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웨이브 <마틴 에덴>

by 박민진

나폴리에서 가난한 선박 노동자로 살던 마틴은 한 저택에 방문한다. 잘생기고 훤칠한 마틴은 멋을 잔뜩 낸 차림으로 문을 두드린다. 장원과도 같은 앞마당엔 푸른 잔디가 펼쳐져 있고 내부엔 고풍스러운 고가구와 골동품이 즐비하다. 세월의 더께가 앉은 책들이 빽빽하고 르누아르 풍 액자가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있다. 생전 처음 문화 자본에 압도된 마틴의 얼굴이 볼만하다. 그는 단순히 재력이나 물질적인 것에 반한 게 아니다.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자신과는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그들이 신기했다. 그에게 있어 예술의 원체험이자, 가슴에 계급이 선명히 들어와 박힌 날이다.


저택에 사는 규수 엘레나는 마틴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진다. 우아한 제스처와 겸양의 미덕으로 마틴을 한껏 띄워준다. 흔히 볼 수 없는 거친 매력을 뿜어내는 마틴에 대한 호감 속에는 이국의 무산계급 노동자를 바라보는 호기심도 어려있다. 엘레나는 마틴에게 어떤 책을 좋아하냐고 묻는다. 마틴으로선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취향이라고 할만한 게 있을 리 없는 마틴은 먹고살기 위해서 택했던 선박에서 노동을 마치 지난날의 모험담처럼 꾸며낸다. 그는 엘레나에게 반했기 때문에 못 할 말이 없다.



엘레나는 마틴에게 드뷔시 곡을 연주해주고, 보들레르 시집도 선물한다. 마틴은 <악의 꽃> 첫 장을 펼쳐서 읽기 시작한다. "1부 우울과 이상" 그는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시가 내뿜는 감흥에 휩쓸린다. 공중도덕과 미풍양속을 문란케 한 죄로 기소된 바 있는 시인이 내뿜는 마력에 놀란다. 마주한 불행에 맞서겠다는 강렬한 시구가 드러내는 의지력은 또 어떠한가. 마틴의 허영과 열망이 십자가처럼 엘레나에게 지워지는 순간이다. “당신처럼 되고 싶어요. 당신처럼 말하고, 당신처럼 생각하고 싶어요” 그는 이제 한순간도 낭비할 수 없는 신세가 됐다.


마틴은 엘레나보다 예쁜 여자 친구가 있다. 그러니까 마틴이 엘레나에게 반한 건 외모가 아니라 그녀의 배경이다. 정확하게는 엘레나가 지닌 교양이다. 마틴은 항상 고급스러운 말투를 지닌 그녀를 경외하는 눈으로 바라본다. 마틴은 응접실에 놓인 그림 앞에 멈춰 선다. 망망대해 위태로운 격랑에 놓인 배 한 척을 담은 그림이다. 마치 윌리엄 터너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안개에 비친 빛점이 도드라지는 풍경화다. 마틴은 놀랍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멀리서 보면 멋진데 가까이서 보니 죄다 얼룩이네요. 그림이 사기를 치네요." 낯선 세계에 매혹된 자의 허탈한 토로처럼 들린다. 이제껏 나만 이런 세계를 모르고 살았다니. 왜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은 거지.


영화 <마틴 에덴>을 보고 처음 미술관을 찾았을 때를 떠올렸다. 내가 국립현대미술관 처음 갔을 때가 언제였더라. 그 크고 웅장한 건물을 들어설 때 경외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말하길 좋아하는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귀신처럼 그림을 스쳐 지났다. 미술관 길 건너 카페에 앉아서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고작 오늘 되게 좋았어! 그렇지? 맞아 색감이 뛰어나더군' 따위 말에 맞장구를 쳤다. 처음 독일 유명 콰르텟 실내악 연주를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손뼉 칠 타이밍을 찾지 못해 어리둥절할 때 난 불안해졌다. 모처럼 비싼 클래식 공연을 보고 스테이크를 썰러 가서도 심란함을 숨길 수 없었다. 내가 모르는 대화가 오가는 자리가 불편했다. 기형도가 한려수도에 있는 외딴섬 이름인 줄 알던 때였다. 무지를 실감할 때마다 묘한 수치심을 느꼈다. 아무도 내게 강요한 적 없는 깊이에 대한 강박이 생겼다. 그 이후로 책을 사들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인텔리 앞에서 주눅 들지 않기 위해 허풍을 떠는 마틴의 경직된 얼굴에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추리소설만 찾던 내가 엘레나의 서가에 놓일만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떤 문장 앞에서도 기가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뿐이었다.



마틴은 작가가 되기 위해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시골 마을로 떠난다. 엘레나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기 위해 작은 방에 틀어박혀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다. 가난한 노동자로 살 팔자를 거부하고, 절박하게 지식인이 되는 관문으로 나선 셈이다. 마틴이 처음으로 탐독한 책은 영국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의 <종합철학체계>다. 마틴이 진화론과 개인주의에 심취하고 사회주의를 배척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책이다. 마틴은 점차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알아간다.

이후에 마틴은 진보 성향의 시인 루소에게 영향을 받는다. 루소는 사회주의자로서 그가 작가가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준다. 마틴은 루소의 조언을 받들어 대중을 현혹할만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개인보다 집단의 이념이 모든 화두를 장식하던 때가 아닌가. 마틴은 빈자의 고통을 대변하는 리얼리스트로서 인기를 얻는다. 사회 고발을 위해 급진적인 주장을 서슴지 않는 지식인은 얼마나 멋진가. 마틴은 부르주아 예술 취향과 관습을 추종하면서도, 정작 사회 변혁에 앞장서는 글로 돈을 벌어야 하는 애매한 위치에 선다. 실상 그에게 필요한 건 예술작품을 감상하며 얻는 평화로운 시간이었지만, 작가로서 얻은 명성과 지식인이 가진 권위를 사회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요구를 뿌리치지 못한다. <마틴 에덴>의 감독 피에트로 마르첼로는 원작 소설을 두고 ‘문화를 해방을 위한 도구라고 믿으면서도 어느 정도는 좌절한 사람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정의했다. 마틴은 예술을 통해 대중의 삶이 나아지길 원했지만, 현실은 그의 바람처럼 되지 않았다. 부자와 빈자 사이에서 인기에나 영합하는 말이나 뱉는 게 그가 작가로 불리는 유일한 이유였다.



마틴이 곤란해진 건 내적 지향과 외적 인정 욕구가 부딪친 탓이다. 계급 상향을 목표로 한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는 잘 팔리는 작가여야만 했다. 근데 신랄하게 정치를 욕하며 쓴 책이 인기를 얻자, 이제 본전 생각이 나기 시작한다. 마틴은 자신이 순수하게 공부를 좋아하는 천생 학자였다는 뒤늦게 깨닫는다. 그는 이제 더는 한적한 작업실에서 책에 파묻힌 시간을 가질 수 없다. 사회가 요하는 지식인의 책무와 작가로서 대중이 원하는 작업물을 내놓아야 한다. 그가 잃은 건 순수한 무엇인가, 아니면 그저 순진했을까.


나는 마틴처럼 인기 작가가 아니라서 오직 책뿐이다. 난 일정이 텅 비어있어서 늘 책과 논다. 독서는 애인 없이도 관능적이다. 술자리가 없어도 단란하다. 텔레비전 드라마와 작별한 지 오래다. 재벌 2세가 출생의 비밀을 앉고 비련의 여주인공과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는 꼴을 안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책은 구원이다. 돈이 되지도 않고 일에 보탬도 없어도 감수할만한 놀이다. 쓸데없는 짓들 중에 제일이다. <마틴 에덴>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도 마틴이 몸을 수그리고 글을 쓸 때 그 뒷모습을 찍는 카메라에 담겨있다. 곁엔 켜켜이 쌓인 책과 커피잔이 보인다. 그는 막 출판사가 반송한 제 원고를 고치고 있다. 강박적인 자기 관찰이 시작된 참이다. 그 모습이 애틋한 건 기기에 어떤 외부의 압력도 없이 오직 그 혼자이기 때문이다.


마틴은 여인의 눈빛에 취했던 여름날의 저택을 다시 떠올릴까. 아마 백 번은 더 기억해낼 것이다. 백면서생의 팔자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나. 글 속에서만 살아 숨 쉬는 개인주의자. 글은 고작 글일 뿐이라서 현실에서는 유효할 게 없지만, 글에서만큼은 마틴이 인상주의 화가다. 강렬한 필치로 그 잔잔했던 날을 되살려낸다. 저택을 되살리는데 이백 자 원고지로 스무 매 가량의 글이라면 충분할 것이다. 엘레나의 미소를 그려내는 덴 열 줄이면 그만이다.

나도 오늘 내 과거를 털어내서 썼다. 영화를 내 얘기인 양 둔갑해서 썼다. 폐점 시간까지 버티다가 카페 점원과 같이 퇴근할 생각이다. 쓰기를 일보다 더 열심히 하고 있다. 쓰기는 돈은 적게 들고 시간은 잘 가는 데다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서 내게 제격이다. 이제 아홉시다. 마음만 급해서 중언부언 적고 나섰다. 집 문 앞에 어제 주문한 중고 서적이 잔뜩 쌓여있다. 내 방을 가득 채운 책더미를 생각하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언제 다 읽고 언제 내 글로 쓰냐. 노트북에 저장해놓고 수습하지 못한 초고는 또 어찌할까. 카페 직원은 이제 내가 얼굴만 비춰도 뭘 주문할지 안다. 날 뭐 하는 놈으로 생각할까. 백수 아니면 고시생으로 보지 않을까. 츄리닝에 맨날 매던 가방에 풀린 눈. 그의 눈에 내가 초라해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욕심 같아서는 꽤 재미있게 쓰는 프로 작가로 보였으면 좋겠다. 마틴 에덴처럼 잘생겨 보였으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