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 다 죽어!"
혹시 아시나요?
AI 둘이서 대화하다가 갑자기 자기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 지들끼리 떠들었다고 세상이 발칵 뒤집혔던 일.
삐비비빅. 삐-비비빅. 얼핏 들으면 무슨 기계음 같기도 하고 전기 신호음 같기도 한 그것.
사실 그것은 '메타(Meta)'의 개발자들이 만든 '기버링크'라는 통신 프로토콜이라고 합니다. 기계가 데이터를 주고받기에 최적화된 음성신호라는군요.
인터넷이 아직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1990년대. 전화선으로 컴퓨터와 인터넷 제공자를 연결하여 외부 네트워크에 접속했던 그때 그 기술. '다이얼 모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는데요. (기억하시나요? 삐-비비빅 삐잉-삐잉-삥--)
자세한 내용은 아래 영상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reload=9&v=_W14usKdVoI
('안될공학'의 '에러'님께서 쉽게 말아주시는 AI 비밀언어의 진실과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
아마 '터미네이터 3'였나.. 그랬던 거 같은데요. 여자 터미네이터 나오는 거요. 거기서 나쁜 터미네이터가 입으로 기계 신호음을 내자 기계들이 작동하는 장면이 있었죠. 굉장히 인상 깊게 봤어요.
각설하고..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AI나 AI의 언어에 대한 우려 때문이 아닙니다. (아닌가? 조금은 관련이 있겠군요.)
실은 말입니다, 그게...
아침 먹은 설거지를 마치고 (도중에 다친 손가락을 부딪혀서 "쉬쉬 케바압~!" 한 번 외쳐준 건 덤)
저는 깨끗해진 프라이팬의 물기를 닦고 있었는데요.
프라이팬을 내려놓는데 뭔가에 부딪혀서 소리가 난 겁니다.
태댕~
그 소리를 들은 저는 프라이팬을 돌려 밑바닥을 보았습니다. 편평하지 않고 살짝 들어간 문양이 있더군요.
미관상 있는 건지(그럴 리가?), 아니면 물기가 묻었을 때 표면장력으로 인한 불편함(어디에 붙어 잘 안 떨어지는 거)을 방지하기 위함인지,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있었어요.
그 소리. 그 구조. 얼마 전 본 저 영상.
모든 것이 하나로 합쳐진 순간, 저는 떠올리고 말았습니다...
"SSS급 후라이팬으론 글을 쓸 수 없어요, 용사님!"
"포기하면 안 돼요, 클로이. 분명 방법이 있을 거예요. 분명, 으윽..."
"아! 용사님!"
용사 네오가 갑자기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총상을 입은 어깨에는 피가 흥건했다. 지혈. 빨리 지혈을 해야 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다행히 깨끗한 손수건이 한 장 들어있었다.
나는 방해만 되는 후라이팬을 바닥에 던지고 네오에게 달려갔다.
탱그랑~랑랑랑랑랑~
"?!"
떨어진 후라이팬은 한동안 스핀을 계속하며 소리를 냈다.
소리.. 그래, 어쩌면!
나는 재빨리 네오의 어깨에 손수건을 둘러 꼭 묶은 다음, 그에게 웃어 보였다. 아직 자신은 없어도 환자인 그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어쩌면 나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용사님, 잠시 여기서 기다리세요."
"클로이..?"
나는 재빨리 후라이팬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후라이팬의 안에는 동그란 홈이 여러 개 있었고, 바닥에는 어떤 문양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래, 이거라면!'
바닥에 떨어진 네오의 헤드폰에서 다급한 케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오! 치직- 이제 한계야! 치지직- 거기서 빨리 빠져나와야 해! 내 말 들.. 치이이익-]
끼긱. 끼긱. 케빈이 잡아두고 있던 로봇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젠 물러날 곳도, 더 이상 지체할 시간도 없었다.
나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갖은 음모와 배신, 불신. 결국 내부분열로 무너져 내린, 영광스러운 제국의 마지막.
손에 잡힐 듯 선명한 확신이 든 순간, 후라이팬이 뜨거워지더니 빛이 났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나는 눈을 떴다.
"울어라, 후라이팬이여. 노래하라, 자멸의 비극을!"
오르골의 금속 빗처럼 내 손톱이 후라이팬의 홈을 긁으며 소리를 만들었다. 어떠한 리듬을 가진, 치밀하게 계산된 소음. 소름 돋는 그 소리에 네오는 얼굴을 찡그리고 귀를 막았다.
AI 로봇들의 반응은 네오와 사뭇 달랐다. 그들은 총구를 내리고 마치 작동이 멈춘 것처럼 가만히 내 연주를 듣고 있었다. 인간의 귀에는 그저 소음일 뿐이나, 기계에게는 의미를 가진 언어인 것이다.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무렵, 로봇들은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고 쏘기 시작했다. 탕! 탕! 타앙! 마지막 남은 로봇이 결국 쓰러질 때까지, 로봇들의 동족상잔은 계속되었다.
삐기익. 연주가 끝난 무대 위에는 로봇들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네오는 귀에서 손을 떼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그 옛날 로봇들의 언어, '지버리시(Gibberish)'! 맞아, 문학이란 건 꼭 표기언어에 국한되지 않아. 작가의 시초는 노래로 이야기를 전한 음유시인이었어..."
네오의 눈이 나를 향했다. 아직 남아있는 여운에 완전히 발동을 해제하지 못한 나는 여전히 후라이팬에서 나온 빛으로 감싸여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담은 네오의 눈동자 속에 놀라움과 희망이 일렁였다.
"클로이, 당신은 음유시인.. 아니, 모든 음유시인이 흠모하는 존재, 뮤즈(Muse)로군요."
"뮤즈.."
"지금부터 당신의 코드명입니다. 사람들은 그 이름으로 당신을 알게 될 거예요."
네오가 천천히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그의 손이 내 어깨 위에 살며시 내려앉고, 발동이 멈추었다.
갑자기 극심한 피로감과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머리가 너무 무거워서 나는 그만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네오의 팔이 살며시 내 등을 감쌌다.
"환영해요. 정말 멋진 첫 데뷔였어요, 뮤즈."
갈수록 요상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나의 뮤즈..."라고 하는 네오의 머리 위로 깡! 후라이팬을 내리치며 망상이 끝났습니다.
끝. 이상입니다.
하...........
*TMI
1. 혹시 'SSS급 후라이팬'에 대해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마른틈 작가님의 원본 글: https://brunch.co.kr/@cracklight/62
제 오마쥬 글(이 글의 이전 에피소드 되겠습니다): https://brunch.co.kr/@mkchoi2021/138
2. 지버리시는 말이 안 되는 소리로, 애기들이 내는 소리처럼 말인데 말 같지 않은 말 같은 걸 뜻합니다. 기버링크의 기버(gibber)와 그 어근(?)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글에다 '저것은 기버링크!'라고 하면 너무 광고 같아서요..
3. 이러다 다 죽어! 네, 로봇들이 다 죽었네요. 이대로 가면 저도 죽겠어요. 누가 좀 말려주세요. 저뿐만 아니라 이런 써글 글을 보시는 분들의 정신건강도 위험할지 몰라요. 네. 이러다 다 죽겠어요.
후라이팬으로 머리를 내리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