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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민경 Jan 08. 2019

08. 쥐는 어디에서 왔을까?



에곤 쉴레, <죽음과 소녀>


 여느때와 다름 없이, 가을의 흔적으로 남은 낙엽들 사이 곳곳에 숨겨진 담배꽁초를 쓸어모으던 내가 발견한 것은 쥐였다. 아직도 그 순간이 선명한데, 사람은 곧잘 놀라운 것을 발견하는 즉시 사고 정지의 슬로우모션 순간을 경험하곤 한다. 그날의 기억도 그런 것과 같았다. 나는 길지 않았겠지만 그 길지 않은 순간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고 또 그 순간은 천년보다 길었다. 그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내 눈앞의 뭔지모를 물체를 마주한 상태에서 나는, 곧 그것이 죽은 쥐의 사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몇일동안 내 눈앞에 금방이라도 그려질듯한 그 순간의 사진을 묘사하자면 그 쥐는 꽤 커서 구센치는 될 법했고, 회색빛이었으며 가장 특징으로 꼽을만한 것은 자는 듯이 누워 있었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정말 그 쥐가 동면에 취해있는 것은 아니었나 착각이 들만큼 그 눈은 멀리서 보았지만 편안하게 감겨있었고 또 자세 또한 앞발을 가지런히 모은 그냥 옆으로 누워 누군가가 자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것이 톰과 제리에서만 봤지 정말로 살아있던 생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즉시 소리를 지르며 뛰어왔다. 일하는 카페의 문을 여는 순간까지도 그 얼굴과 자세와 몸이 선명했으며, 그 사체를 낙엽 사이에서 끌어내리던 쓸개솔에서 느껴지던 촉감까지 분명했다. 딱딱했고 아마 이미 차가웠을 것이다.


 카페에서 일하면서, 카페 주변의 쓰레기를 쓸어모으는 것이 일인 나는 그 몇일간 나의 맡은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영면같은 3일동안 나는 쥐가 내 눈앞에 얼룩지는 시간들을 감당해야 했으나 그것을 주변인에게 곧바로 전했으니 그 긴장과 당황을 혼자서 분분히 견뎌내지는 않은 셈이다. 또 그러면서 그 쥐가 내가 생각했던 것 만큼은 무섭지 않아 신기해했다. 라따뚜이 속의 쥐의 모습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쥐의 모습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고요하고 깨끗했다.


 멀지않은 옛날에도 쥐를 본 일이 있었다. 그때는 여름날이었는데 애인과 함께 집 주변 하늬공원을 거닐고 있었다. 하늬공원은 깨끗하고 언제나 정돈된 모습인데, 그건 생긴지 오래 되지 않은 집 주변 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시설로 만들어진 얼마되지 않은 것이어서 그럴거다. 그런 공원의 인위적인 모습을 좋아하던 나와 애인은 여느때와 다름 없이 공원을 가로질러 나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 순간 쥐를 마주친거다. 쥐는 아주 작았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행로를 가로질러 수풀에서 수풀로 뛰어가고 있었다. 조그만 것이 어떻게 그렇게 빠른지 자신의 몸의 10000배는 될 듯한 거리를 쏜살같이 인간의 측정법으로 말하자면 2초 남짓한 시간만에 뛰어가버렸다. 너는 생긴지 얼마나 되었을까. 아마 일주일은 숨은 쉬고 살아있었을까. 그 조그만 쥐 한마리가 쏜살같이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뛰어가고 있었다. 살아있는 생명체 중 인간을 제외한 모든 것을 무서워하는 나는 곧바로 그 자리에 멈춰서 굳어버렸지만, 애인은 그 쥐가 귀엽다고 말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조금은 변화시킬 기회를 얻게된다. 나는 그 후로 그 쥐를 기억했다. 조그맣고 회색인지 분홍색인지 핏빛인지 모르겠던 내 검지 한마디는 될까하던 조그만 쥐.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심장을 조금은 더 뛰게 하기 위해 달려가던 그 쥐의 모습을 나는 거의 6개월이 넘는 시간동안 잊어버릴때쯤 꺼내보고 지워질듯하면 생각하며 친해지고 있었다.


 내가 낙엽 사이에서 쓸어낸 쥐는 어디에서 왔을까. 어디에서 나고 어디에서 살아 결국엔 그 아늑하고 차가운 바닥에 몸을 편채 편안한 모습으로 죽어있었을까. 동생이 곧잘 읽던 시골쥐와 도시쥐에서 너는 도시쥐였을까, 혹은 시골에서 적응을 하지 못하고 도시로 상경했다가 결국엔 그 빳빳한 도시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생명력을 잃어버린 시골쥐였을까. 혹은 너는 내가 여름날 보았던 그 하늬공원의 분홍빛의 생명체였을까. 쥐는 눈을 편안히 감고있었다. 너는 죽은 후의 너의 모습만큼 편안한 정생을 살아왔을까. 죄를 지은 사람은 나중, 환생의 과정에서 한낯 미물로 선택된다던데 당신은 그럼 그 전 큰 죄를 지은 인간의 영혼이었나, 나도 다음 생 쥐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생각하다보면 그 쥐의 모습이 자꾸 공원에서 죽을듯이 달려가던 작은 쥐의 모습과 겹쳐보인다. 결국 넌 달리고 달려서 1키로 남짓 거리의 한 카페 모퉁이 냉풍기 옆 낙엽 사이에서 죽어있었나. 너의 몸보다 백만배 천만배는 더 먼 거리의 곳까지 당도한 너는 너의 정생이 좋은 여행이었다며 만족하며 눈을 감았을까. 그렇게 고른 너의 마지막 장소는 생명력이 끊어져 닿은 곳이었나 혹은 너의 선택으로 머문 뒤 생명을 다한 곳이었나. 너는 지금까지 너보다 작은 미물들을 먹고 살았을텐데, 아마 다음 차례는 너가 미물들에게 먹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렇게 너에 대해 길게 적고 있는 나는 평생에 너의 모습은 사체로만 마주해본 사람인 것을 알고 있을까.


 예전에 초등학생때 교회에서 짓궂은 아이들이 교회의 땅을 파, 묻어두었던 쥐의 사체를 다시 꺼낸 적이 있었다. 그 사체엔 작은 미물들이 가득했다. 구더기였다. 아마 살아 생전, 생쥐에게 저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텐데 생각했지만 맨 마지막의 모습은 미물들에게 파먹힌 피범벅이었다. 그 작은 것들이 결국 자신을 괴롭히고 죽일수 있을만큼 큰 존재를 정복해버린거다. 그 미물들에 내가 마주한 그 마지막엔 평온을 가져간 쥐가 정복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신경을 쓰고 있을까. 약육강식이라는 법칙의 또 하나의 근거가 생기는게 마음에 안드는 걸까. 그리고 그 존재를 내 눈으로 마주해버렸다는 것이 마음이 쓰이는 걸까.


 결국 그 쥐는 묻혔다. 그 쥐를 묻어주던 사람이 말한대로 그 쥐는 딱딱했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모습이었다. 마지막 모습을 마주한 사람들에게 모두 똑같은 인상을 남긴 그 쥐는, 결국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갔을까. 그와 같은 사지를 달고 있는 나는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게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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