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이 생기면서 다 괜찮아졌다

#5 나만의 공간이 생긴다는 것의 의미

by 박민진

처음 취업해서 신입으로 들어갔을 땐 의욕이 넘쳤다. 그땐 책방에 가면 온통 다 자기 계발서였는데, 그걸 나 같은 애들이 다 사들였다. 의욕 과다에 물불 안 가리고 잘해보고 싶은 그런 애들. 요즘엔 위로나 공감을 주제로 한 책이 잘 팔리지만, 그때만 해도 직장인에겐 자기계발서가 대세였다. 멘토라는 말도 없어서 대신 코치라는 용어를 썼던 것 같다. 배울 만큼 배우고 벌만큼 버신 코치들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인생 조언을 날렸는데, 난 매번 만 이천 원씩 지불하고 영성체를 받은 셈이다. 쥐꼬리 같은 월급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책 사는 덴 돈 아까운 줄 몰랐다. 대신 그 책들을 사무실에 꽂아두고 틈틈이 읽었다. 처음이라 일로 정신이 없었는데도 귀퉁이까지 접어가며 얼마나 열심히 읽었던지. 내 나이 스물셋. "난, 그래 확실히 지금이 좋아요." 삶이 복잡하지 않고 오히려 쉽던 때였다. 성공의 길이 훤히 보였다. 밑줄 친 문장에 해답이 다 있었으니까.

영화 10분

난 책에서 읽은 걸 고대로 따라 하는 걸 즐겼다. 가령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고 들어보셨는지. 스티브 코비라는 작자의 책인데 엄청난 베스트셀러였다. 저자는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먼저 처리하고, 그다음으로 덜 중요하고 급한 일을 하라고 조언했다. 지금은 뭘 당연한 소리를 책으로까지 냈나 싶지만, 당시만 해도 인생의 비밀이었다. (하도 비밀을 좋아했던 나는 비슷한 시기에 출간됐던 개소리 <시크릿>도 사서 읽었다) 스티브 코비가 도표로 그려놨던 인생의 법칙을 노트에 그려서 책상 유리 아래 넣어둔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난 어떤 삶의 이상적인 노선을 그렸던 것 같다. 철두철미한 원칙을 바탕으로 한 로열로드. 스물셋에 뭘 안다고 그렇게 성공에 혈안이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내겐 답습하지 않겠다는 방어기제가 있었다. 그건 없이 산 집안의 열등감이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약자의 보호 본능이었다. 내가 보아온 수많은 실패의 사례집에 나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IMF 금융위기와 그 이후의 실직사태를 목격하며 자라온 터라 최대한 안정적으로 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건 다 성공한 양반들의 힘 들어간 어깨뿐이었다. 우리 집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골프나 쳤을 양반들의 삶을 따르고 싶었다. 특히 난 인간관계, 아파트 분양, 직장에서의 승진이라는 지상 최대의 목표를 위해 책을 읽었다. 그중에서도 처세술이 가장 내 관심을 끌었다. 직장에서 줄을 잘 서기 위한 공부였다. 입사 첫해부터 직장 내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지금 생각하면 동료들이 그때 날 어떻게 봤을지 알만하다. 늘 커피 자판기 앞에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눴다. 낄 때 안 낄 때 다 끼고 저녁 약속은 절대 안 빼고, 어느 부장님이 끗발이 좋다고 하면 회식 자리에 가서 낄낄대며 아양을 떨었다. 안팎으로 뒤처지기 싫어서 저녁엔 퇴근하는 척하다가 다시 들어와서 뭐라도 공부했다. 보이지 않는 금맥을 찾아 부초처럼 부랑하는 거랑꾼처럼 기회를 엿봤다. 선배들이 부르면 만사 제치고 가서 술을 받아 마셨다. 평생을 질색하며 마다했던 소주를 그렇게나 마셔댔다. (대학생 때 소주를 마셨으면 내 연애사가 달라졌을 텐데) 그때 내가 떠받들던 놈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을까. 어디 가긴 어디 가. 다 배부른 아저씨 돼서 애 키우기 바쁘지.

영화 버닝

나를 이런 야망의 함정에서 구해낸 건 작은 단칸방이었다. 때 이른 독립이 가져다준 군만두 서비스였다. 모아둔 게 없어 회사에서 주는 기숙사로 들어갔을 때였다. 짐을 한 차에 다 싣고 낡은 숙소에 도착해보니 다 쓰러져가는 방이었다. 다행히 화장실은 따로 있었다. 모자란 세간은 다이소에서 대충 골랐고, 가구라고는 탁자랑 침대뿐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짐을 내리고 바닥 청소를 한다고 새벽까지 난리를 쳤다. 다음 날 아침에 잠에서 깼을 때를 지금도 기억한다. 내 누추한 방이 한눈에 들어왔고, 창이 커서 햇빛에 그대로 노출됐다. 전기 포트에 물을 끓이고 커피를 갈아서 한 모금 마셨다. 그때 여기가 내 공간이라는 걸 실감했다. 내가 일군 인생 최대의 성취였다. 모든 게 잘 풀릴 것만 같은 만능감이 차올랐다. 사위가 고요하고 누구도 없다는 게 이런 거구나. 달그락거리는 어머니의 설거지도 없고, 아버지가 크게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도 없다. 형이 전화로 옥신각신 떠드는 소리도 없다. 여긴 온전히 내 공간이었다. 어디로든 가려고 생각한 곳으로 갈 수 있고, 어떻게든 하려고 생각한 것을 할 수 있다. 자유라는 것을 처음으로 손에 넣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이후로 차츰 달라졌다. 그동안 내가 좇던 모든 걸 차차 잊어갔다. 인맥은커녕 몇 되지도 않는 친구들과도 점점 멀어졌다. 얼마 안 되는 돈을 세간을 늘리는 데 다 써버렸다.(한 달에 두 번 동기들끼리 돈 모아서 나이트 가는 계도 깼다) 기숙사에 가고 싶어서 퇴근만 기다렸다. 그래 봤자 컴퓨터 붙들고 하는 짓이란 게 다 기거서 거기였는데 혼자 방에서 노는 게 너무 재밌었다. 내 방에서 깨어날 주말 아침을 위해 한 주를 버티는 기분마저 들었다. 혼자 살다 보니 요리에 재미를 붙였다. 식기가 생겼고 냉장고도 들여놨다. 요리할 땐 레시피에 집중하는 재미가 있었다. 유튜브로 여러 요리를 시험해봤다. 똑같은 요리를 해도 결코 똑같지 않다는 게 내게 부여된 권위로 느껴졌다. 그래 봤자 소 닭 돼지를 로테이션 돌리며 살육에 바빴지만, 살면서 한 번도 느끼지 못한 나만의 시간이었다.

영화 한강에게

혼자서 산다는 건 관조하는 일이다. 잡음이 사라지고 대상을 멀찍이서 관찰하는 기쁨이다. 자기 계발서 대신 소설을 사기 시작하면서 관조의 맛을 알았다. 처음엔 방구석에서 할 게 인터넷뿐이라 시시콜콜한 연예 뉴스, 포털 뉴스에 나오는 정치 이슈 그리고 누구나 즐기는 그런 영상만 봤는데, 어느 순간부터 한국 단편 소설집을 읽기 시작하면서 더는 자기계발서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숨겨진 재능이 혼자 놀기였다는 걸 그때 알았다. 난 소설책만 있으면 온종일 심심하지 않은 종자였다. 특히 한국 단편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어쩌면 한국 소설가들은 내 선배였다. 작가들은 대부분 혼자 살았고, 나보다 경력이 길어서 고독을 즐기는 노하우에 능통했다. 그때 읽은 한국소설들은 내가 세계로 뻗어 나가는데 도움을 줬다. 영미, 남미, 유럽, 동아시아 문학으로 가는 진입로는 다 우리나라 작가들이 닦아놓은 길 위에 있었다. 내가 모르는 세계를 접하자 그때부턴 한 권이라도 더 보려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내가 소설을 통해 일찍부터 배운 게 있다면, 나는 잘 모른다는 거다. 나는 결코 세상에서 일어난 일을 다 알지 못한다. 코앞의 것에만 혈안이 돼서 미처 이 서울이라는 도시도 전혀 모른다.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았지, 사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사는 도시 온갖 곳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소설가들은 허구에서 노는 척하면서 실은 우리가 사는 속된 도시를 겨냥하는 글을 썼고, 내가 사무실에서 정치에 골몰할 때 현실정치에 펜대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래서 문학은 내게 배후에 뭔가가 더 있다고 말해주는 형 노릇을 해줬다. 형은 말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지금 세상에 훨씬 많다고. 세상은 지금 애처로운 돛단배와 다름없는 이들을 포용하지 못한다고. 그렇게 나의 무지를 알고 나니 그때부턴 더 노골적으로 작가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시대의 지성이라고 불리는 작가들을 접하면서 난 그들의 말투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마치 자기계발서를 보며 밑줄을 칠 때처럼 그들이 사고하는 바를 고스란히 외워뒀다. 술자리에선 작가들이 말하는 방식을 나도 모르게 따라 하며 침을 튀겼다. 마치 내 생각인 양 시치미를 뗐다. 어느 순간부터 내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고, 구관조처럼 책 내용을 고스란히 읊는 데 익숙해졌다.

영화 이월

신입사원이 된 그해 난 처음으로 글쓰기 책을 샀다. 더는 싸이월드에 늘어놓는 눈물 다이어리에 만족할 순 없었다. 책에서 읽은 걸 잔뜩 긁어와서 내 것인 양 허세나 떨 순 없는 노릇이었다. 처음 산 책이 <유혹하는 글쓰기>였다. 스티븐 킹이 쓴 자신의 작가론이다. 나는 자기계발서를 읽던 때처럼 스티븐 킹이 어떻게 작가가 되는지 분석했다. 아직도 이런 문장이 기억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형용사로 포장되어 있다." 스티븐 킹 말고도 제임스 미치너, 레이먼드 챈들러, 로맹 가리, 밀란 쿤데라와 같은 대문호들이 내게 작가가 되기 위한 준비물들을 일러줬다. 내가 글쓰기 책을 읽는 방식은 자기계발서를 독파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을 다 읽고 나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어렸을 적부터 닥치는 대로 책을 읽지 않은 자가 위대한 작가가 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들은 나를 좌절시켰다. 그들은 내 이력을 평가절하했고, 그들은 우월한 작가적 지위로 내 기를 죽였다. 그들은 내 눈을 마주치며 이렇게 단언했다. 이제부터라도 위대한 문학을 읽지 않으면 평생 좋은 소설을 쓰긴 어려울 거야. 그건 마치 소설 <제인 에어>에서 제인이 어렵사리 눈이 먼 로체스터와 재회했을 때 독자에게 한 말처럼 들렸다. "독자여, 나 결혼했어." 그래 일류 작가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민진아, 우선 쓰기나 해." 그건 멀찍이 객석에서 관조하던 나를 무대 위로 끌어내는 문장이었고, 방백 하는 배우처럼 나도 이제 관객이 필요했다.


내가 신입이던 그해 나는 성과급 꼴찌를 받았다. 마치 몽정기 소년처럼 허둥대고 있으니 좋은 평가를 받아내긴 어려웠다. 대신 그때 이후로 책을 놓지 않고 살았다. 요즘도 가끔 불안에 시달린다. 아파트 분양은 어쩌지. 결혼 안 하고 살면 혼자 독거노인이 돼서 고독하게 죽는 거 아냐. 남들은 주말마다 윗분들이랑 골프 치러 다니는데 난 뭐 하는 거지. 지금이라도 테슬라 주식 사야 하나. 어쩌긴 뭘 어째 그냥 책이나 읽어야지. 그렇다고 해서 다시 자기계발서를 사들이진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불안을 브런치에 늘어놓고 내 고민을 득의양양하게 전시한다. 인간은 상상하면 비겁해지니까 있는 그대로.

영화 시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영화 얘기로 이 글을 급히 마무리할까 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의 한 대목이다. 마을 주민센터 강사로 일하는 유명 시인은 시를 잘 쓰고 싶다면 사물을 잘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잘 봐야 저마다 마음에 품은 시 한 편이 쏟아질 수 있다고 부연한다. 설명하는 이도 듣는 이도 어떻게 이해시키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난감한 말이다. 이 말을 들은 할머니 미자는 도통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가 없다. 자신은 지금도 충분히 예쁜 시를 쓸 수 있는데, 뭘 어떻게 잘 보라는 건지 영문을 몰라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미자는 큰 고통을 겪는다. 보고 싶지 않았던 사건들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냥 죽는 게 나을지 갈피를 못 잡을 때 마침내 시인의 말처럼 시 한 편을 쓰게 된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말을 고르고, 어떤 느낌이었는지 정확하게 풀어낸다. 시를 읊는 미자의 흰자위에서 새벽처럼 맑고 시린 푸른빛이 반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