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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만한 당신 Dec 16. 2020

자연스러운 너의 모습을 보고 싶었어

필리핀 보홀에서의 마지막 하루

몇 년 전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필리핀 보홀에 갔을 때의 일이다. 비행 이륙시간 최소 18시간 전에는 다이빙을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보통 마지막 날은 육상투어를 하거나 쉬면서 시간을 보내곤 하는 데, 두 번째 보홀 방문이어서 마냥 쉬기엔 아쉬움이 들었다. 뭔가 특별한 게 없을까 하다가 근처 바다에서 돌고래 떼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다이빙 샵에서 친해진 언니와 함께 가보자며 의기투합했다. 툭툭이를 타고 30-40분을 달려서 항구에 도착한 후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부푼 기대를 안고 툭툭이에 부대끼며 달려가 도착한 항구와 그곳에 있는 배는 우리가 상상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도 상당히 멀었다. 항구라기보다 '배가 대어져 있고 그걸 타려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장소' 정도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조그맣고 어수선한 곳이었고, 흰색이나 원색으로 칠해진 필리핀 특유의 배인 방카가 열 대 남짓 정박해 있었다. 우리는 왜 돌고래 떼를 관람할 정도의 배는 2층 정도의 크기에 파도의 요동을 막아 줄 정도로 튼튼하고 배 바깥쪽에 안정감 있게 관람할 난간이 설치된 공간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을까? 우리의 고정관념에 뺨을 때려주고 싶은 순간이었다. 심지어 오늘은 햇빛은커녕 건기에 드물게 볼 수 있는 잿빛 하늘에 빗방울도 조금씩 떨어지는 특별한 날이었다. 눈으로도 저 먼바다의 파도가 무척이나 넘실거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군데군데 페인트 칠이 벗겨져 있는 방카에 타서, 언니와 나는 아무 말 없이 형광색 구명조끼를 있는 힘껏 몸에 맞게 조여 맸다. 언니와 내가 뱃머리에 앉고, 현지인 스탭이 반대편 배 끄트머리에 자리 잡았다. 배의 중앙 선실은 크레인 운전석만 한 공간이었는 데 배를 조종할 스탭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네 명이 탔을 뿐인 데 배가 꽉 차 이미 반쯤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착각이겠지? 


보홀 어딘가의 항구와 방카들, 비가 오기 직전의 하늘



1시간가량 방카는 망망대해를 맹렬하게 가로지르고 빙빙 돌았다. 조종을 맡은 현지인 스탭은 배를 몰고 가면서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며 ‘오늘은 힘들 것 같다’라는 짧은 영어를 간간히 내뱉었다. 배가 일으키는 물보라에 싸다구를 맞으며 두 손으로 몸을 지탱하여 바들바들 떨고 있는 우리의 눈을 보며, 정확하게! 돌고래를 볼 수 있을 거라는 우리의 기대는 냉장고에서 며칠 묵힌 상추처럼 급격히 시들해갔다. 



1시간 동안 언니와 나는 말 그대로 비에 맞은 생쥐꼴이 되어, 입술이 파래진 채로 덜덜 떨며 현지인이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돌고래는커녕 물고기라는 생물이 살 것 같지도 않아 보이는 회색빛 바다였다. 30분 넘게 그 자리에서 맴맴 돌다, ‘아무래도 오늘은 어렵겠다’며 이제 돌아가자는 선장과 아무 감흥도 없어 보이는 현지인 스탭 사이에서 언니와 나는 "안 돼!"라며 울부짖었다. ‘너네는 매일 오지만 우리는 또 언제 올지 모른다고! 돌고래를 보고 싶다고!!’라는 마음속의 염원을 담아서.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슬프게도 사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바다에 매일 나오는 현지인들이 돌고래가 나타날지 안 나타날지를 훨씬 잘 알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그렇지만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뱃머리를 돌려 다시 항구를 향해가면서도 언니와 나의 고개는 현지인이 가리켰던 그곳을 떠나질 못했다. 돌아오는 길은 갔던 길보다 멀게 느껴졌다. 애써 웃으며 ‘땡큐’라고 인사하고 내리곤, 바닷물에 절은 채로 툭툭이로 갈아타고 저벅저벅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서는 며칠 얼굴을 마주했던 사람들이 “오 봤어봤어?” 들뜬 목소리로 물을 때면 어깨가 바닥까지 처지는 느낌이었다. “아니요....”



생각해보면 그 일정은 망망대해의 우리가 기다리는 바로 그곳 언저리에서,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 시간 즈음에 돌고래 떼가 나타나 줄 것이라는 아주 낙관적이고 희망에 가득 찬 상품이었다. 물론 돌고래 떼가 자주 나타나는 곳이라 그런 루트가 생겼다곤 해도, 어떻게 매번 볼 수 있을 거라 장담하겠는가.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물론, 아주 낙심했다.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돌고래가 무리 지어 유영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본 적도 없었을뿐더러, 그 날이 보홀에서의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이다. 또 언제 다시 돌고래를 보기 위해 시간을 낼 수 있을지, 그럴 기회가 내 삶에 있을지 그 어떤 것도 확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 짐을 싸서 공항으로 가는 길 내내 아쉬웠다. 그러다 기내에서 멍하니 있다 문득 돌고래 떼를 보지 않은 게 괜찮은 일이고, 오히려 조금 뿌듯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 아닌가? 무슨 연유인가 하면, 내가 돌고래를 볼 수 있는 가장 쉽지만 가치관에 반하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은 스스로를 기특해했기 때문이다. 아쿠아리움이나 돌고래쇼 같은 것 말이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엄청나게 크고 순한 고래상어를 영상을 찾아볼 정도로 너무나 좋아하고 다이빙으로는 고래상어를 자연스럽게 만날 확률이 매우 낮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필리핀 오슬롭의 고래상어 피딩 상품을 혐오하고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단 한 번도 이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돌고래 자체를 보고 싶었다기보다는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인 채로 '살고 있는' 돌고래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새벽같이 일어나고, 2시간 남짓의 이동거리를 감내하고, 파도에 싸다구를 맞고 멀미를 각오하며 배 위에서 보내는 시간은 겪어야 할 당연한 과정이었다. 단순히 ‘돌고래 보기’라는 쉬운 목표로 바꾸고 고생 없이 보면 좋지 않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몇 번이고 답할 것이다. 설사 돌고래를 만나지 못할지 언정 기꺼이 다시 고단한 과정들을 거치겠다고. 보홀이라는 섬을 둘러싼 드넓은 바닷속 어딘가를 유영하는 돌고래, 가장 자연스러운 너희들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혹시 아는가. 몇 번이나 그 고단함을 반복한다면 돌고래들이 자신들의 유영하는 모습을 우연히 선물처럼 보여줄 날이 올 지. 그때야 나는 진심으로, '돌고래를 본 적이 있어'라고 말할 것이다. 






* 제목에 걸린 대표 사진은, 필리핀 말라파스쿠아에서 사는 환도상어(Pelagic thresher)를 찍은 것이다. 환도상어는 매일 아침 특정 시간에만 수심 30m까지 올라와서(반대로 다이버들은 수심 30m를 내려가야 한다), 잠시 머물다 다시 내려간다. 여러 번 시도하고 낙심했지만, 기쁘게도 나는 '환도상어를 본 적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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