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의 글 02 : 사진을 찍을걸

by 수안

“사슴에서 찹쌀떡까지 가는 길이, 오늘 교실에 있었다.”

기억에 남기고 싶은 장면을 사진으로 남길 때가 있다. 습관처럼 칠판을 지우다가 문득 아, 사진을 찍어둘걸. 이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순간 바로 메모해 뒀으면 좋았을 텐데. 내 기억력을 너무 믿었나 보다. 그래도 그때의 감각은 살아있기에 이렇게라도 남겨본다.

그날은 맨 앞자리에서 처음부터 의자를 돌려 앉는 남학생. 그랬더니 주위 몇 명이 따라서 의자를 돌려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그만큼 누군가의 행동 하나하나가 수업 분위기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얘기를 했다.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책을 펼치기 전, 이번에는 이 책에 많이 나올 것 같은 단어를 추리해 보기로 했다. 미리 준비해 간 단어는 4개였는데, 역시나 아이들은 제목에 들어있는 사슴이라는 단어를 먼저 외쳤다. 의외로 느낌표라고 외치는 아이가 있었다.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책 전체를 글로만 쭉 타이핑해서 활동지 뒷면에 인쇄해 갔는데 느낌표는 제외했기 때문이다. 느낌표를 넣어보기 활동을 하고 싶었던 내 마음을 눈치챈 것 같은 그 여학생의 대답에 흠칫 놀라면서도 마음이 통한 것 같아서, 내 마음을 알아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고 나서 겉표지를 열었는데 크레파스로 그린듯한 선들이 연결되어 그려져 있었다. 실뭉치를 풀어낸 그림이었는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아이들 반응에 장난기가 발동되었다.
선생님이 그리신 거예요?
책에 막 저렇게 그리시면 어떡해요?
괜스레 원래 인쇄되어 있는 거라는 말이 입에서 바로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글쎄요. 제가 그린 건데 어때 보여요?
이런 능청스러운 연기를 하고 있었다. 속아 넘어가는 아이들이 귀여워 보이는 건 왜였을까.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애국가를 부르는 두 남녀학생. 갑자기 옆의 남녀학생도 신나서 따라 불렀다. 그때는 왜 불렀는지를 캐묻지는 않았다. 잠시 진정시킨 뒤 다음 페이지의 책 내용이 눈길을 사로잡아서 책과 바로 연결 지었다. 와, 책 내용과 통하는데요? 지금 갑자기 좀 시끄러웠는데, 주인공이 사슴에게 정한 규칙 중에 뭐가 있었을까요?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는 시끄럽게 하지 않기.


우리 수업에서는 책을 함께 볼 때는 시끄럽게 하지 않기. 잘 알고 있죠? 지켜주세요.
그러고 나서 책을 읽다 보니 오늘따라 에너지 넘치던 그 남녀학생이 이번에는 갑자기 더 높은 텐션으로 찹쌀떡을 외치는 것이었다. 메일묵 찹쌀떡. 어떻게 그 시절의 그 외침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미리 나눠준 활동지를 길게 돌돌 말더니 풀로 붙이고 가위도 꺼내고 자신만의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그 두 학생의 행동이 너무 책에서 멀어지는 건 아닐까, 다른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칠까 싶어서 다시 책 속으로 돌아오세요. 책과 연결지은 생각과 활동이면 괜찮아요. 했더니 갑자기 사슴뿔이라며 멋진 뿔(책 속 주인공이 사슴에게 지어준 이름)이라고 길게 말아서 만든 종이를 머리 위에 얹으며 웃었다. 그랬더니 옆의 학생도 A4용지 활동지 종이 반을 접어서 머리 위에 올리며 사슴이 비를 막아주는 장면을 재현했다.


뒤에 앉은 학생들은 자신들만의 활동지 풀기를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해내고 있었다. 아직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거뜬히 해낸 1학년 여학생, 평소 함께 책 읽기에 적극적으로는 잘 듣지 않던 한 여학생은 단어 찾기와 글 전체 밑줄 긋기에 최고상을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내겐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점이 있었다. 그 남학생이 먼저 뜬금없이 메밀묵 찹쌀떡을 외친 이유가 뭘까 궁금해진 것이었다. 그래서 왜 찹쌀떡이란 단어를 외쳤는지 물어보며 역추리해 보기로 했다. 사슴에서 찹쌀떡까지. 칠판에 두 단어를 적어놓고 그 사이에 연결되는 그 남학생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 보았다. 그 사이엔 6개의 단어가 놓였다. 그 단어들을 적고 보니 찹쌀떡이 등장한 이유가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 찹쌀떡은 엉뚱함이 아니었고, 연결이 쌓여서 생긴 도착점이었다.
“생각은 네 칸 만에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다.”라고 말했더니,
옆에 앉아서 귀 기울여 듣던 두 남녀학생도 해보고 싶다고 하여 독서에서부터 단어 이어가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의욕에 가득 찼는데 연상되는 다음 단어를 이어가다 보니 비슷하고 안전한 단어들만 등장했다. 이야기, 읽기, 책 그렇게 다시 독서로 돌아오고 있었다.

맨 앞 줄의 학생들과 단어 이어가기로 서로의 생각의 흐름을 관찰하고 차이를 확인하며 다름을 인정하게 된 순간이었다. 다음 순간 늘 하던 대로 손은 칠판을 지우고 있었다. 이때 문득 이 장면을 기억하고 싶어 졌다.
그래서 사진을 찍을걸. 나도 모르게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바로 글로 써야겠다. 스스로 다짐하는데 앞에 앉은 남학생이 내 말을 듣고, 그럼 다음 시간에 그 쓰신 글 보여주세요. 하는 것이었다. 글쓰기의 동기부여를 확실히 불어넣어 준 그 남학생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찹쌀떡으로 향하던 바로 그 중간 단어들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사슴, 산, 크다, 자유의 여신상까지다.
그 다음이 있었고, 거기서 찹쌀떡으로 이어졌는데, 그 사이가 비어 있다.
사진을 찍을걸.
다음 시간에 보여달라던 그 아이에게 뭐라고 답해야 할지, 그 생각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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