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게, 사위!"
나시르는 파티마를 데리러 온 사내, 아사드(Asad)를 반갑게 맞이했다. 나시르와 나이차가 크지 않은 아사드는 예비사위라기 보단 동생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며 서로를 껴안았다. 얼핏 보면 매우 다정한 사이 같지만, 둘의 몸은 완전히 맞닿지 않고 조금 떨어져 있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네. 들어오게나."
아사드는 나시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장사로 단련된 그의 눈은 열심히 두리번거리며 곧 처가가 될 집안의 재력을 파악했다. 정령의 은혜를 입은 집이라더니, 생각보다 별 볼 일 없었다. 이 정도면 큰돈 안 들겠다, 어쩌면 이미 지불한 돈으로도 충분하겠다 싶어 그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사실 아사드는 신부를 데리고 바로 떠날 생각이었으나, 나시르는 신부는 보여주지 않고 아내를 시켜 계속 음식과 술을 내오도록 했다. 그러면서 이미 다 아는 로마 정세 이야기나 쓸데없는 뜬소문, 별로 흥미도 없는 자기네 선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웃으며 예비장인의 비위를 맞추던 아사드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지쳐갔다. 그는 얼른 떠나고 싶어서 기회를 엿보았지만, 분위기가 조금만 느슨해지면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나시르는 아사드에게 술을 권했다. 이렇게 마시다간 취하겠다, 오늘 안에 집에 못 가겠다 싶어 아사드는 나시르가 막 따라준 술을 거절하며 말했다.
"장인어른, 너무 늦기 전에 그만 떠나야 할 거 같습니다."
"가, 려고? 그럼 가야지. 가야 하고 말고..."
순간 긴장한 나시르의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그러나 곧 그는 타고난 뻔뻔함을 되찾고는, 방금 막 지어낸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떠들었다.
"그런데 말이네, 지금 떠나도 너무 늦지 않겠나? 그럼 사막에서 밤을 지새야 할 텐데. 우리 마을에서는 첫날밤도 치르지 않은 신부가 밤이슬을 맞으면 앞날이 어둡다 한다네."
"그런 것도 있습니까?"
"그럼. 그렇고 말고. 아주 안 좋지."
나시르는 눈살까지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듣느니 처음이나, 안 좋다는데 굳이 감행할 필요도 있나 싶어 아사드는 망설였다.
순진하기는. 아사드의 마음이 흔들리는 걸 보며 나시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어서 비장의 쐐기를 박았다.
"첫날밤만 치르면 문제가 없지 않겠나.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게."
"예?"
"허허! 뭘 그리 놀라나! 이미 부부인데 뭐 어때, 안 그런가?"
"그야 그렇지만..."
"걱정 말게. 우린 자리를 비켜줄 터이니. 자네 집처럼 편하게 하게나."
아사드는 벌겋게 달아오른 광대를 한껏 위로 올리며 나시르가 주는 술을 넙죽 받았다. 그 모습에 크게 만족한 나시르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벽 너머로 다 듣고 있던 파티마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어쩜 웃음소리도 저렇게 남자답고 호탕하담. 처음 듣는 신랑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붉은색으로 장식된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어서 그를 만나고 싶기도 하고, 부끄러워서 숨고만 싶기도 한 신부의 마음이었다.
이윽고 황색 모래가 붉게 타오르더니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은 파티마는 얼굴에 베일을 쓰고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조심조심 신랑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드디어 문가에 모습을 드러낸 신부를 보고 얼큰하게 취한 아사드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시르는 아내에게 눈치를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사위의 등을 한번 툭 건드리며 씩 웃었다.
"좋은 시간 보내게."
"여보게, 아사드! 일어났나?"
이른 아침부터 헐레벌떡 집으로 찾아온 나시르가 아사드를 찾았다. 잠시 후, 막 일어나 부스스한 상태의 아사드가 밖으로 나왔다. 한껏 풀어헤쳐진 그의 모습에 나시르는 일단 안심했다. 보아하니 밤새 별 문제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사드는 이름과 어울리게 사자처럼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하아암. 장인께서는 참 부지런도 하시군요."
칭찬을 빙자한 핀잔인 걸 알지만 나시르는 모르는 척했다. 그는 다짜고짜 아사드를 집 뒤쪽으로 끌고 갔다. 아직 잠이 덜 깬 아사드는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는 것에 발끈 성질이 났으나, 사뭇 심각한 장인의 표정을 보고 정신이 확 들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나시르는 주변에 듣는 사람이 있나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어젯밤 두 사람의 앞날을 위해 열심히 기도를 드리는데, 정성이 통했는가! 글쎄 갑자기 주변이 황금빛으로 환해지면서 나팔 소리가 들리고, 아주 큰 음성이 내게 말씀하시지 뭔가."
"음성이요? 설마..?"
"신의 말씀이지."
아사드가 하늘 높이 손을 올리고 경배를 했다. 그건 신앙심이 깊어서라기 보단 축복을 갈구하는 행동이었다. 복, 특히 돈복을 내리는 존재라면 사실 아사드는 어떤 신이든 믿을 사람이었다.
"신께서 뭐라 하셨습니까?"
초롱초롱 아사드의 눈에 가득하던 기대는 급격히 어두워지는 장인의 낯을 보고 싹 식어버렸다.
"아무래도... 파티마가 악령에 씐 듯하네."
"예?"
"우리도 지금껏 좋은 정령인 줄로만 알았어. 글쎄 죽을 뻔한 우리 딸이 멀쩡히 살아 돌아왔으니 말이야! 마을에 오아시스 전설도 있고. 그런데.. 신께서 하신 말씀은 전혀 달랐네."
나시르는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경건하면서도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 딸을 구한 사막의 지니는 사악한 악령, 구울이니라. 그가 그날 파티마의 영혼을 유린하고 지배하였느니라. 몸은 성하게 돌려보냈지만 영혼은 여전히 악령의 지배하에 있으니, 파티마는 그의 부름을 거역하지 못할 것이다. 악령은 파티마의 몸과 파티마가 낳을 아이를 노리고 있노라."
"아이를요?!"
아사드는 눈을 부릅 떴다. 이제 자기 것인 아내의 몸과 훗날 태어날 자신의 아이를 노린다니.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러니까! 이걸 어쩐단 말인고, 이걸..!"
나시르는 이제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놀라움과 분노, 배신감에 사로잡힌 아사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파티마가 마주눈인 건 아사드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를 아내로 점찍은 이유가 다름 아닌 그것이기 때문이다. 죽을 고비를 이긴 여자, 좋은 기운을 집에 가져올 여자, 부를 불러올 여자, 그렇게 기대했었다. 그런데 악령 씐 여자라니! 뒤통수를 맞아도 된통 맞은 꼴 아닌가.
이제 어쩐다. 그냥 입 싹 닿고 파티마를 버릴까. 아사드가 고민하고 있는데 나시르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자네에겐 면목이 없네. 맘 같아서는 내가 직접 내 딸년의 목숨을 끊어 속죄를 하고 싶은데, 그 구울이 착한 정령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우리 마을 장로가 아직 두 눈 멀쩡히 뜨고 살아 있어서 그럴 수가 없어. 그의 명령 때문에 이 마을에 사는 그 누구도 파티마를 헤쳐서는 안 되네. 그러니... 자네가 좀 해주겠나?"
아사드가 벌건 핏줄이 오른 눈으로 나시르를 쳐다보았다. 나시르는 나불나불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 양심상 어찌 우릴 위해 그래달라 부탁하겠나. 자네를 위해 하는 말이네. 이미 부부의 연을 맺어버렸으니 이제 자네도 파티마와 남이 아니지 않은가. 파티마를 이용해 자네와 자네 친척까지 그 악령이 노리면 어쩌나!"
금인 줄 알았는데 똥이었다. 아사드의 안면근육이 불끈거렸다.
아사드는 한참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 그러겠소. 내가 저 저주받은 년을 죽여드리리다."
나시르는 감격하며 아사드에게 절을 했다. 혹 돈을 내놓으라는 말이 나올까 싶어 호들갑을 떨며 아사드의 정신을 쏙 빼놓은 다음, 그는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악령이 눈치채지 못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파티마를 데리고 이 마을을 나가게. 사막에서는 절대 파티마에게서 눈을 떼서는 안 돼. 도망갈 수도 있으니. 그리고 여기서 충분히 멀어졌다 싶을 때 일을 치르게, 알겠는가?"
나시르가 품 안에서 돌 하나를 꺼내어 아사드에게 내밀었다.
"이거 받게. 성지 카바에서 구한 귀한 돌이라네. 이것만 있으면 악령 따위가 감히 근처에 얼씬도 못할 거야."
묵묵히 돌을 받아 드는 아사드를 나시르는 속으로 비웃었다. 거짓말인데. 그냥 마을 아무 데서 주워온, 흔하디 흔한 돌이다.
고맙다, 네가 여러 사람 살리는 거다, 이런 말로 아사드를 추켜 세울까 생각도 했지만 그만두었다. 그랬다가는 대가를 요구할지도 모른다. 받은 돈보다 더 내놓으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나시르는 적당히 고개만 끄덕였다. 너무 비굴해 보일 필요는 없었다.
"그럼, 채비하고 나오게나."
남편을 따라나선 파티마는 왠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아침부터 부쩍 말이 없었고, 어쩐지 계속 그녀를 감시하는 것 같았다.
혹 내가 마음에 안 드나 하는 생각에 파티마는 입이 바짝바짝 탔다. 잘 살겠다고, 그러니 걱정 마시라고 어머니에게 말하고 왔는데, 자꾸만 자신감이 쪼그라들었다.
한낮의 태양은 무자비한 열기를 그들의 머리 위로 내리쬐고 있었다. 신혼 첫날밤을 치르고 바로 떠나는 사막에서의 장거리 이동. 보기보다 잔뼈가 굵은 파티마의 몸에도 슬슬 무리가 오는 듯했다.
"저, 여보..."
잠시 적당한 곳에서 쉬었다 가면 안 되겠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차디찬 남편의 눈빛 한 번에 쑥 내려갔다. 어쩐지 그이는 유난히 화가 나 보였다.
이유가 뭘까. 섣불리 여보라 불러서 싫었을까. 파티마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 여기서 잠시 멈추지."
드디어 남편이 말을 했다. 게다가 잠시 멈추자니, 쉬자는 뜻 아닌가. 자신의 힘듦을 알아주는 게 아닐까. 그늘졌던 파티마의 마음에서 먹구름이 걷혔다.
남편은 주섬주섬 낙타 등에 달린 짐을 뒤지더니 뭔가를 꺼내었다. 그걸 본 파티마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여보... 그 칼은 뭐 하시게요..?"
"날 여보라고 부르지 마라, 이 더러운 마주눈아."
더러운, 마주눈.
남편이 칼을 높이 쳐들고 뭐라고 외쳤으나, 파티마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날카로운 칼끝이 이미 저 두 마디가 사정없이 난도질한 그녀의 가슴을 향했다.
어째서.
이렇게 사랑하는데.
"해냈다... 하하, 해냈다!"
끈질기게 헐떡이던 숨이 드디어 멎었다. 섬뜩하게도 끝까지 자신을 향하던 눈에 초점이 없어졌다.
멀찍이서 파티마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아사드는 웃었다.
결국 아무 문제 없이 끝났다. 나시르가 준 돌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자신이 외친 신의 이름을 듣고 겁이 나 얼씬도 못한 건지, 악령이란 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악령이고 뭐고 다 지어낸 소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정령이나 정령의 가호도 다 헛소리일 터. 그럼 어차피 저 여자는 쓸모가 없다. 괜히 껄끄러움 속에서 평생을 살 필요는 없다.
이걸로 되었다. 아내는 또 고르면 된다.
나시르는 칼에 묻은 피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다음에는 제대로 된 걸 골라야지. 나이가 많으니까 뭔 얘기도 많아서 안 되겠어. 다음엔 아주 어린 걸로..."
그 순간, 시야의 윗 끄트머리에 분명 아까까지 없었던 것이 걸렸다. 사람의 발 뒤꿈치. 아사드는 머리가 쭈뼛 섰다.
설마, 내가 너무 흥분해서 헛것을 보는 게지. 그렇게 되뇌며 아사드는 고개를 들었다. 휘둥그레 떠진 그의 눈이 한 남자의 뒷모습을 훑고 올라갔다.
악령. 악령이다.
아사드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어째서."
파티마의 시체 앞에 선 악령이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음성이었으나, 아사드에게는 지금껏 들어본 중 가장 섬찟한 소리였다.
"그저.. 살아 있기만을 바랐을 뿐인데..."
악령이 천천히 뒤로 돌았다. 공허한 눈이 덜덜 떨고 있는 아사드의 눈과 마주쳤다.
"... 역시 너희 인간은, 사라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