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화면: 나무위키)
주의: 영화 <룩백>과 만화 <블루 피리어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원치 않으시면 여기서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만화 그리는 거, 나 안 좋아해.
즐겁지도 않고, 귀찮은 데다가 멋있지도 않거든. 하루 종일 그려도 끝도 안 나고.
그냥 읽기만 하는 편이 좋아. 그릴 게 못돼."
"그럼, 후지노는 왜 만화를 그리는 거야?"
- <룩백(Look Back), 2024> 중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어린 친구에게 '후지모토 타츠키' 원작의 애니메이션 영화 <룩백>을 보여줬다. 좋은 자극과 영감을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룩백의 내용은 이러하다. (기억에 의존하여 작성하였으므로 대사나 디테일이 다소 틀릴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은 "너 그림 잘 그린다"는 칭찬을 들으며 자란 초등학교 4학년 '후지노'. 인기리에 교내 신문의 4컷 만화를 연재하는 그녀의 자존심은 하늘을 찌른다. 나중에 커서 만화가 할 거냐는 친구의 부러움 섞인 질문에도 '글쎄~? 스포츠가 나을까?' 하고 으스댄다.
그러던 어느 날, 후지노는 선생님으로부터 대인기피증으로 등교거부를 하고 있는 동급생 '쿄모토'도 신문에 만화를 올릴 수 있게 한 줄만 양보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전 상관없지만, 학교도 못 다니는 녀석이 만화를 그릴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라고 비꼬며 제안을 받아들이는 후지노. 그런데 이게 웬일? 쿄모토의 그림 실력은 자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뛰어났다. 만화라기 보단 풍경 스케치에 가깝지만, 다들 쿄모토의 그림을 보고 감탄한다. 그러면서 한 남학생이 지나가듯 중얼거린다.
"쿄모토에 비하면 후지노의 그림은 평범하네."
처음으로 라이벌이 생긴 후지노는 쿄모토를 이기려고 이후 2년 동안 폐인처럼 죽어라 그림만 그린다. 인체 구조와 구도, 그림 그리는 법에 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사서, 다 쓴 스케치북이 쌓일 정도로 열심히 노력한다.
그러나 격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후지노는 결국 그림 그리기를 포기한다. 만화 따위 잊고 가족 및 친구들과 다시 어울리며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그녀.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가. 졸업식에도 안온 쿄모토의 집에 가서 졸업장 좀 전해 달라는 선생님의 부탁을 받고, 후지노는 쿄모토를 찾아간다.
불러도 아무 대답 없는 쿄모토네 집. 다행히(?) 문이 열려 있었기에 후지노는 현관에 졸업장을 두고 가려했다. 그때 안에서 들리는 방문 닫히는 소리에 이끌려, 후지노는 집안으로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후지노를 맞이한 것은 복도를 가득 채운, 후지노 자신보다 더 많이 그린 쿄모토의 스케치북들이었다.
심술이 난 후지노는 스케치북 위에 놓인 빈 4컷 만화 용지에 히키코모리(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사람)인 쿄모토를 놀리는 만화를 그렸다. 그런데 그만 바람이 불어 만화가 쿄모토의 방문 틈으로 들어가 버린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도망쳐 버리는 후지노. 그런 그녀를 뒤쫓아 쿄모토가 집밖으로 뛰어나온다.
"후지노 선생님!"
후지노를 불러 세운 쿄모토의 말은 의외였다.
"저는 후지노 선생님 팬입니다! 사인해 주세요! 등에, 등에 해주세요!"
(참고로 둘은 동급생이다. 거리낌 없이 '선생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쿄모토는 후지노를 동경하고 있었다.)
등에 사인을 받으며 속사포랩으로 후지노에 대한 팬심을 드러내는 쿄모토. 그녀는 후지노의 실력이 갑자기 일취월장한 것까지 알아보았다(정작 본인을 의식해서 그랬다는 건 모른다).
말도 어눌한 그녀가 이 장면에서는 자신 있게 외친다.
"후지노 선생님은 만화 천재예요!... 그런데 왜, 왜 6학년 중간에 만화를 관두셨어요?"
(너 때문에...)
후지노의 대답은... 후지노 자신과 쿄모토의 인생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끈다.
<룩백>을 통해서 내 어린 친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 재능과 노력, 웃음과 좌절, 그리고 '그럼에도', 였다.
어두운 밤, 골똘히 궁리하며 4컷 만화를 열심히 그리는 4학년 후지노. (그래놓고 친구들한테는 5분 만에 그렸다고 뻥쳤다. ㅎ)
쿄모토와 헤어지고 비를 맞으며 폴짝폴짝 뛰어가서는, 비에 젖은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책상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지노.
쿄모토의 집에서 나와 눈이 쌓인 길을 묵묵히 걸어가,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서 만화를 그리는 어른 후지노.
그 뒷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친구가 좀 더 크면 '야마구치 츠바사' 원작의 애니메이션 시리즈 <블루 피리어드(2021)>도 보여줄 생각이다. (제발 그때까지 넷플릭스에 있어라..)
제목인 '블루 피리어드'는 피카소가 주로 푸른색의 그림을 그렸던, 그의 인생에서 매우 어려웠던 시기인 청색 시대(Picasso's blue period)를 뜻한다고 한다.
주인공 '야구치 야토라'는 잘 나가는 날라리 고등학생이다. 불량스러운 친구들과 놀면서도 성적은 늘 우수하고(무려 전교 4등이다. 이런 썩을..!), 용모도 준수하며 처세술도 좋아 학교 생활도 무난하게 잘한다. 흐트러져 보이지만 사실은 무서울 정도로 자기 관리가 철저한 편. 친구들과 놀고 온 날은 밤을 새우는 한이 있어도 공부 목표량을 채운다.
대체 왜 저러지 싶을 정도로 그가 이런 이중적인 삶을 고수하는 이유는 주변인들을 의식해서다.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싶고, 부모님께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남들만 생각하며 살다 보니 야토라는 정작 자기 자신이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른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운명과도 같은 일이 일어나는데...
블루 피리어드는 고등학교 2학년인 야토라가 난생처음으로 미술에 눈을 뜨고, 뒤늦게 진로를 미술로 바꾸게 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작가가 실제로 도쿄예술대학 미술학부 출신이어서, 내용이 매우 현실적이란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또한 명대사도 많은데, 그중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아마 많이들 야토라가 다니는 학교의 미술부 고문인 '사에키 마사코' 선생님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좋아하는 것에 인생의 가장 큰 무게를 두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요?"
'좋아하는 건 취미로 해라'라는 건 어른들의 생각이다, 라며 그녀가 한 말이다.
위의 말이 명대사임에는 틀림없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다른 말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미술학원에서 좋지 않은 결과를 받고 낙담한 야토라가 엄마의 통화 내용을 엿들으며 한 말이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게 늘 즐거운 건 아니야, 엄마."
(기억에 의존하여 적은 것이므로 실제 대사와 다를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게 더 이상 좋게만 느껴지지 않는 때가 온다. 심지어 괴롭기까지 하다. 그쯤 되면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조차 무서워진다. "좋아하는데 그거밖에 못해?"라는 말을 들을까 봐.
"넌 그거밖에 안 되는구나?"하고, 자신의 가치가 그 일의 결과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니까.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지 않는 이유. 취미로도 남들 앞에 잘 드러내지 않는 이유.
왜 시작했을까. 이 거지 같은 짓.
분명 좋아해서는 아니었다. 자꾸 머릿속이 이야기로 가득 차서, 그래, 괴로워서 그랬다.
표현할 방법이 문자 말고는 딱히 없어서였다. 그래, 제일 쉬운 방법이어서 글을 골랐다.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였다. 그래서 방법도 이미 할 줄 아는 타이핑이다.
절대 좋아서가 아니야. 딱히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야. 엄청 노력한 것도 아니야.
그런데 왜, 거의 4년째 하고 있었지.
"만화 그리는 거, 나 안 좋아해."
좋아하지도 않고 잘하지도 못하는 걸.
"즐겁지도 않고, 귀찮은 데다가 멋있지도 않거든. 하루 종일 그려도 끝도 안 나고."
한 편 쓰는데 최소한 대여섯 시간 걸리고, 어떨 때는 며칠까지 걸리는데.
"그냥 읽기만 하는 편이 좋아. 그릴 게 못돼."
그만 두자. 이 짓거리.
글쓰기를 관두고 열흘 넘게 소비자로만 있어 봤다. 타인의 작품을 보고 즐기는 건 정말 편하고 좋았다. '천재!' 하고 감탄하고, '그래, 역시 창작은 저런 사람들이 하는 거지.' 했다.
영상, 음악, 그림, 글. 세상엔 좋고 재미있는 게 넘쳐난다. 뭔가를 만드는 수고로움은 잘하는 사람들에게 맡겨두면 된다. 내 역할이 아니다.
내 역할은 애들 잘 돌보고, 집안을 청결하게 유지하고, 입을 옷이 있게 빨래를 제때 돌리고, 밥때 되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고, 그러다가 "맛있어요."라고 해주면 기뻐하고.
슬슬 재취업 준비해서 막내가 좀 더 크면 돈 벌어와 살림에 한 푼이라도 보태고, 의료비 무서운 곳이니까 의료보험 확보해 두는 일. 그래, 이게 내 역할이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게 늘 즐거운 건 아니야."
그러니까, 좋아하지 않는다니까.
"어째서... 어째서 이걸 그렸을까. 그려도 나쁜 결과만 생겼는데."
내가 쓴 거 쳐다보기도 싫다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럼, '너'는 왜 그리는 거야?"
"이거 봐요. 이게 내가 그릴 수 있는 최선이에요."
쑥스러운 표정으로 그림을 들고 온 어린 친구의 그림은 확실히 서툴렀다. 하지만 나는 안다.
"지금은 이게 제일 잘 그린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중에 다시 보면 '내가 이거밖에 못 그렸나?' 싶은 생각이 들 거야."
그러니까 계속해봐.
좋아하잖아.
언젠가 나도, 내가 쓴 글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날이... 올까?
#룩백 #블루피리어드 #재능 (뭔 키워드에 재능도 없냐 브런치야) #노력 #실패 #그럼에도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