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얘기를 꺼내는 것이 누군가의 상처를 들쑤시게 될까 두렵다.
그럼에도 남이 보는 곳에 올려 두는 나는, 역시 내 글과 닮았다.
미안합니다.
어릴 적 나는 거만하게도 40대쯤에는 생이 끝나리라 막연히 생각했었다.
어디 실험실 같은 데에 틀어박혀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자. 돈은 아주 필요한 데만 쓰고, 최대한 많이 남겨서 부모님께 진 빚을 갚자.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갔으면 좋겠다. 다들 과로사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만큼.
직장에 다니고 있었으면 장례식장에 얼굴 비춰주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고인에 대한 예의표현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그들의 입에서 "참 아깝네"라는 말이 나왔으면 하고 바랐다.
아깝네. 그 말은 그간 쓸모가 있었거나 앞으로 쓸모가 있을 거라는 뜻이니까.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 사람이 더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내게는 이것이 최대의 위안이자,
끝내 나를 인정해주지 않은 나 자신, 그리고 끝내 내 손을 놓친 세상의 모든 이들에 대한 복수가 될 것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유치했고, 아직도 그러하다.
내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복수심이었다.
나와 비슷한, 또는 더 심한 경험을 한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감정이입하여, 그들의 부모와 주변 세상을 비난하며 경고를 하고 싶어서.
이런 내용이 그래도 누구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해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문장력과 어휘력, 테크닉이 부족한 것도, 나 나름 열심히 노력하겠지만 정 안 되면 사람들이 안 읽으면 그만이니까, 크게 폐가 되지는 않을 거라 여겼다.
그저 글에 지나지 않는다.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글 중 하나. 그러니 뭐 문제가 되겠나 했다.
그러다 훗날, 글이 글쓴이를 닮는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뒤늦게 아차 싶었다.
'나는 없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고 늘 스스로에게 물어온 주제에, 나와 똑같은 걸 만들고 있었다니.
'나와 같이 내 글도 필요 없어.'
'그럼 어때. 내가 없어도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돌아가. 그럼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 아냐?'
이 두 목소리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 당시 나는 '플러스도 아니지만 딱히 마이너스도 아니다'라고 결론지었고, 자꾸 떠오르는 글감이 괴로워서 글을 계속 쓰기로 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복수심은 욕심이 되었다.
누가 내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을, 그들의 운명을 안타깝게 여겨줬으면.
나의 목, 나의 가슴, 나의 손목. 그들이 누군가의 애틋함을 받는다면, 나도 간접적으로 위로를 받을 거 같았다.
죽어서야만 이뤄질 수 있다 생각했던 소망이, 결국은 내가 볼 일 없는 그 일이 어쩌면 눈앞에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고.
'글은 글쓴이를 닮는다'는 명제가 참이라면,
나와 내 글의 결말은, 어찌 보면 뻔한 일이었다.
계속 저울질해 왔던 나 스스로와 내가 쓰는 글의 가치는 이제 한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둘 다 인간의 도리에 붙어사는 거머리에 지나지 않았다.
일단 하겠다 한 일은 마무리해야지.
그다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