웠고, 이야기에 구김살이 없어서 별 고민 없이 그를 추억할 수 있었다. 이곳은 하와이의 그림 같은 바닷가다. 어떤 얘기를 하든 들어줄 용의가 생기는 곳이라는 말이다.
책을 열면 심씨 집안 가계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평범한 이름 석 자로 구성된 보통 가족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계 가정에 가까운 여성 중심이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위대한 유산인 가족들은 각자 제 나름의 우주를 품고 있다. 그들의 사연을 듣고 있노라니 무궁한 가능성이 전모를 드러내고, 곡절을 넘는 궤적이 그려지는 게 눈에 선히 보인다. 문학이 가진 스펙트럼이란 어쩌면 한 인간의 깊고 깊은 속내를 들추는 것이라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다. 여느 가정과 다르지 않아 보였던 심씨 집안은 그들의 인생에 드리운 여러 지층이 전모를 드러내면서 더는 심시선 하나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여성 공동체가 하나의 의식을 통해 그 위용을 선보이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시선으로부터,>는 이렇다 할 서사랄 게 없고 뚜렷한 기승전결도 찾기 어렵다. 위기나 반전과 같은 극적 요소도 멀리한다. 현실을 극화하지 않으니 삶과 밀착하다. 스스로 안위만 살피고 눈앞의 문제만 신경 쓰다 통 둘러보지 못했던 타인을 떠올리는 장면이 잦다. 다 알고 있다고 믿었던 속사정도 사실은 오해에 그치고 말았던 걸 떠올린다. 너무 바빠서 번거로워서 짚어내지 못했던 여진의 감각. 인물들은 관성처럼 흘러가던 시간에 밑줄을 치며 가까스로 의미를 부여하기에 이른다. 사회 이슈를 가감 없이 소재로 끌어들이고, 한 번쯤 뉴스에서 들어봤을 법한 화자를 통해 사회의 부당함을 지적한다. 꼬인 인물이 없어 다소 계몽적으로 느껴지나 그래서 속이 편안하고 뒷맛이 개운한 작품이다. 올해 여행을 마치기에 이만한 곳을 찾기는 어렵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