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주 이야기

상하이의 추억

by MJ




따뜻한 햇살 사이로 상큼하다 느껴지는 봄바람이 간질거리는 이맘때가 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사람이 가득했던 난징둥루 거리, 나는 그때 한바탕 울고 가슴앓이를 끝내고 웃으며 걷고 있었다.

벌써 십 년이 넘어가는 기억, 상하이에서의 일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디자이너 슈즈 브랜드에서 일하는 나는 상하이에 전시회가 있어서 출장을 떠났다. 도쿄나 상하이로 종종 전시회가 있어서 출장이 잦던 때였다. 당시 전시는 3일이었고, 준비 때문에 5일 체류를 해야 했다. 꽤 바쁜 일정이라 숨 가쁘게 진행이 되었다.



문제는 전시회 두 번째 날 일어났다. 각 브랜드별로 마련된 부스에서 잠시 옆 옆에 있는 아는 언니의 부스에 들렀다 돌아왔는데 테이블 아래 의자에 두었던 가방이 없어진 것이다. 유럽이나 해외를 갈 때 가방을 잘 챙기는 편인데, 전시회 부스 안에서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중국에서 뭘 믿고 가방을 그냥 두었을까. 가방을 도둑맞은 후에 별의별 후회가 다 되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찾았지만 당연히 찾을 수 없었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휴대하는 핸드백에는 가장 많이 쓰는 물건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지갑, 화장품 파우치, 카메라, 아이팟 (스마트폰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다이어리 등등 매일 손을 타는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현금과 휴대폰은 주머니에 넣고 다닌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해외에서 잃어버리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것, 바로 여권이었다.



해외에 나가면 원래 여권을 소지하고 다니지는 않는데 그때 전시회를 총괄하신 소장님이 중국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며 공안의 지시 사항이라며 복사본이 아닌 실제 여권을 가지고 다니라고 당부를 했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던가. 그냥 물건들은 아깝다고 하고 말 수 있는 문제였지만 여권은 달랐다. 갑자기 국제 미아가 되어버리는 상황이 되었다.



어떻게 일은 진행이 되어야기에 회사에 보고를 하고 후처리를 해야 했지만 충격에 그날 저녁 식사도 잊고 눈물바람에 호텔 침대에 칩거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나도 어렸어서 그 속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르던 시절이었다. 함께 간 다른 브랜드의 실장님들이 다독여주고 먹을거리를 사다 주고 했지만, 당시에 눈앞이 깜깜한 마음에 침대에 누워 울기만 했었다.



마지막 전시 날 아침 가방을 찾았다는 경찰서 연락이 있었다는 소리에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행사 관리했던 중국어 통역 분과 함께 경찰서에 들렀다. 가보니 찾았다는 게 아니라 분실신고를 위해 경찰서에 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루 사이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이었다.



해외에서 여권을 분실할 경우 임시 여권을 발급받아야 돌아올 수 있다. 문제는 그 발급되는 시기가 꽤 걸리는 것이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약 일주일이 넘게 소요가 된 다했었는데, 중국 명절인 춘절까지 겹쳐서 관공서에서 며칠 더 지연이 된다고 했다. 되는 일 없이 머리 위로 먹구름이 쌓이는 중이었다. 전시회가 무사히 끝나고 함께 왔던 사람들은 모두 한국으로 돌아갔다. 헤어질 때의 마음이란, 갑자기 형제를 떠나보내는 것처럼 마음이 허했다. 나는 왜 가지 못하는 걸까, 그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내내 머릿속에는 가방을 두고 간 나와 훔쳐간 도둑을 원망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전시를 주관한 협회의 상해 사무실에 직원 숙소가 있어서 그곳에 머물 수 있던 것이었다. 그곳에는 중국어에 능통한 나보다 다섯 살 정도 어렸던 여자 직원이 있어서 나의 일처리를 도와주었고, 함께 전시회를 했던 의류 브랜드의 나보다 한 살 어렸던 남자 대표가 중국 진출 때문에 상하이에 머물고 있어서 나이가 대략 비슷했던 사람들과 자주 어울릴 수 있었다. 혼자였다면 막막하고 외로웠을 시간을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물론 그때도 내 얼굴에는 빗금이 쳐진 채였지만 말이다.



지금이었으면 어쩔 수 없다며 마음을 다독이고 좀 더 일찍부터 상황을 즐겼을 것 같다. 그때 나를 괴롭힌 것은 부주의로 인해 회사에 의도치 않게 장기 휴가를 내어 팀원들에게 피해를 입게 한 것이었다. 한창 바쁜 시기 었고 다들 업무가 과중할 때라 공백이 컸다. 나의 부재로 고스란히 일을 떠맡아야 할 사람들에게 면목이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임시 여권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조금 슬픔과 미안함을 잊고 다소 뻔뻔해졌다. 여권을 신청하는 과정은 어렵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척 쉽지도 않았다. 여권용 사진을 찍고 하루를 기다려야 했고 (그 당시에는 사진이 바로 나오는 곳이 없었다.), 잃어버린 곳이 상하이가 아닌 우시 시라는 옆 도시여서 몇 번이나 기차를 타고 한 시간이 넘는 거리의 우시를 다녀와야 하는 일도 있었다.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지만 신청서를 쓰러 간 곳에서 다른 곳으로 뺑뺑이 돌리는 일도 있었다. 중국이라는 곳의 특성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왜 한 번에 일처리가 안 되는 걸까, 이게 뭐지 싶던 일도 여러 번 있었다. (나중에 보니 굳이 우시를 몇 번이나 가지 않아도 되었던 거라던지) 통역해주던 친구가 있었지만 그 친구 역시 업무가 있기에 무턱대고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서류가 접수되었고, 열흘 후에 찾으러 오라는 답을 받았다. 하지만 이곳이 어디인가, 그때쯤에는 중국이란 나라를 믿을 수가 없는 지경이었고, 나오기로 하는 날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단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제는 할 수 있는 일이 여권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나는 가지고 있던 현금을 쪼개서 (카드를 모두 분실했다) 살아남기에 도전하고 있었다. 그때 상하이는 너무 추웠어서 감기까지 걸렸다. 가져간 옷이 부족해서 함께 전시회에 온 옷 브랜드에서 몇 벌을 사고, 현금이 부족해서 전시품으로 가져간 우리 신발을 그곳에 있는 직원분들에게 팔아서 현금을 좀 더 충당했다. 어떻게 살아진다고 여권을 기다리면서는 웃음도 다시 돌아왔다. 한국에서 파견 나온 직원이 가지고 있던 상하이 여행책을 빌려서 가고 싶은 곳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함께 지낸 사람들과 상하이 관광도 조금씩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술도 마셔가며 시간이 조금씩 흘러갔다.



여권을 신청한 날 함께 어울리던 사람들과 난징둥루로 나갔다. 막 시작되는 밝은 봄날이었다. 햇살은 따뜻했고 바람은 상쾌했다. 오랜만에 웃음을 찾고 편안한 마음에 사람이 가득한 난징둥루의 길을 걸었다. 지나가는 길에 필름 카메라도 하나 구입을 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기여서 한창 똑딱이라 불리는 자동 디지털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던 시기였다. 애석하게도 가방 안에 둔 그 카메라를 분실한 상황이라, 아쉬운 대로 필름 카메라라도 구매를 해서 나름의 시간을 추억해보자 했다.



와이탄, 예원, 동방명주, 난징루 같은 곳을 관광하고, 한국에는 아직 들어오지 못한 이케아 (ikea)에도 구경을 갔다. 맛있다는 집들도 몇 군데 찾아가 보았는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곳은 상하이에서 신세를 졌던 아파트 앞에 자리한 동네 밥집과 근처의 훠궈 집이었다. 동네 밥집에서 2-3천 원이면 먹을 수 있던 여러 음식들 중 토마토 달걀 볶음은 정말 맛있었고, 훠궈는 아직도 잊을 수 없게 너무나 맛있었다.



그리고 여권이 나오기 전 날, 아직도 중국에 대한 믿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 긴 여정이 끝이 보인다는 희망이 보이는 날이었다. 한국으로 곧 돌아갈 나를 위해 우리는 마트에서 쇼핑을 하고 좋아하는 훠궈 집에서 훠궈를 먹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묵었던 아파트는 매우 깔끔한 고급이라 불리는 곳이었는데, 앞 길거리에서 꼬치구이를 구워서 파는 포장마차 같은 곳이 있었다. 훠궈 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나온 우리는 그곳에서 2차를 하기로 했다. 족히 4-50개는 될 듯한 고기뿐 아니라 채소, 마늘, 은행 같은 것까지 잔뜩 구워진 꼬치를 사 왔는데 술은 파는 것이 아니라 편의점에서 사 먹는 것이었다. 함께 있던 남자 대표가 백주를 마시자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상하이에서 한 회식 자리 나 바이어 미팅 때 백주를 마셔본 적은 있지만 많이 마신 적은 없었다. 도수가 높은 술도 곧잘 마시고 소주에 단련이 되어 있던 나는 호기롭게 그러 마하고 우리는 둘러앉아 백주라 불리는 중국 술 바이주를 마셨다. 길에 앉아 술 먹기 좋게 온도는 적당하고 봄바람은 살랑살랑 불었다. 오랜만에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며 닭꼬치도 하나씩 까먹으며 곧 마지막이 될 봄밤을 충분히 즐겼다.



우리는 신이 났다. 상하이에서 처음 만난 나와 달리 원래 있던 아파트 사람들 사이에서는 약간의 트러블이 있던 터였다. 사이에서 조금 힘들었지만 그날 밤은 모두 기분이 좋았다. 상하이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웃고 떠들었다. 나의 여권 분실 사건도 그때쯤에는 웃음거리가 되어 있었다. 두 병까지 마시고 세 번째 병을 사러 편의점에 가서 속을 보호해야 한다며 생수와 음료수까지 사서 마셨다. 분명 그랬는데 눈을 떠보니 드라마처럼 창밖에서는 새소리가 들리고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고 나는 침대 위였다. 던언컨대 그렇게 깔끔하고 기억이 토막이 난 것은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바이주가 50도가 넘는다더니 역시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다.



타국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사이에서 필름이 끊긴 채 눈을 뜨는 것은 색다른 공포였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한 판단과 함께 식은땀이 삐질 났다. 다행히 아침에 만난 사람들은 모두 취했고, 우리는 아무 문제없이 집으로 돌아와 각자 방으로 잘 헤어졌고, 나는 잘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고 했다. 심지어 그들은 내가 술을 그렇게 마시고도 너무 멀쩡하다며 잘 마신다 칭찬을 해주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끊겼단 필름이 장면 장면으로 일부 돌아오기 시작했다. 필름이 끊긴 것은 그냥 나 혼자만 알고 있기로 했다.



중국어를 하는 직원이 전화를 걸어 내 여권이 나온 곳을 확인해 주었다. 드디어 임시 여권을 찾게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간 전화와 메신저를 통해 내가 탱자탱자 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회사 대표님과 동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생각보다 잘 지내는 나를 그래도 걱정해주며 기뻐해 주었다. 그날 미뤄두었던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확정하고, 나는 다음날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여기에서 한 번 더 고백할 것이 있다. 부디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나를 욕하지 않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탑승수속을 마친 나는 수색대 바구니에 여권과 탑승권을 둔 채로 그냥 걸어 나오고 말았다. 면세점을 돌아다니다 여권과 탑승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온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에 들었다. 이걸 또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떡해 수습해야 되나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그때 마침 방송에서 내 이름이 불리었다. 다행히 바로 찾을 수 있었다. 뭐 이렇게 정신머리 없는 사람이 있냐고 너무 답답해하지 않으시길 바란다. 평소에 물건을 그렇게 자주 잃어버리는 편은 아닌데 그때는 뭐가 씌었나 보다고 변명해 본다.



그렇게 약 보름간의 우여곡절을 마치고 나는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오면 축 귀국이라는 플래카드라도 붙어 있을 줄 알았는데 욕이나 먹지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었다. 심지어 키우던 강아지는 나를 본체 만 체도 하지 않아 눈칫밥을 가중시켰다. 가족들과 회사에 눈치를 보면서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일 폭탄과 함께 상하이에서의 기억은 점점 저물어 갔다. 하지만 바이주의 향긋한 향만큼은 잊히지가 않았다.



그리고 농담이 아니라 7-8년 정도를, 나는 바이주를 마시지 못했다. 그보다 더 도수가 높은 위스키나 보드카를 마실지언정 바이주는 마실 수가 없었다. 냄새만 맡으면 속이 울렁거리며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며칠이 지나면 없어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리고 이후에 수정방을 만나며 그 증상이 사라졌는데 그 이야기는 내 글 앞에 쓴 "양고기 이야기"와 연결이 된다.

이제는 다시없어서 못 먹는 바이주, 한참 알싸했던 기억의 한 자락에 씁쓸한 향으로 남았던 술이다. 봄밤이 되니 불현듯 생각난다. 이번 봄에는 꼬치들과 함께 바이주를 먹어보고 싶다.




그 때 찍은 와이탄의 야경



바이주 사진은 없어서 맥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